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3 >
“죄, 죄송합니다!”
인상을 쓰며 양쪽 귀를 막는 벽우진의 모습에 일곱 명의 사내들이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또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벽우진은 인상만 쓸 뿐 딱히 구박하거나 잔소리하지 않았다.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너무 긴장하지 마. 나도 사람이니까. 이제부터는 너희들의 사백이기도 하고.”
“우, 우와아···.”
“사백님이라니···.”
“뭐, 일단 너희들도 속가제자인 건 알고 있지?”
사백이라는 말에 일곱 명 전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패선을 사백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벽우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안 들리는 모양인데요.”
“참나.”
“저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속가제자 신분이라는 걸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근데 약관이 넘는 녀석들을 아이들이라 부르니까 좀 이상하기는 하네.”
제일 어린 남자가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가장 많은 이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하지만 그 말에 서진후는 웃으며 반박했다.
“허허. 하삼이는 서른다섯이었는데요.”
“쯧. 한 마디도 안 지지.”
“많기는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닙니다. 시작이 늦었다고 해서 도착지에 꼭 늦게 도착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유도 생기고. 많이 컸어, 청범이.”
서진후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 역시 벽우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일곱 명의 제자들을 선택할 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전부 다 사형 덕분입니다.”
“안 믿는다, 그 말.”
“진심이에요. 너희들은 이만 나가 봐.”
눈치를 살피는 일곱 명에게 서진후는 축객령을 내렸다.
허락을 받았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앞으로의 대화는 가급적 둘이서만 하는 게 좋았고.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오냐.”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에 뒷걸음질로 접객실을 나가는 일곱 명을 향해 벽우진이 손만 까딱였다.
그리고는 다시 서진후를 쳐다봤다.
“용봉회는 어떠셨습니까? 이번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너는 가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어떤 분위기일지요. 저 역시 상상만 하던 곳이라. 들은 건 많지만요.”
“그냥 후기지수들의 친목모임이지. 단지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큰.”
“볼거리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예지가 구환비룡을 때려잡았다고. 그래서 검봉이라는 별호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숨기려고 애썼지만 벽우진의 눈에는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기색이 말이다.
웃음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해 보였다.
“그냥 웃어. 억지로 참지 말고.”
“푸흡! 아닙니다.”
“네 손녀사랑이 유별난 건 다 아니까 그냥 웃어도 돼.”
“괘, 괜찮습니다. 풋!”
끝끝내 웃음을 참는 서진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토록 좋아하면서 애써 참으려고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뭐, 네 편한 대로 해.”
“흠흠! 죄송합니다, 사형.”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보다 이번 용봉회에서 다양한 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여인들의 육탄공세도 당하셨다고요.”
서진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마치 좋은 놀림거리를 찾았다는 듯이 말이다.
“육탄공세까지는 아니고. 그냥 과도한 관심 정도?”
“사형 정도면 일단 달려들 만 하지요. 장문인에다가 패선이라 불리실 정도로 무명 역시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다 늙은 노인도 아니니 확실히 구미가 당길 만 하지요.”
“일 없다.”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도 은근히 접근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서진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비청단을 맡고 있는 만큼 알아낸 것도 많았던 것이다.
특히 벽우진에 대해서는 매일 같이 확인했다.
“쓸데없는데 왜 인력을 낭비해?”
“쓸데없다니요. 사형을 살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사형이 곧 곤륜파인데요.”
“됐고. 저 아이들, 괜찮겠어?”
“예. 고수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뽑은 아이들이 아닙니다. 비록 자질은 부족할지 모르나 믿을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서진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거면 벽우진은 족했다.
“네가 그렇다면야.”
“혈연만큼 결속력이 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충성심은 확실합니다. 방금 전의 모습 때문에 못미더우시겠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시면 사형께서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심 안 해. 적어도 속내를 감추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고수가 될 자질을 가진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많고.”
벽우진은 그저 믿는다는 듯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러자 서진후 역시 마주 웃었다.
“진 호법님께서 제자들을 구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더불어 곤륜에 뼈를 묻겠다고도 하셨지.”
“···정말요?”
서진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놀란 것이었다.
반대로 벽우진은 느긋하게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약간 식은 차를 데워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이제는 곤륜파라는 배경이 제법 쓸모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 아이들하고도 정이 많이 드셨고.”
“북적대던 것에 익숙해지면 조용한 게 오히려 낯설어지죠. 사람이라는 게 원래 어울려 사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다른 호법님들께서도 고민이 좀 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맞습니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리기보다는 기대했다는 말이 맞겠지만 그래도 벽우진은 호법들이 남아주었으면 싶었다.
많은 일을 함께 했기에 앞으로도 그들과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고수가 부족해서 강제로 초빙해 왔지만 지금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의외네. 네가 제자를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관심도 없는 줄 알았고.”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사형께서 비천단이라는 보물을 내려주신 덕분에 이제는 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애들은 똘똘하게 생겼드만.”
