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2 >
용봉회를 무사히 마치고서 벽우진은 다시 곤륜파로 돌아왔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확연하게 달라진 곤륜산의 모습에 벽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작은 묘목들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던 것이다.
“집이다!”
“역시 곤륜산이 제일 마음 편해.”
“후우우.”
산문으로 걸어오는 내내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무당파에서 귀빈급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바로 곤륜산이었기에 아이들은 그저 도착한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크긴 크다. 그치, 형?”
반면에 곤륜산이 처음인 등선규, 등이규 형제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묘목들이 심어져 있는 곳을 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적들이 곤륜산에 불을 질러 공격했다는 소문은 둘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산불이 크게 났다고 하지만 곤륜산은 워낙에 거대했기에 크게 확 티가 나지는 않았다.
“키우는 재미가 있겠어.”
끄덕끄덕.
앞으로 지내야 할 곳이자 이제는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곤륜산이었기에 등선규는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등선규는 집이라는 단어에 감격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들어가자.”
“예!”
“혁문이가 우리 애들 밥 잘 줬나 모르겠네.”
벽우진을 위시로 제자들이 성큼성큼 산문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진구와 등선규, 등이규가 따랐다.
“애들이요?”
“응. 우리들 목장도 있거든. 말도 있고, 소도 있고. 토끼랑 돼지, 개도 있어.”
“우와.”
등이규가 눈을 반짝거렸다.
목장이라는 말에 얼굴 가득 호기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또 다른 사형제들도 있고. 본 파의 속가제자들도 있고. 아마 조용한 날보다 시끄러운 날이 더 많을 거야. 그래도 애들은 착해.”
귀를 쫑긋거리는 등이규의 모습에 심소혜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정작 등이규가 듣고 싶어 하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호법들과 속가제자들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등이규는 물론이고 등선규의 집중도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동생 못지않게 등선규도 동물을 좋아했기에 귀는 기울이지만 크게 집중해서 듣지는 않았다.
“목장 얘기 좀 해줘. 애들은 그걸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히힛! 아는데 일부러 말 안 해준 거예요.”
“짓궂기는.”
잠자코 듣고 있던 서예지가 심소혜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너무 심하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였다.
“헐! 어떻게 누나가 그럴 수 있어!”
“둘 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거든. 언니오빠들이 옛날에 왜 날 놀렸는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너무해!”
등이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진구가 엄한 얼굴로 돌아보자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킥킥!”
“진짜···. 두고 봐. 언젠가 꼭 복수할 거야!”
등이규가 뜨겁게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심소혜를 쏘아봤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내 금세 사그라졌다.
이어지는 심소혜의 말에 잔뜩 날 서 있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졌던 것이다.
“목장 구경시켜줄게. 숙소에서 짐 풀고 바로 나와.”
“진짜?”
“응. 앞으로는 너희들도 애들 밥을 챙겨줘야 하니까. 너희가 막내라서가 아니라 원래 다들 돌아가면 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주로 하기는 하지만.”
등이규는 물론이고 등선규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기에 둘 다 잔뜩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두 형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심소혜가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녀석들.”
그리고 그 모습에 서예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와도 심소혜가 진짜 잘 챙겨주는 것 같아서였다.
말은 쉬워도 진짜 하기 힘든 일인데 말이다.
“우리가 동생들을 잘 키웠죠.”
“우리라니, 형. 대혜 누나가 다 키웠지.”
“우리도 지분이 좀 있지 않나?”
“내가 보기에는 없어.”
심소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보기에 심대혜가 아니었다면 심대현은 물론이고 자신이나 심소혜가 구김살 없이 자라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다 같이 한 거지. 우리는 늘 같이 있었으니까.”
티격태격하는 남동생들을 달래며 심대혜가 곤륜산을 둘러봤다.
맑은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자 진짜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치, 누나?”
“응. 얼른 가자.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니까.”
“으으. 일부터 거론하지 마. 갑자기 머리 아파 와.”
“빨리 해야 일이 줄어들지. 어서 가자.”
심대혜가 동생들을 어르고 달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속가제자들과 인사하고 수련까지 하려면 여유는 없었다.
호법들의 제자들 역시 만나 봐야 했고 말이다.
‘여제자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 모습을 진구가 유심히 쳐다봤다.
세심함이라는 부분에서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앞설 수밖에 없어서였다.
때문에 진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여아도 제자로 들이기로 말이다.
옥청궁에 서진후를 위시로 일곱 명의 사내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접객실로 마련된 방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마주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서진후는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긴장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패선이시잖아요.”
“사형의 성격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고?”
