< 제 69장. 공생지도(共生之道). -01 >
‘당연히 주먹을 쓸 거라 생각했는데.’
중년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예상과는 다른 선택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동도 받았다.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벽우진이 예의를 다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면 나도 이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답례겠지!’
중년인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
예의를 다하는 벽우진에게 실망감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윽고 중년인의 기도가 일별하며 벽우진을 향해 벼락이 떨어졌다.
빠르고 강맹한 일격이 부지불식간에 벽우진을 노리고서 쇄도했던 것이다.
스윽.
하지만 육안으로 쫓기 힘든 일격을 벽우진은 가볍게 회피해냈다.
여전히 검을 늘어뜨린 채로 딱 반 보만 움직여서 공격을 피해냈던 것이다.
“흐읍!”
그러나 그 모습에도 중년인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벽우진이 피해낼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중년인은 재차 도를 휘둘렀다.
쌔애액!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참격이 벽우진의 상반신을 노렸다.
사선으로 갈라버리겠다는 듯이 매섭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섬광처럼 뿌려지는 일격은 벽우진에게 닿지 못했다.
간을 보는 공격도 아니고 전력을 다했음에도 벽우진은 어렵지 않게 그의 공격을 피해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나?’
연거푸 뿌리는 참격을 모조리 피해내는 벽우진의 모습에 중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경지가 벽우진보다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차이가 날 줄은 몰랐기에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심지어 검으로 막지 않아도 될 정도라는 사실에 중년인은 갑자기 자괴감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도를 휘두른다고 다가 아니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이오. 단순히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에서 그치면 그 이상의 발전은 없소.”
“예?”
“분명 더 빠르고 날카롭게 휘두르면 위력적이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의 선에서만 통하는 공격이오.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통하지 않지.”
공격하던 것을 멈춘 중년인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년인의 모습에도 벽우진은 이해한다는 듯이 옅게 웃었다.
“인간의 육신은 한계가 있소이다.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빨라지지도, 강해지지도 않소. 물론 사람마다 한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극에 달하면 비슷한 수준이오. 그럼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공력을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력을 이용하면 더 강력한 공격을 펼칠 수 있으니까요.”
“반쪽짜리 답이오.”
“······.”
중년인이 미간을 좁혔다.
나머지 반쪽의 답을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한 번 좁혀진 미간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무인이라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소. 환골탈태를 해도 끝끝내 노화를 막을 수는 없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잘 모르겠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지요.”
중년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혼자 고민해서는 답이 안 나올 것 같기에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한 것이다.
“말보다는 느끼는 게 더 빠를 것이오. 말로는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고.”
스윽.
벽우진이 처음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중년인을 향해 휘둘렀다.
별다른 초식 하나 없이, 심지어 중년인처럼 빠르지도 않은 느릿한 일검이었다.
한데 천천히 접근하는 검을 중년인은 완벽하게 피해내지 못했다.
“어어?!”
육안으로 훤히 보이는 검초였으나 중년인은 피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대로 검극이 따라왔던 것이다.
그것도 거리를 유지한 채로 말이다.
파파팟!
그 모습에 중년인이 전력으로 보법을 펼쳤다.
빠른 움직임으로 벽우진의 검을 떨쳐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벽우진의 검 역시 빨라졌다.
“흡!”
그러나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따라오는 것을 넘어 벽우진의 검은 마치 그가 가려는 방향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그의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미리 앞을 가로막는 검극의 모습에 중년인은 전율이 돋았다.
보고도 믿기 힘든,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경악한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이 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듣는 것보다 느끼는 게 빠를 거라는 말이 말이다.
“표정을 보니 알아차린 모양이오.”
“예. 그런데 이해는 되는데, 막연합니다.”
“지금은 경험이 부족해서 그러오.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면 가능할 것이오. 이것 역시 어떻게 보면 심리전의 하나이니.”
중년인이 도를 늘어뜨렸다.
직접 겪고,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해보라고 하면 자신이 없었다.
피하지 못해서 막을 수밖에 없는 검.
하지만 그걸 실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정말 큰 걸 배운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오.”
“그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완전 다른 경지를 보고, 느꼈으니까요.”
어두워졌던 중년인의 표정이 단박에 달라졌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자신이 얼마나 큰 조언과 도움을 받았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또한 곤륜파를 찾아온 게, 벽우진을 찾은 게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도 깨달았다.
“다 그대가 준비가 되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오. 언젠가는 스스로 깨달았을 부분이기도 하고.”
“그 시간을 장문인께서 단축시켜 주셨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납도한 중년인이 읍을 하듯 길게 포권을 했다.
존경을 가득 담아 벽우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 역시 웃으며 마주 포권했다.
