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2화 (212/325)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3 >

혀를 차는 벽우진을 향해 혜량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순화해서 한 말이었다.

정작 벽우진은 그의 말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의 곤륜파는 많은 이들이 입문을 희망하는 문파입니다. 잠재성은 두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전통과 역사 역시 가지고 있는 명문이니까요.”

혜량을 거들 듯이 제갈현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조용히 앉아 있던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십 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 부럽습니다. 저희는 아직도 갈 길이 깜깜한데 말이지요.”

벽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제갈현이나 목진자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지금 곤륜파가 보여주는 성장세라면 곧 구대문파에 복귀하고도 남았다.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우리와 점창파이지.’

형산파와 종남파는 빠르게 피해를 회복하고 있었다.

특히 종남파의 약진이 대단했다.

이해득실에 밝은 곽자량이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전력을 복구하고 있었기에 목진자는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세인들도 구대문파에 어느 곳이 속할지 궁금해 하기도 할 테고.’

목진자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규모는 가장 작았지만 구대문파 중 그 어떤 곳보다 세인들의 집중을 받는 곳이 바로 곤륜파였다.

게다가 곤륜파에는 일당백, 아니 일당천을 넘어 일당만에 가까운 벽우진이 있었다.

패선이라는 별호 하나만으로도 다른 명문대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만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대문파의 한 자리에 곤륜파를 채울 터였다.

“깜깜하긴. 잘 하고 있는 것 같더만.”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래도 많이 부족합니다. 하하하.”

“그러면 됐어. 차차 나아지는 게 중요하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잖아? 본 파는 단 셋이서 시작했어.”

“열심히 본받는 중입니다.”

“공동파의 제자들도 많이 늘었네.”

벽우진의 시선이 공동파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심대현이나 심소천, 도일수 등과 함께 있기에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들 열의가 대단합니다. 북해빙궁을 몰아내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기도 하고요.”

“신경 써야 하지. 분명히 언젠가는 다시 쳐들어 올 테니까.”

“예. 그래서 다들 대비하고자 부지런히 수련하는 중입니다.”

목진자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곤륜파의 제자들처럼 눈부신 성장세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노력들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목진자는 언제가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하고 있네.”

“감사합니다.”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고. 자네가, 공동파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그래도 본보기가 있다는 건 상당한 도움이 되니까요. 자극도 되고요.”

“우리 애들에게도 마찬가지야.”

벽우진의 시선이 하나둘 비무를 시작하는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상대는 공동파의 제자들이었다.

어제는 구룡과 비무를 하더니 오늘은 공동파의 제자들로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을 수 있는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고개를 주억거린 벽우진이 당민호를 쳐다봤다.

이제는 황보세가, 하북팽가의 가주들과 함께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모습에 벽우진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덩치 하는 두 사람이 합류했음에도 당민호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은 공동의 힘이 미약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야. 앞날은 아무도 몰라. 가까운 예로 본 파를 봐. 그리고 공동파 역시 명문대파 아냐?”

“가, 감사합니다.”

목진자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우진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원한은 절대 잊지 않지만 은혜도 절대 잊지 않아. 공동파에 도울 일이 있으면 곤륜파는 언제든지 힘을 보낼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눈가가 촉촉해진 목진자가 감동받은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벽우진은 별 것도 아닌 일로 왜 울컥 하냐는 듯이 쳐다봤다.

“참고로 이건 너희들에게도 마찬가지야.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것이 당연하니까.”

“꼭 그런 걸 바라고 대막행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중원무림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함께 한 것이지요.”

“하지만 아예 바라지 않는 건 또 아니잖아.”

“장문인의 말씀대로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허허허.”

제갈현이 은근히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닌 척은.”

“분위기가 어제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갈현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런 얘기는 이렇게 공개된 곳에서 하기에는 조금 그래서였다.

“그래도 어제 봤다고 눈에 좀 익은 것이겠지.”

“곤륜파가 제일 인기 많네요. 그동안은 구룡오화에 집중되었는데.”

“천편일률적인 것은 무엇이든 좋지 않아. 변화가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이지.”

벽우진이 흐뭇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은 안 해도 제자들이 후기지수들의 집중된 관심을 받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리고 벽우진의 제자사랑은 세간에 이미 유명했다.

“하긴.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까요.”

제갈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말이다.

한편 어제와 달리 용봉회가 열리는 칠성궁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들의 비율이 확연히 올라가 있었다.

어제는 정말 후기지수들 위주로만 모여 있었다면 오늘은 부모나 삼촌, 혹은 당숙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거 칠성궁을 찾았던 것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을 대동한 채로 말이다.

“왜 하필 오늘 저렇게 죄다 모여 있는지.”

