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7장. 별이 지다. -01 >
“장 공자의 생각은 알겠소. 하지만 그걸 우리에게는 강요하지 마시오.”
“그 쪽이 그렇게나 기회주의자일 줄은 몰랐소이다.”
진심이 담긴 충고에도 여전히 모여 있는 장정들은 비아냥거렸다.
장춘이 이상한 것처럼 다들 몰아갔던 것이다.
“기회주의자가 나쁜 건가? 이상하네. 난 다들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말이지.”
“······.”
“하물며 청해일미, 아니 검봉(劍鳳)을 힐끔거리던 이가 한둘이 아닌 걸로 봤는데. 아닌가?”
“커험!”
“큼!”
장춘의 시선을 그 누구도 마주하지 못했다.
은근슬쩍 서예지를 훔쳐본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물론 상상 속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고고하게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게 틀린 건 아니니까. 다만 달라지지 않을 뿐이지.”
장춘은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이들이 민망하지 않게 하나하나 정중하게 응대하는 곤륜파의 제자들에게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 근처에는 구룡오화도 같이 있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만 다행히 장춘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백파의 장춘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곤륜의 도일수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 대막행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고요.”
“아닙니다. 그저 다른 분들께 짐이 되지 않은 정도입니다.”
장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젊은 나이이기에 조금만 추켜 세워줘도 우쭐할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어서였다.
‘역시 다르다는 건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센 이들과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에 장춘은 역시나란 생각이 들었다.
괜히 패선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슬쩍 둘러보니 제자들 중 누구도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는 이가 없었다.
얕잡아 보지도 않았고, 대놓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진짜 금방 자리를 잡겠는데.’
패선은 강하지만 그를 받쳐주는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호법들이 있다고 하나 고작 열 명으로는 세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제자들이 십 년 정도만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면 더 이상 곤륜파에 우려를 표하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장백파라면 혹 장백산에 있는 문파입니까?”
“아시는군요. 변방에 위치해 있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선들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지 않습니까.”
“시조께서 우화등선하셨다는 말은 있는데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워낙에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오늘 처음 봤음에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권위의식이 없고 사문인 장백파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장춘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 그리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만.”
“가르침이라니요.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도일수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근래 들어 무명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지만 남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었다.
“위명이 쟁쟁하신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부님과 사형제들의 덕을 본 것뿐입니다.”
“역시 힘든 건가요?”
장춘이 얼굴 가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안면을 익힌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좀 더 끈끈한 관계가 되고 싶어서였다.
앞으로 곤륜파의 위명은 더욱더 커질 게 분명했고 말이다.
“아닙니다. 저 역시 장백파의 무공이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오히려 먼저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 소협.”
“그럼?”
“저 쪽으로 가시죠. 저기라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장춘의 얼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거절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어서였다.
그래서 장춘은 화색을 띤 얼굴로 도일수를 따라 이동했다.
“허어!”
“어라?”
그 모습에 몰래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저리 쉽게 비무를 하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인지 하나둘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이동했다.
곤륜파의 장문인으로서 업무 차 무당파에 왔지만 벽우진은 좀처럼 마음 편히 쉬지를 못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만큼 옥청궁의 책상 위에는 그가 확인해야 할 문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이것 참. 일하러 와서 또 일거리를 걱정하게 될 줄이야.”
차라리 노는 것이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절대 놀기 위해서 무당산을 찾은 게 아니었다.
곤륜파의 당대 장문인으로서 초대를 받아 어쩔 수 없이 무당파에 온 상태였다.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겠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벽우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깐깐한 두 사제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까지도 보고서로 만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둘 게 분명했다.
그걸 떠올리자 벽우진은 넌덜머리가 났다.
벌써부터 숨이 턱하니 막혔던 것이다.
“음?”
생각만 해도 끔찍한 광경에 벽우진의 눈 밑이 한순간에 시커멓게 변했다.
단순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안색이 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세 개의 인영이 숙소 뒤에 있는 자그마한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녀석들.”
작고 앙증맞은 그림자 세 개에 벽우진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막내들의 등장에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선규는 안 나와도 되는데.”
도리도리.
심소혜를 향해 등선규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리를 다쳤기에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해도 기마자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불편하기는 해도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고, 생각보다 회복이 빠른 상태이기에 기마자세로 하체를 단련하는 것은 가능했다.
“우리 형이 고집이 좀 있어서요.”
“그래 보여. 생긴 건 되게 선하게 생겼는데.”
“저는요?”
“넌 누가 봐도 악바리지.”
“쳇!”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등이규가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심소혜는 오히려 웃었다.
“천자문은 몇 개나 외웠어?”
“한 이백 개?”
“벌써 그 정도나?”
심소혜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나 빠른 습득력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저는 느린 거예요. 형은 벌써 사백 개나 외웠는 걸요?”