“다음에,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장문인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든지요.”
한참 동안이나 포권을 하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 싶어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벽우진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연신 허리를 숙이는 중년인을 달랜 후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오늘 하루 그가 가야 할 곳은 아직 많았다.
기다리고 있던 빈객들과의 비무는 오 일 내내 이어졌다.
곤륜파와 벽우진의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그를 찾아오는 이들 역시 많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제법 거물급이라 할 수 있는 무인들도 몇 명 있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럼없이 벽우진을 찾아온 것이다.
“흐아암!”
덕분에 벽우진은 업무에 쫓기면서도 빈객들을 상대했다.
때로는 제자들을 참관시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을 쌓게 해주면서 말이다.
당장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참고가 될 것이기에 벽우진은 가급적이면 제자들을 참관시켰다.
물론 상대방의 허락 하에 말이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장문인.”
“근 며칠 몸을 많이 써서 말이지요.”
“빈객들이 제법 많죠?”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벽우진을 향해 비현이 웃으며 물었다.
늘 작업실 겸 실험실에 있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벽우진의 일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많기도 하지만 계속 해서 찾아오는 중이라. 물론 떠난 이들도 많지만요.”
“그만큼 곤륜파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좋은 일이지요.”
“대신에 그만큼 피곤해지기도 했지만 말이지요.”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명성이 높아지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나 문제는 일이 너무나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청민의 선에서 한 차례 걸러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빈객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지금에야 빈객들끼리 교분도 나누고 비무도 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빈객들이 가장 원하는 상대는 벽우진이었다.
“힘내십시오.”
“후우.”
비현의 진심이 담긴 응원에도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무당파에 있을 때에도 약식으로 보고는 받았었기에 이럴 거라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힘든 건 사실이었다.
오히려 대막에 싸우러 갔을 때가 벽우진은 심적으로 더 편했다.
“접니다, 비현 형님.”
그때 연공실의 문 너머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구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등선규와 등이규가 따르고 있었다.
“왔느냐.”
“장문인도 계셨군요.”
“저도 궁금해서 말이지요.”
벽우진의 시선이 등선규, 등이규 형제에게로 향했다.
둘은 갑작스러운 벽우진의 등장에 놀라면서도 이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 없어. 내 제자들처럼 편하게 해, 편하게.”
“예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벽우진이지만 그렇다고 편안한 사이는 아니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외모를 가진 벽우진이지만 이상하게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기에 등이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아이들이로구나.”
“예, 형님.”
벽우진에 이어 자신에게 인사해오는 둘을 비현이 지그시 쳐다봤다.
특히 그는 등선규를 손짓으로 불러 진맥을 하고 몸 곳곳을 만져봤다.
“음.”
“어떻습니까?”
천하의 진구도 제자 문제에 있어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든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벽우진이 비천단을 허락했지만 그게 곧 완치를 뜻하지는 않았다.
환골탈태를 이루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진구가 마른침을 삼키며 비현을 쳐다봤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서 확실하게 말을 못해주겠는데, 일단 반반인 것 같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환골탈태라는 게 어떻게 보면 아예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니까. 가능성은 충분하지. 다만 확실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게 표본이 없어서 그렇지.”
진구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해봐야 알 수 있겠군요.”
“맞아. 직접 확인해볼 수밖에 없어.”
“그래도 형님이 계시고 비천단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다는 장문인께 감사해야지.”
비현이 웃으며 벽우진을 향해 눈짓했다.
비천단을 만든 건 그였지만 이 영단을 허락한 것은 벽우진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있을 시술에 있어 벽우진의 역할은 너무나 지대했다.
“진즉에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꿀꺽!
두 사람의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등이규가 잔뜩 긴장할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뿐인 친형이 치료되느냐, 마느냐하는 순간이었기에 등이규는 호흡도 멈춘 채 비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아 해볼래? 소리는 아예 못 내나?”
“으르르···.”
비현의 지시에 등선규가 고분고분하게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소리를 내려 애썼다.
하지만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괴이한 소리만 목구멍에서 올라왔다.
“그만. 괴로워할 정도로 낼 필요는 없어.”
금세 얼굴이 붉어지는 등선규에게 비현이 황급히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상태가 더 악화될 수 있기에 서둘러 말린 것이었다.
“나, 나을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봐야지.”
“형이 꼭 나았으면 좋겠어요. 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형이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등이규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영악하기는 해도 등이규는 이제 고작 해야 아홉 살인 아이였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담담한 얼굴로 등이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확인을 마친 비현에게 벽우진이 말했다.
그러자 비현이 미리 챙겨두었던 비천단을 가져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장문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제 69장. 공생지도(共生之道).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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