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9화 (219/325)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4 >

이른 아침 회의실로 호법들이 모여들었다.

벽우진의 호출에 한 명도 빠짐없이 회의실에 집결했던 것이다.

그런데 회의실에는 청민과 서진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셨습니다.”

“역시 부지런해.”

“저희야 아직 젊지 않습니까. 허허.”

“우리보다야 젊지만 그래도 그 나이면 노인이지.”

앞장서서 걸어오던 설백이 빙그레 웃었다.

비교 대상이 자신들이어서 그렇지 장로들의 나이도 결코 적은 게 아니어서였다.

강호에서도 원로 대우를 받아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둘이었기에 설백은 피식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장문인께서 아침부터 무슨 일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도착하셨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일 수도 있지. 진구가 데려온 제자들도 얘기하고.”

허륭의 시선이 오늘따라 조용히 있는 진구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다른 호법들도 진구를 쳐다봤다.

“인연이 닿아서 데려왔습니다.”

“뼈를 묻기로 했다면서?”

“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진구가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다른 이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인생은 자신의 것이었고, 선택 역시 본인이 하는 것이었다.

또한 다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네가 그리 결정을 내렸다면, 되었다.”

“저도 세월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예끼! 내 앞에서 세월을 논하면 안 되지!”

설백이 짐짓 꾸짖듯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장난임을 다들 알았던 것이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며 벽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도복이지만 말끔한 모습으로 회의실에 들어왔던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는가.”

“누구 때문에 푹 잘 수가 없었습니다. 서류더미에 깔리는 꿈을 꿨거든요.”

“허허허허!”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진담이 짙게 서려 있는 대답에 설백과 호법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누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들은 다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인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차만 음미했다.

“다들 앉으시죠. 이제는 저 왔다고 안 일어나셔도 됩니다. 관절과 허리를 챙기셔야죠.”

“그래도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설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들의 나이가 많다고 하나 곤륜의 종주를 앞에 두고서 그럴 수는 없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옅은 미소와 함께 설백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벽우진이 좌우를 쭉 둘러보았다.

호법들까지 모두 모이니 제법 회의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나는 듯했다.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섭니다. 정확하게는 오래 전부터 구상만 하고 있던 것인데 이제는 슬슬 꺼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경청하겠습니다.”

“소림에는 십팔나한과 팔대호법이, 무당에는 태극검수가, 화산에는 매화검수가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런 게 없을까?”

귀를 기울이던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각파마다 상징적인 조직들이 있었다.

그러나 곤륜파에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만들자고요. 이름도 생각해 두었습니다. 태청검수, 어떻습니까?”

“태극검수나 매화검수들처럼 일대제자들 중에서 수위에 꼽히는 이들을 추려서 만들 생각이십니까?”

“예. 조금 씁쓸하지만 현재 일대제자 밖에 없기도 하고요. 단 인원이 적다고 하나 대충 선별할 생각은 없습니다. 무위는 물론이고 인성 역시 깐깐하게 살펴보고 임명할 생각입니다.”

설백을 비롯한 호법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만은 않은 생각 같아서였다.

더구나 지금 당장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고 추후에 임명하겠다고 했기에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형.”

“편하게 얘기해. 나는 통보하는 게 아니라 의논을 하자고 이 자리를 만든 거니까. 회의실이 있는데 한 번쯤 제대로 사용해 봐야 하지 않겠어?”

“차차 많아질 터인데요. 다른 게 아니라 속가제자들도 포함시키실 생각입니까?”

“기준에 통과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미 고민해본 부분이었는지 벽우진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했던 청민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허락되는 무공이 차이가 있는데 속가제자가 뽑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규격 외의 존재는 늘 있는 법이야. 일례로 예지와 같은 경우도 있고.”

“아!”

“단순히 진산제자 중에서만 선별하는 건 약간 차별 같아. 속가제자 역시 본 파의 제자들인데.”

“맞습니다.”

설백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굳이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더해서 호법님들께서도 허락하시고 실력이 된다면 제자들 중에서도 태청검수를 뽑을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물론 약속한 기간을 채우고 떠나시는 분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최대한 선별 범위를 넓힐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떠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설백의 시선이 동생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눈을 피하는 이가 없었다.

비현마저도 옅게 웃으며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합니다만,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까요.”

벽우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호법들이 함께 해준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일도 없어서였다.