동생의 말에 등선규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별 거 아닌 것을 대단하다고 하자 민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심소혜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두, 둘 다 머리가 진짜 좋구나.”
“이 정도면 좋은 거예요?”
“응. 적어도 우리 남매들보다는 좋아. 엄청나게.”
“헤에.”
등이규가 눈을 반짝였다.
열심히 외우고 공부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천자문 얘기는 이쯤하고 얼른 수련 시작하자. 내가 기초부터 가르쳐줄게. 너희 둘은 진 호법님의 무공을 배우겠지만 그래도 기본 골격은 비슷하니까. 진 호법님이 익히신 무공의 뿌리가 본 파에서 갈라져 나온 건 알고 있지?”
“예.”
“그러니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우리도 보법을 익히기 전에 이것부터 수련하기도 했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등이규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퍼뜩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걸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스윽.
반면에 등선규는 제법 익숙하게 기마자세를 취했다.
그야말로 정석대로 완벽하게 기마자세를 했던 것이다.
“선규도 기마자세 하면서 잘 보고 있어. 지금은 할 수 없지만 다리가 다 나으면 너도 해야 되니까.”
심소혜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벽우진의 눈에는 여전히 귀여운 아이였지만 말이다.
‘소혜도 참 많이 컸다니까.’
언제나 애기일 것만 같았던 심소혜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철이 일찍 든 탓에 어리광을 부리는 경우가 없어 안쓰럽기도 했지만 대견하기도 했다.
지금만 하더라도 살뜰히 동생들을 챙기기도 했고.
곤륜산에서 배혁문을 늘 챙기는 것도 바로 심소혜였다.
‘막내였기에 질투할 법도 한데 말이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심소혜의 모습에 벽우진은 기특하면서도 씁쓸했다.
더 이상은 마냥 어린아이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장문인.
“응?”
야심한 시각에도 수련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던 벽우진이 순간 움찔거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온 전음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나일세, 장문인.
“선배님?”
-지금 나에게 와줄 수 있겠나?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운정의 전음에 벽우진이 몸을 날렸다.
그의 전음이 끝나기 무섭게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이윽고 벽우진은 한 마리의 맹금처럼 너무나 표홀하게 야공을 가로질렀다.
턱.
운정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벽우진은 단숨에 그의 처소 앞까지 날아왔다.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날렸던 것이다.
“왔는가.”
“사, 사백님!”
그때 벽우진의 옆으로 혜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다가 나온 모양인지 가벼운 옷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혜량의 모습에 운정이 인자하게 웃었다.
“선배님.”
하지만 웃는 운정과 달리 벽우진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빠르게 흩어져가는 운정의 선천진기가.
달리 생명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기운이 빠르게 쇠락해져가는 모습에 벽우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장문인도 알고 있지 않았나. 혜량 역시 마찬가지고.”
“사백님.”
혜량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그 역시 운정의 호출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기에 슬픔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운정은 평소와 같이 담담했다.
“그래도 적응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평생 동안 그렇겠지요.”
“허허허. 무릇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네. 또한 죽음은 천리인 법. 거스를 수도, 거스르지도 말아야 하지.”
“······.”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벽우진이나 혜량 둘 다 선뜻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저희 둘만 부른 것입니까?”
“둘이면 충분하지 않나. 사형들은 이미 전부 귀천했고, 나만 남았으니.”
“장로들이 있지 않습니까.”
혜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그였지만 이 자리에서는 막내였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서 뭐하느냐. 가뜩이나 손님들도 많은데. 나는 둘이면 충분해.”
“사백님.”
혜량이 힘겹게 운정을 불렀다.
그러나 그를 향해 운정은 말갛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다. 벽 장문인에게는 빚을 갚고 싶었고.”
“빚이라니요. 저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허. 내 생각에는 빚을 진 것 같아서 말이오.”
사천당가에서 한 번 겨루어 봐서 그런지 운정이 한결 편하게 벽우진을 대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벽우진은 고구마를 삼키다가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운정의 생명력은 빠르게 흩어지고 있어서였다.
스르릉.
시종일관 말간 미소를 지어 보이던 운정이 낡은 송문고검을 뽑았다.
그의 평생을 함께 한 반려이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검이 주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애잔한 검명을 토해냈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말이다.
“그동안 못난 나를 만나서 고생이 많았다.”
우우우웅!
부드럽게 쓰다듬는 운정의 손길에 송문고검이 잘게 떨었다.
이별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깊고 긴 검명을 토해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운정의 얼굴에 처음으로 슬픈 기색이 서렸다.
“고맙고, 미안하다.”
우우웅!
낡은 송문고검이 마치 대답을 하듯이 잘게 떨었다.
그러자 운정이 인자하게 웃었다.
“빈도의 마지막을 두 사람이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네.”
< 제 67장. 별이 지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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