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6화 (216/325)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1 >

“흐아암!”

어느덧 용봉회도 마지막 날이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칠 일이 어느새 훌쩍 지나갔던 것이다.

동시에 벽우진의 하품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박진감 넘치는 비무도 재미있는 건 하루 이틀뿐이었다.

“많이 지겨우신 것 같습니다.”

“제갈가주는 아냐?”

“허허허. 저야 재미있지는 않지만 많이 봐두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중원무림의 미래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게?”

벽우진의 시선이 여전히 주변에서 재롱잔치 하듯 팔다리를 쭉쭉 내뻗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부모들의 등쌀에 벌써 며칠 째 저러는 모습에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요즘에는 인생역전이라는 말도 나온다고 합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자신의 제자들이 인생역전 한 것이 맞기는 했다.

만약 그의 눈에 띠지 않았다면 다들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벽우진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고.

‘근골과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노력이니까.’

혹자는 말한다.

노력 역시 재능의 일부라고 말이다.

벽우진은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그리고 비록 장문인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몇 명은 스승을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인연인 게지.”

“하하하.”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대답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벽우진의 기준이 다른 의미로 상당히 높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더불어 자네까지 그럴 줄은 정말 몰랐고.”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제갈미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제갈현이 옅게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벽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으래?”

“예. 전 그저 딸이 장문인을 한 번 뵙고 싶다기에 데려온 것이 전부입니다.”

“흐으음.”

담담하게 말을 잇는 제갈현을 벽우진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제갈현은 그 눈빛에도 담담히 차를 들이키기만 했다.

“저는 소개해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곳이 더 적극적으로 나왔지요.”

“지금 남궁세가를 에둘러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제갈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자리에 남궁진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크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남궁진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작게 헛기침만 했다.

“어제만 하더라도 장문인께 대놓고 육탄공세를 펼치지 않았습니까.”

“정말 난감했지.”

용봉회가 끝나갈수록 벽우진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적나라해졌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벽우진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기에 눈치를 보던 것을 넘어 아예 직접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철면피로 무장하고 접근했음에도 그 뜻을 이룬 이는 없었다.

무당파의 도인들이 나서서 가로막아준 덕분이었다.

“저는 재미있게 구경했습니다만.”

“은근히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니까.”

“현실적으로 비일비재한 일이기도 합니다. 권문세가의 사람들이 나이 어린 새 첩을 받아들이는 일은 은근히 빈번하니까요. 더구나 다들 알고 있습니다. 곤륜파의 도인도 혼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화산파 역시 혼인이 가능하고요.”

“난 말하고 다닌 적이 없는데 말이지.”

벽우진이 불편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인 같지 않은 도인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또한 혼례 역시 생각한 적 없었고.

곤륜파를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벽우진은 솔직히 벅찼다.

“그만큼 장문인께 관심이 많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곤륜파 역시 마찬가지고요.”

“참 쓸데없는 일이 관심이 많다니까.”

“그게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정세가 불안정한 것도 한 가지 이유이고요.”

대막의 사왕성을 쓰러뜨리면서 중원무림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지만 그럼에도 북해빙궁과 오독문이 휩쓸고 간 피해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까스로 상처가 봉합된 상태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쩌면 더욱더 곤륜파에 매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냉정하게 따지면 곤륜파보다는 사천당가가 훨씬 나은데 말이지.’

제갈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천당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사람들이 은근히 기피한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이야 호남처럼 호방하고 호탕한 모습을 보이는 당민호였지만 제갈현은 알고 있었다.

젊었을 적 당민호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말이다.

“아직도 불안한 건 사실이지. 일단 저쪽 동네에 대해서 전혀 알아내질 못하고 있으니까.”

“예. 개방주가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럴 테지. 저 쪽이 중원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들의 영역에서는 마음대로 활보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거지들이 나타나면 경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현재 답보상태입니다.”

제갈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알아낸 것은 극히 적었다.

딱히 중요한 정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당연한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일단 주시하는데 의의를 두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알겠습니다.”

“그보다 준비는 잘 되어가나? 올해는 힘들고 내년에 여는 걸로 정해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곤륜에도 제가 직접 전서응을 보냈습니다만?”

제갈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분명히 그가 직접 작성한 서신을 전서구도 아니고 전서응을 통해서 보냈었다.

그런데 넘겨짚듯이 물어오자 제갈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확인해야 할 사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리고 내 나이를 생각해 봐.”

“······.”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었고.