뒤이어 벽우진은 청민에게 간략하게 보고를 받았다.

어제의 서진후에 이어 청민도 할 말이 많은 듯 온갖 보고들을 쏟아냈던 것이다.

“다 읽었던 내용 같은데···.”

“비슷하지만 다를 겁니다, 사형.”

“너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는 거 아니냐? 아직 내 말 끝나지도 않았는데.”

“많이 안 보신 거 알고 있습니다.”

“끄응!”

정확히 짚어내는 청민의 말에 벽우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그리고 드디어 완공되었습니다. 현재 필교가 시험적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내일이면 확실하게 보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나는 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처음 완성했던 도면대로 공사가 끝난 것이고 차차 추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에 따른 예산은 여기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철두철미 하구만.”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내미는 종이를 보며 벽우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곤륜파의 미래가 달려 있는 일이니만큼 벽우진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금액이 상당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예. 하나 유지보수비용까지 생각하면 적은 금액은 결코 아닙니다.”

청민이 살짝 우려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금액 차이가 상당히 커서였다.

“그만큼 벌면 돼. 우리도 이제는 재산이 상당하다며?”

“급격하게는 아니지만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거 봐. 모자라면 내가 어떻게든 충당할 테니까 진행해.”

벽우진의 시선에 비청단과 함께 문파 내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서진후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단칼에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단호한 벽우진의 기세에 청민도 더 이상 부언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곤륜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 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말한 것이었다.

“저희도 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회의가 막바지로 향하자 설백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런데 그가 진구를 힐끔거렸다.

“진구에게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평소의 설백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모습에 벽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진구에게 시선이 향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했던 것이다.

더불어 다른 호법들도 눈치를 살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희에게도 가능한지 여쭙고 싶습니다.”

망설이던 설백이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진구와 비현을 제외한 호법들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뜨거운 눈빛들을 보냈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곤륜파를 찾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과거 대문파로서 성세를 자랑하던 때와 비교하면 아직은 조족지혈인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건 곤륜파를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소림사를 찾는 향화객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차 늘어나는 숫자에 벽우진을 비롯해서 칭민과 서진후는 만족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반 양민들뿐만 아니라 곤륜산을 찾는 풍류묵객들도 점점 더 늘어나는 중이었다.

“저곳입니다.”

“들어가자.”

“예.”

청민의 안내를 받으며 벽우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빈객들에게 내어준 처소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 명의 중년인이 경건한 자세로 서서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문인.”

“안에 계시지 않고.”

“괜찮습니다. 날씨도 선선하니 햇볕 좀 쐬고 있었습니다.”

과거 다짜고짜 비무첩만 달랑 보내고 대뜸 찾아왔던 이들과 달리 중년인은 시종일관 정중했다.

또한 눈빛이나 표정 어디에서도 거만하거나 기고만장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많이 급한 모양이시구려.”

“장문인께서 오신다는 말에 몸이 달아올라서 말이지요. 하핫! 심지어 제가 첫 번째이지 않습니까.”

“오래 기다렸다고 들었소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 명의 무인이자 어른이었기에 벽우진은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살짝 의외였는지 중년인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패선이시지 않습니까. 곤륜파의 장문인이시고. 공사다망하신 게 당연하지요. 게다가 불쑥 찾아온 건 저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제가 기다려야지요.”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맙구려.”

“저야말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거든요. 워낙에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서.”

“명성이 전부는 아니오. 나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무명소졸이었고. 나이만 가득 찬.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소.”

벽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야 패선이니 곤륜파의 장문인이니 추켜 세워주지만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벽우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청민이나 서진후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우는 필요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준비는 되었소?”

“예.”

혼자서 머무는 곳이었기에 앞마당은 작았다.

그러나 비무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지는 게 아니기에 딱히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온 청민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나자 중년인이 도를 뽑으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두 눈을 감고서 중년인은 긴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인 만큼 그는 이 기회를 허투루 날리고 싶지 않았다.

패선과 비무 할 수 있는 기회는 절대 흔치 않았기에 중년인은 짧은 순간에 몸 상태를 최적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준비 되었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오시오.”

“패선께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중년인이 검을 든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무를 시작하기 전 예의를 다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옅게 웃으며 무상검을 뽑아들었다.

‘패선께서 검을!’

중년인의 두 눈에 격동이 서렸다.

설마 벽우진이 처음부터 검을 뽑아들 줄은 몰라서였다.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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