서진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좌중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정곡을 찌른 말에 다들 입이 다물어졌던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성격이 과격한 건 아니니까. 오히려 말수가 없는 편이야.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거든.”
“대신에 주먹부터 날리신다고···.”
일곱 중 가장 왜소한 체격의 청년이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가라앉았다.
패선이라는 별호에서 패라는 글자가 단순히 사람을 패서 붙은 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의외로 근거 있는 소문으로 알려져 있기에 다들 얼굴을 굳혔다.
“소문이 이상하게 난 건 알고 있는데, 사실이 아냐. 사형은 손을 써야만 하는 이들에게만 손을 써.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만약 그런 사람이었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추앙하겠어?”
“그, 그렇겠죠?”
“응. 오히려 잔정이 많으신 분이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확실하게 챙기기도 하고. 대막행에 대해서는 너희들도 잘 알고 있잖아?”
일곱 명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아무래도 정보를 주로 만지다보니 그쪽에 대해서는 빠삭했기에 다들 똑같이 안도한 것이었다.
“물론 실수에는 가차 없으시니까 명심하고.”
“예.”
달칵.
잠시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바짝 조여졌을 때 문이 열렸다.
바로 벽우진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치 제 집 안방인 마냥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벽우진의 모습에 일곱 명 전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뭐야? 여기 뒷골목 흑도방파였어?”
자리에서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인사해오는 일곱 명의 모습에 벽우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해도 너무나 과한 인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 그게···.”
“애들이 사형을 만난다고 하니 많이 긴장했습니다.”
“나 보는 게 뭐라고.”
“충분히 긴장할 만 하지요. 사형에 대한 무서운 소문도 많지 않습니까. 선행도 제법 있지만 그 못지않게 무서운 말들도 많습니다.”
“한 마디로 나한테 겁먹었다?”
벽우진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모습에도 서진후는 빙그레 웃었다.
“잘 모르는 사람은 긴장하고 떨 수밖에 없지요. 이번에 무당산에서 좀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그냥 달려들던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막상 일대일로 대면하면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모여서 집단을 이루면 또 모를까.”
“귀신같네.”
보지 못했음에도 정확히 짚어내는 서진후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고는 상석에 앉았다.
하지만 일곱 명의 사내들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석상처럼 얼어 있었다.
“십인십색이라지만 그래도 비슷한 게 사람이니까요. 유별난 몇 명 빼고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제가 또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않았습니까.”
“허리 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내 목이 아프다.”
“죄송합니다!”
“목소리는 작게 하고.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일곱 명이 황급히 허리를 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자리에 앉지 않았다.
워낙에 위명이 쟁쟁한 벽우진이다 보니 자연스레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앉아도 돼. 뭘 그렇게 눈치를 봐?”
“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기에 이렇게 눈치를 봐?”
벽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진후를 쳐다봤다.
겁을 줘도 엄청 준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서진후는 억울했다.
“별다른 말 안 했습니다.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 정도?”
“근데 왜들 저래?”
“세간에 퍼진 소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워낙에 무섭게 소문이 난 건 사실이니까요. 십존도 때려잡아, 북해빙궁주도 박살내, 거기에 대막까지 가서 사왕성주도 아작 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저렇게 겁을 먹는 건 이상한 것 같은데.”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삐딱한 자세로 서진후를 쳐다봤다.
“잘 모르는 사람은 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지요. 더구나 사형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있으면요.”
“대가 너무 약한 거 아냐?”
벽우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곱 명에게 향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히 패선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능력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사형께서 그렇게 노려보는데 기가 죽지 않을 인물이 몇이나 있을까요? 얘들 나이는 많아도 무공은 아직 익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기초 체력만 다지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래도 제자를 들이는 일인데 사형께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저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사형께서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네 제자들인데 굳이 내 허락까지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벽우진이 턱을 괴며 일곱 명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서진후의 말도 있고 해서 두 눈에 힘을 풀고서 천천히 한 명 한 명 둘러봤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벽우진의 눈빛을 마주하는 이는 없었다.
“사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니까요. 곤륜파의 제자가 되는 것인데 함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요.”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지는 알겠어.”
“바로 알아보셨습니까?”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장문인이야. 나이가 몇 살인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벽우진이 콧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의외로 고민 없이 곧바로 결정했다.
“저야 늘 사형을 믿지요.”
“말은 참 잘해.”
“제가 입으로 벌어먹고 살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잘 키워 봐. 근데 의외이기는 하네. 지금까지 관심이 없어서 제자는 안 키울 줄 알았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벽우진의 허락에 일곱 명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까 전과 똑같이 접객실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치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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