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3화 (213/325)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4 >

염화적이 눈을 빛냈다.

강호에서 명망 높은 명문세가는 아니지만 대대로 절강성 항주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가문이 바로 그의 가문이었다.

때문에 염화적은 벽우진이 충분히 자신의 가문과 아들을 눈여겨 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재능은 충분하니까!’

살이 좀 쪄서 그렇지 아들의 근골은 제법 훌륭했다.

키도 또래보다 일척은 더 컸고, 힘도 장사였다.

동네에서는 한두 살 많은 형들도 가볍게 제압할 정도로 말이다.

‘안목이 남다른 장문인이 내 아들의 재능을 못 알아볼 리 없지!’

염화적이 히죽 웃었다.

지금껏 벽우진이 선택한 제자들은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여주었다.

속가제자들은 아직 증명을 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입산한 시기를 생각하면 당분간은 지켜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본산제자들은 달랐다.

짧은 시간에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다.

‘땅꾼의 아들, 객잔에서 일하던 고아들, 거기에 쟁자수 하나. 이런 녀석들도 저만한 고수가 되었는데 우리 아들이라면 저 녀석들보다 더한 고수가 되겠지!’

전형적인 문사 체형의 그와 달리 아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장군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정도로 골격이 장대하고 힘이 넘치는 만큼 염화적은 아들을 보는 순간 벽우진이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합!”

“합!”

“내가 더 잘해!”

“나는 허공에서 다리도 찢을 수 있어!”

염화적이 야망과 탐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뿌리며 벽우진이 자리 잡은 원탁 근처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데 역시나 먼저 와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자식들을 앞세우고서 말도 안 되는 재롱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아빠, 난 뭐를 해야 해?”

“간단해. 이것들을 부수면 돼.”

“알았어!”

염화적이 조용히 따라온 하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등에 각목을 한 아름 메고 있던 하인이 그것들을 하나씩 아들에게 건넸다.

“최대한 시원하게, 소리가 크게 나도록 박살을 내버려.”

“이런 건 쉽지!”

힘 쓰는 것이야말로 아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두 팔의 힘만으로 각목을 부러뜨렸다.

제법 두꺼운 두께의 각목을 어렵지 않게 동강냈던 것이다.

우지끈!

어느 정도 휘어지다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는 각목에서 제법 큰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아이들만 있는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들리자 다들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드디어!’

그리고 그 중에는 벽우진도 있었다.

역시나 큼지막한 소리에 반응한 것이었다.

“흐아암!”

하지만 벽우진의 시선이 아들에게 머문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뭔가 하고 보더니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던 것이다.

털썩!

그 모습에 염화적이 멍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기대했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순간적으로 넋을 놓은 것이다.

“푸크큭!”

“킥!”

주변에서 억눌린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염화적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일을 꾸몄는지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벽우진의 간택을 받는 이는 없었다.

누구 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어째서! 왜 우리 아들이!”

“직접 찾아가 봐야 하나?”

워낙에 쟁쟁한 인물들이 주변에 있어 누구도 선뜻 벽우진을 찾아가지 못했다.

벽우진은 무명도 높지만 그 못지않게 까칠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괜히 귀찮게 했다가 된서리를 맞을 수도 있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설마 단 한 명도 없는 건가?”

“제자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우리 아이의 재능을 몰라보는 거지? 대체 왜?”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는 이제 와서 벽우진의 안목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자신의 자식이 선택 받지 못하자 벽우진 탓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 언제까지 해야 해?”

빠직!

그렇게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염화적의 아들은 계속해서 각목을 부수고 있었다.

재미있는지 혼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이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구나···.”

“에, 끝난 거야? 그럼 나 이제 저 삼촌 제자 되는 거야?”

아들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강호를 진동시키는 협객이 된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염화적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에, 다음 기회를 노리자꾸나.”

차마 아들에게 현실을 말해줄 엄두가 나지 않은 염화적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눈빛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네요.”

“용봉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그래도 이해는 갑니다. 제가 만약에 저들과 같은 입장이었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들었을 겁니다.”

체념한 얼굴로 연회장을 벗어나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마지막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못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벽우진이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음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들을 쳐다보며 제갈현이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욕심이 과해. 아무리 자기 핏줄이라지만 평가도 너무 후하고.”

“그게 부모이지 않습니까.”

“때론 냉정할 필요도 있는 법이야.”

남궁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짜 재능이 있다면 어떻게든 연이 닿았을 터였다.

물론 벽우진의 제자들처럼 특이한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 무당파까지 왔음에도 지금껏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그건 한 가지를 뜻했다.

부모들이 생각하는 만큼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인정하기, 아니 인정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

세상에는 인력으로 되는 게 있었고, 안 되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인생을 마음 편하게 살려면 안 되는 일에 매달려서는 안 되었다.

