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7장. 별이 지다. -02 >
“그리 하겠습니다.”
“···예.”
편안하게 웃고 있는 운정과 달리 벽우진과 혜량의 얼굴인 편치 않아 보였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죽음으로 비롯되는 이별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서였다.
특히 혜량은 운정과 함께 한 시간이 한두 해가 아닌 만큼 겨우겨우 눈물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눈물로 인해 사백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서.
“고맙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영광입니다.”
“허허허! 영광까지야. 어차피 장문인은 더 높은 곳에 있지 않나. 다만 그럼에도 장문인을 부른 건 이런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네. 참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경청하겠습니다.”
벽우진이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무당파의 기본공인 태극검 하나로 종사의 경지까지 오른 이가 운정이었다.
또한 강호의 선배이자 존경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검객이 바로 그였기에 벽우진은 경건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강호를, 아니 사람들을 굽어 살피었으면 좋겠네. 성인이 되어 달라는 게 아니라네. 그저 조금만 주변을 둘러봐 주었으면 좋겠네.”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맙네.”
알겠다라는 말도 아니고 단순히 노력해 보겠다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운정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력해보겠다는 말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저도 조금씩은 변하고 있으니까요.”
“그거면 되었네.”
스윽.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운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사질인 혜량이 있었다.
“혜량아.”
“예, 사백님.”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 것이라 믿는다.”
부르르르!
혜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울컥한 표정으로 몸을 떨기만 했다.
그 모습에 혜량이 인자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만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휘이이잉.
시원한 밤바람이 산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제법 매서운 바람에 세 사람의 옷이 거칠게 펄럭였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없었다.
스으윽.
바람에 도복을 휘날리며 혜량이 처소 앞 공터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무를 취기 시작했다.
운정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검의 기수식부터 모든 초식들을 하나의 춤사위처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오오오.
공력이 좁쌀만큼도 주입되지 않은 검이었지만 운정의 낡은 송문고검에 담긴 기세는 감히 천하를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운정의 검은 결코 자연을 짓누르지 않았다.
태산과도 같은 거력을 품고 있음에도 오히려 자연과 어우러지려 노력했다.
휘리리릭.
자연 역시 그걸 거절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운정은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파공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주변과 동화된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던 것이다.
‘저게 사백의 검.’
평생 동안 오직 태극검만을 수련한 운정이 닿은 조화의 경지였다.
그것을 혜량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검무가 자신에게, 그리고 무당에게 남기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감격이 해일처럼 그를 휩쓸었다.
‘무당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개파조사님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무당파 최고의 절학이자 검공이며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검법인 태극혜검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혜량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그는 검이 아닌 권을 익혔지만 그렇다고 검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극에 이르면 다 비슷해진다는 만류귀종이라는 말처럼 운정이 보여주는 검무는 그가 가야 할, 도전해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으음.’
너울너울 춤을 추듯이 검무를 펼치는 운정의 모습에 벽우진의 표정 역시 진지해졌다.
역시나 검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불어 벽우진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강맹하다 못해 패도적인 자신과는 상극이기에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던 것이다.
우뚝!
일다경 동안 쉬지 않고 검무를 추던 운정이 갑자기 멈춰 섰다.
여전히 행복한 얼굴로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던 것이다.
“사백님!”
마치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운정의 모습에 혜량이 다급히 땅을 박찼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서 귀천했음을 그도 알아차린 것이었다.
‘평안히 쉬시길.’
부르짖는 혜량을 놔둔 채로 벽우진은 조용히 포권을 했다.
혜량을 향해서 예를 다했던 것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거성이 저물었다.
운정의 장례식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딱히 성대한 장례식을 원치 않았기에 조용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믿기지가 않아요. 그렇게 정정하셨는데.”
벽우진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심소혜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답게 운정이 죽었다는 소식에 눈가를 적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다.
갑자기 떠난 사실에 충격이 적지 않은 듯했다.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단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이것 또한 인생이란다. 아직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사부님.”
운정이 원했던 대로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다.
땅이 묻히기보다는 깔끔하게 떠나길 원했던 것이다.
“왜 그러느냐?”
“사부님은 오래오래 저희랑 함께 해주세요.”
심소혜가 벽우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앙증맞은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말이다.
“물론이지. 소혜가 시집가는 것까지 보고 갈 것이야.”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주세요. 네?”
“후후! 그래.”
자신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서 말하는 심소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옅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앞 쪽에 모여 있는 무당파의 사람들을 쳐다봤다.
평생 동안 검 하나만 수련한 운정에게는 제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혜량이 장문인이자 가장 큰 사질로서 장례식을 주도 하고 있었는데 밤새 얼마나 운 것인지 두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화르르륵.
이윽고 본격적인 화장이 시작되었다.
혜량이 붙인 불이 빠르게 불타올랐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벽우진은 조용히 묵념했다.