게다가 벽우진의 입장에서는 그리 중요한 사안도 아니었다.

직접 출전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빛내주는 역할이 전부였으니까.

‘나가면 나가는 대로 문제고 말이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림무제와 무당권제는 이미 벽우진에게 한 차례 패배한 상태였다.

물론 비무인 만큼 생사결을 벌이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제갈현은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엇비슷한 경지라면 또 모르겠지만 둘과 벽우진의 격차는 너무나 컸다.

그런 만큼 벽우진이 출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법무 대사와 혜량 진인도 출전하지 않는 마당에.’

벽우진이 출전한다면 홍보는 분명히 될 것이었다.

패선이라 불리는 그와 손속을 겨뤄볼 수 있는 정말 큰 기회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할 터였다.

대부분은 벽우진의 명성에 짓눌러 출전을 포기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심사위원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용봉회보다 더한 관심이 집중될 터였다.

그리고 그게 곧 중원무림의 힘을 증명하는 모습이 될 것이고.

“나이로 나뉘어서 두 개로 대회를 치른다고 했었지?”

“예.”

“최소 나이는 열 살이랬나?”

“열다섯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어리면 어른과 아이의 대결처럼 보일 것 같아서요. 그리고 아무리 천재라도 열 살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벽우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열다섯 살이 기준이라면 제자들 전부다 출전하기는 힘들어서였다.

“그건 그런데···.”

“대회는 이번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음에도 열릴 것입니다.”

아쉬움이 가득한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벽우진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출전해도 될 만한 실력을 제자들 전부가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했기에 제갈현은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오대세가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갈세였지만 그건 무력으로 차지한 자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제갈현은 벽우진의 이런 자신감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만약 장문인의 피를 이어받는다면?’

아버지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이지만 가주로서는 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후대를 생각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중원을 호령하는 고수를 배출할 수 있을까?’

제갈세가가 오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력이 아닌 지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제갈세가가 무가(武家)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무공 역시 다른 오대세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고.

다만 타고난 무재가 이상하리만치 썩 좋지 않았다.

최절정고수는 심심찮게 나오지만 소림무제나 무당권제, 혹은 제왕검과 같은 절대고수는 탄생한 적이 없었다.

‘후우.’

어쩌면 그래서 제갈미미가 나선 것일지도 몰랐다.

굴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제갈세가의 육신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힘들 거라는 생각도 했다.

똑똑하기로 유명한 제갈세가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준비할 것들이 많으니까요. 장소가 아직은 미정이라.”

“인원이 한둘이 아닐 테니 일단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야겠지.”

“예. 그리고 이동하기도 편해야 하고 숙박시설도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참여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백, 수천 명이 넘을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장소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온갖 이권을 노리고서 접근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머리 아프겠군. 그럼 차라리 제갈세가에서 여는 건 어때?”

“지리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모든 이를 감당할 수도 없고요.”

“잠자리야 천막을 치면 되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열면 야영을 해도 그리 춥지는 않을 테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최적의 장소를 찾는 중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선택지가 좀 있다는 점입니다.”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그래도 후보지가 다양하다는 점이 한 가닥 위안이 되어서였다.

만약 적당한 후보지조차 없었다면 제갈현의 머리는 지금보다 더 빠졌을 터였다.

“뭐, 알아서 잘 고르겠지. 그보다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는 거 같던데?”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소문이 퍼진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자연스레 홍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또 미리 준비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요. 최대한 성대하게 열어야 하는 저희들 입장으로서는 오히려 좋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피곤한 일도 많아질 게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지요. 이게 다 중원무림을 위한 일이니까요.”

제갈현이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그 역시 자기 나름대로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조금만 고생해. 그 다음은 소림이랑 무당이 책임져줄 테니까.”

“곤륜파는요?”

아주 당당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소림과 무당만 거론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제갈현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 밉지는 않았다.

“당연히 우리도 도울 거다. 근데 우리 규모를 생각해야지. 크게는 힘들어.”

“장문인의 이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늦지 않게 와주십시오.”

“노력해보마.”

예전이었다면 뺀질거리는 얼굴로 고민했겠지만 운정의 말이 떠올라서 벽우진은 어쩔 수 없이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운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주기적으로 진행 상황을 전서응으로 보내겠습니다. 답신 부탁드립니다.”

“···그래.”

서신을 보내봤자 벽우진이 읽지 않으면 말짱 꽝이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조건을 달았다.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 제 68장. 사람이 모이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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