“일처리 하는 게 야무집니다. 제가 또 사람을 보는데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서진후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수십 년 동안 상계에서 구르고 구른 사람이 바로 그였다.
관상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어떤 사람인지 얼추 보였다.
“그랬었지.”
“저 녀석들 덕분에 진짜 한시름 놓았습니다. 물론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지만요.”
“무공수련?”
“예. 다들 무공에 대한 미련이 상당하더라고요. 이해는 합니다. 고수라는 두 글자에 가슴이 뛰지 않을 남자는 없지 않습니까.”
벽우진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고수, 강자, 천하제일, 협객 이런 단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말이다.
“그래서 자는 시간마저 쪼개가면서 다들 기본기를 다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곤륜파의 무공을 배우길 기다리면서요.”
“잘 가르쳐 봐. 꼭 고수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곤륜파에 필요하느냐, 보탬이 되느냐니까.”
“예.”
“근데 집무실에 내가 결재해야 할 서류가 많냐?”
벽우진이 슬그머니 물었다.
이미 예상이 가지만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짐작하고 계신 게 아마 맞을 겁니다.”
“휴우.”
예상했던 대답에 벽우진이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민 사형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 저번보다 늘면 늘었지 줄어있지는 않을 겁니다.”
“···장문인 대리면 웬만한 건 결재해도 되는 거 아냐?”
“칼 같은 청민 사형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끄응!”
벽우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괜히 그가 청민에게 부재 시 장문인 대리라는 직책을 내린 게 아니었다.
“그보다 사형께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또?”
“예. 이건 저나 청민 사형의 권한 밖인 문제라서요.”
“말해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벽우진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보지 않아도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서류더미에 머리가 아파왔던 것이다.
그것도 탑처럼 높게 쌓여 있을 게 분명하자 벽우진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꽤 많은 분들이 본 파를 찾아오셨습니다. 빈객으로 머물고 싶다면서요. 근데 중원뿐만 아니라 세외에서도 몇 분이 오셨습니다.”
“세외고수까지?”
“예. 아무래도 본 파가 청해성에 자리 잡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중원 못지 않게 신강이나 서장과도 가까운 게 청해성이지 않습니까.”
“빈객이라.”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묘하게 흡족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빈객으로 머물겠다고 하는 건 그만큼 곤륜파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뜻했다.
아무 이유 없이, 명성도 없는 문파를 찾는 고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문파나 명문세가의 경우 이름 있는 빈객들이 제법 많이 머무르고 있었다.
“저도 놀랐습니다. 대뜸 비무첩이나 보내는 놈들이나 있었지 이렇게 정중하게 찾아오는 이는 처음이라서요.”
“몇 명이나 되는데?”
“점점 늘어나 현재는 열 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사형께서 무당파에 가 계시다는 것을 아는데도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듯이 눌러 앉았습니다.”
“식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서진후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답했다.
산불이라는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곤륜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다.
축적한 재화도 상당할뿐더러 번 돈을 족족 투자했기에 크게 돈이 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원이나 규모에 비하면 재정이 탄탄한 편이었다.
“흠흠! 우리도 이제는 품위유지비 같은 게 필요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이제는 떵떵거리며 살 정도는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산은 늘어나고 있고요. 속가제자들이 속한 가문에서 받는 후원금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큰 금액을 보내오는 곳은 청하상단과 비호표국이고요.”
“진짜? 막 써도 돼?”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요. 여유롭게 살 정도는 됩니다. 이번에 식구가 두 명 늘지 않았습니까.”
서진후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손이 큰 벽우진의 성격 상 여유롭다고 하면 말 그대로 펑펑 써댈 게 분명해서였다.
사람이라는 게 없을 때는 허리띠를 졸라매지만 있을 때는 팍팍 쓰기 마련이었다.
그걸 서진후는 막고 싶었다.
“에이. 겨우 두 명 는 것 가지고.”
“험험! 아직은 아껴야 합니다.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것도 크고, 앞으로 빈객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야.”
엎드려서 다리를 붙잡고 매달릴 것 같은 서진후의 반응에 벽우진은 일단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서진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없는 동안 별 일 없었지?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놈들이 있다거나 하는.”
“주기적으로 순찰도 돌고 있고, 비청단도 곤륜산 인근에 완전히 자리 잡았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형께서는 장문인으로서의 업무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제일 싫어. 갑자기 머리가 노래지는 것 같아.”
가장 듣기 싫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서진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자에 늘어졌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저는 믿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형께서 저희들의 믿음에 보답하실 거라는 걸요.”
서진후의 말이 이어졌지만 의자에 늘어진 벽우진은 좀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왕이면 최대한 집무실에 늦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닥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벽우진은 이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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