적당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게 속 편했다.

마치 그가 없는 왼팔에 굳이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가주님께서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달려서 달라질 것은 없어.”

“맞습니다. 근데 장문인.”

“왜?”

“정말 없습니까?”

제갈현이 슬쩍 물었다.

그동안 벽우진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제자를 구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늘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자들을 받아들였으니까.

하물며 같이 앉아 있는 진구조차도 그렇게 깐깐하게 제자를 구하다가 뜬금없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있으면 내가 움직였겠지?”

“근골이 썩 괜찮아 보이는 아이들도 있던데요.”

“그럼 뭐해. 우리와 안 맞는데.”

“속가제자로 받아들일 만한 아이도 없습니까?”

벽우진에는 자신만의 남다른 기준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갈현은 더욱 궁금했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벽우진이 제자를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아직은 안 보이네.”

“그래도 제자는 계속 받아들이실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단호하게 대답하는 벽우진을 보며 목진자가 슬그머니 대화에 참여했다.

곤륜파의 행보에 대해 궁금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공동파 역시 한창 세력을 키워야 할 때이기도 했고.

“받아들여야지. 지금은 인원이 너무 적으니까. 일단 청민이가 좀 더 제자들을 들여야 하는데.”

“속가제자들도 더 받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곤륜파에 입문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받아들일 수는 없지. 괜히 이상한 풍문에 휩싸일 수도 있고.”

“저도 그게 가장 근심거리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받을 수가 없어서요. 제자를 가르친다는 게 단순히 무공만 가르치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그 역시 같은 입장이어서였다.

또한 같이 문파를 재건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이런 광경은 조금 부럽습니다.”

“부럽기는. 자네에게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걸? 공동파도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지 않나.”

“과거에는 그랬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목진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현재 아홉 개의 문파를 꼽으면 공동파가 들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문파의 몰락을 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고.

“에이. 그래도 우리보다는 낫지. 우리는 규모 자체가 공동파와도 비교가 안 되는데.”

“대신 질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나 이후가 문제지.”

목진자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이다 보니 말을 조심하는 것이었다.

말이라는 게 한 번 내뱉어진 순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목진자는 벽우진의 눈치만 살폈다.

“마음에 드는 아이들은 있어?”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괜찮기는 하지만 꼭 데려오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요.”

“애매한 느낌 나도 잘 알지. 그리고 애매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는 게 중요해. 괜히 애매한 게 아니거든.”

“맞습니다.”

아직도 곳곳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지만 정작 벽우진이나 목진자, 진구의 시선을 끄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소림사, 화산파, 청성파, 아미파의 수장들도 하나둘 칠성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벽우진과 당민호, 개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로 모여든 것이다.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벽우진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는 군소방파의 자제들과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명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신흥방파라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한 곳에 모였던 것이다.

비슷한 처지이기에 자연스럽게 모인 그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기색으로 곤륜파의 제자들에게 다가가는 이들을 쳐다봤다.

“박쥐같은 녀석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왜? 저것도 처세술의 하나인데. 현재 가장 끗발이 좋은 패선의 제자들이잖아. 안면을 익혀둬서 나쁠 것은 없지.”

아니꼬운 시선으로 곤륜파의 제자들에게 접근하는 후기지수들을 쳐다보던 이들이 한 곳을 쳐다봤다.

마치 자신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그럼 장 공자도 가시지 왜 여기 있는 거요?”

“지금 가봤자 어차피 제대로 기억도 못할 테니까. 저렇게 우르르 몰려간다고 능사가 아니지.”

“대단하시구려. 거기까지 계산을 하고 있을 줄이야.”

벽산문의 대제자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의 이죽거림에도 장춘은 되레 빙그레 웃었다.

“대세를 굳이 거스를 필요가 있나. 그리고 자네 역시 속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지 않나.”

“무, 무슨 말을!”

대제자가 얼굴을 붉혔다.

발끈하며 소리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장춘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부러우니까 이렇게 툴툴거리는 거지 않나. 자기도 저렇게 관심을 받고 싶은데, 받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거기다 나이도 적지 않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다들 똑같겠지만.”

장춘의 시선이 주위에 모여 있는 청년들을 훑었다.

그러자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들로 그를 쏘아봤다.

너무나 적나라한 말에 반감이 일었던 것이다.

“말이 너무 과한 것 같소이다.”

“아무리 가장 연장자라고 하나, 말은 가려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흠!”

여기저기에서 헛기침과 서늘한 적의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장춘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깎아내리는 게 더 이상해 보여서 말이지. 적어도 저들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자네들은 어떤가? 그저 지켜만 보고 있지 않나? 그럼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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