생전 운정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기렸던 것이다.
스스슥.
그런 벽우진을 따라 제자들도 하나둘 고개를 숙이며 두 눈을 감았다.
“평안히 잠드시길.”
“크흐흑!”
마지막으로 혜량의 묵념과 함께 여기저기에 억눌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당파 제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 구슬픈 소리에 벽우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운정이 마지막에 그에게 남긴 말이 떠올라서였다.
‘굽어 살피라고 하셨지.’
지금껏 벽우진은 사문과 자신의 주변만 챙겼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였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곤륜파가 성세를 회복할수록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동시에 신경 쓸 것도 많아졌고 말이다.
‘장담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잊지도 않겠습니다.’
사천당가에서 이어 어젯밤에도 남긴 말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약속했다.
무조건 실천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까먹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휘이이잉.
묵념의 시간이 끝나고 무당파만의 방식으로 장례식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걸 벽우진 일행은 뒤쪽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중원무림을 지탱하던 큰 별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용봉회는 계속 해서 진행 중이었고 벽우진 역시 매일 같이 시달리는 중이었다.
“이놈의 청탁은···.”
자신의 집무실도 아닌 그저 배정 받은 숙소일 뿐인데도 침소의 한쪽에 마련된 책상에는 서찰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바로 이번 용봉회에 찾아온 천하 각지의 가문들, 무문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어디어디 지역의 고가장, 반룡문 등등 이름도 생소한 곳에서 보내온 서찰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대동소이 했다.
내 자식이, 내 손주가, 혹은 핏줄 중에 특출난 아이가 있는데 한 번 봐달라는 것이었다.
“어후.”
처음에야 신기한 마음에 몇 개 열어봤지만 그 이후로 벽우진은 아예 까보지도 않았다.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어디서 온 것인지만 봐도 대충 내용을 예상할 수 있어서였다.
“업무지옥에서 벗어났다 싶더니 이제는 서찰지옥인 건가.”
똑똑똑.
“사부님. 일우입니다. 기침하셨는지요?”
“아아. 들어와.”
침상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벽우진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윽고 이른 아침임에도 말끔히 옷을 차려 입은 양일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하셔야지요, 사부님.”
“난 괜찮다. 애들은?”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난 딱히 생각 없으니까 너희들끼리 먹어. 이따가 칠성궁에서 간식거리 집어먹어도 되고.”
“조금이라도 식사는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요즘 식사량이 부쩍 줄어드신 것 같아서요.”
양일우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벽우진의 식사량이 눈에 띠게 줄어드는 것 같아서였다.
예전에는 고기도 가리지 않고 먹었던 벽우진인데 요즘은 딱히 식욕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하더라도 탕이나 두부요리 몇 개 집어먹는 게 다였다.
“난 조금만 먹어도 충분하니까. 예전이야 벽곡단에 질려서 이것저것 먹었던 거지. 근데 이제는 웬만한 요리는 다 먹어봐서 안 땡기는 것뿐이다.”
“사제들의 걱정이 상당히 큽니다, 사부님. 특히 소혜가요.”
“걱정할 것도 많다. 내가 아예 굶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이제 좀 도사다워지는 것이 아니더냐. 후후후!”
자기가 말해놓고도 웃긴 모양인지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양일우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거 없다니까. 그냥 생각이 없어서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나 먼저 칠성궁에 가 있을 테니까 애들 챙겨서 데려와.”
“예.”
“처음 참석한 용봉회는 어때?”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 있던 양일우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감상을 묻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이 퍼뜩 들기도 했습니다.”
“경쟁자가 참 많지? 천재들도 많고, 수재들도 많고.”
“예. 경각심이 계속 해서 들었습니다.”
“세상은 넓어. 그걸 알려주고 싶어서 데려온 것인데 다행히 잘 느끼고 있나 보네.”
“자만에 빠지는 아이는 없을 겁니다.”
양일우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부가 벽우진이었다.
눈앞에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이 있는데 어느 누가 자만심에 빠지고 오만해질까.
그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도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는 마. 너희들이 입문한 시기를 생각해야지. 사실 말이 안 되는 건 너희들 쪽이야. 다른 후기지수들에게는.”
“다들 그걸 알기에 더욱더 절차탁마하고 있습니다.”
비천단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 제자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기고만장하기보다는 더욱더 노력했다.
이러한 보물을 투자한 만큼 기대가 적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에 부응하기에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리고 참고로 말하면 난 너희들의 연애사에 크게 관여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마음 가는대로 해.”
“······!”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양일우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다만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거, 알고 있지?”
벽우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주어가 빠져 있었음에도 단박에 이해되는 한 마디에 양일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양일우. 패선의 제자이자 곤륜파의 대제자.
현재 그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 제 67장. 별이 지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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