“내 말이. 하나같이 바쁘신 분들이 왜들 저렇게 모여 있는 것인지.”

아이, 조카, 혹은 어린 손주를 대동하고서 칠성궁을 찾은 이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하나같이 벽우진과 장문인, 가주들이 앉아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탄식을 흘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기회이기는 한데 말이지.”

반대로 비슷한 상황이지만 눈을 빛내는 이도 있었다.

요즘 한창 강호를 뒤흔드는 곤륜파가 가장 좋은 건 사실이지만 제갈세가나 남궁세가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세가 기울었다고 하지만 하북팽가나 황보세가 역시 나쁘지 않았고.

아직은 강호를 호령하는 명문세가인 만큼 저 가문들의 눈에 띄어도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실세는 곤륜파지.”

패선이 든든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곤륜파야말로 떠오르는 신성이자 가장 이상적인 문파였다.

일단 규모가 작다 보니 중진의 한 자리를 잡기도 쉬울뿐더러 패선의 제자사랑은 너무나 유명했다.

속가제자들의 복수를 위해 대막까지 쳐들어간 일화는 너무나 유명했고.

유명세와 무공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 가장 혹할 수밖에 없는 건 장문인의 제자사랑이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시작을 끊느냐인 건데···.”

부모들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벽우진 주위에 너무나 대단한 이들이 모여 있기에 모두가 섣불리 다가가질 못했다.

여기 있는 그들도 고향에서는 방귀 깨나 뀌는 이들이었지만 감히 남궁세가, 제갈세가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막말로 저들의 말 한 마디면 가문이, 문파가 풍비박산 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기에 다들 은밀히 눈치를 살폈다.

‘일단은 우리 아이가 패선의 눈에 띄어야 하는데. 좋은 수가 없을까.’

벽우진이 무당파에서 열리는 용봉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에 멀리 절강성에서 온 염화적이 눈알을 굴렸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벽우진이 자신의 아들을 볼까 궁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벽우진을 힐끔거려도 그의 시선은 제자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물가에서 놀고 있는 자식을 지켜보는 것처럼 제갈세가주, 목진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주시하는 모습에 염화적이 입술을 핥았다.

“아빠. 저거 먹으면 안 돼?”

“기다려 봐. 음식은 나중에 실컷 먹을 수 있으니까.”

“우리 동네와는 다른 음식 같은데. 맛있어 보이는데.”

철없이 아들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를 닮아 길쭉하기보다는 동그란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마음껏 먹지 못하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지금 음식이 중요한 게 아냐.”

“그럼 애들이랑 놀면 안 돼? 여기 예쁜 애들 많던데.”

아홉 살임에도 남자는 남자였다.

어려도 예쁜 아이와 못 생긴 아이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평소라면 귀여웠을 그 모습이 지금은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럼? 저기 저 남자 보이지?”

“아저씨들 사이에 있는 삼촌?”

“그래.”

염화적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벽우진이 앉아 있는 원탁이었다.

“저 삼촌이 왜?”

“아들은 저 분의 제자가 되어야 해. 그러면 영웅이 될 수 있어. 그것도 이 강호를 호령하는!”

“영웅?”

나지막하지만 힘이 담긴 아빠의 어조에 아들이 눈을 빛냈다.

어리기에 더더욱 영웅이라는 말에 혹했던 것이다.

“그래. 협객도 될 수 있고.”

“진짜?”

“응. 하지만 저 분은 아무나 제자로 받아주지 않아. 그러니까 아들은 저 분에게 잘 보여야 해.”

“아빠가 그렇게 해줄 수 없어?”

아들이 천진난만한 눈으로 염화적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아빠는 마치 신처럼 모든 걸 자신에게 해줬다.

그렇기에 아들은 이번에도 아빠가 그리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강호의 영웅, 협객이 된 자신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번만은 안 돼. 아빠의 힘으로도 불가능해. 오직 아들만이 할 수 있어.”

“히잉. 그냥 아빠가 해주면 안 돼?”

찐빵처럼 통통한 볼을 잔뜩 부풀리며 아들이 떼를 썼다.

보통은 이러면 힘든 일도 아빠가 해주어서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정말 안 돼. 아빠가 할 수만 있다면 진즉에 해줬지.”

염화적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가 아들을 어르고 달래는 사이 어느새 많은 이들이 벽우진에게 상당히 접근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비무로 어수선한 사이 다들 자기 자식, 혹은 조카들을 데리고 슬그머니 벽우진이 앉아 있는 원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나 혼자는 무서운데···.”

“협객 되기 싫어? 되기만 하면 예쁘고 귀여운 소녀들이 아들에게 줄을 설 텐데?”

“흐으으!”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지 아들이 헤벌쭉 웃었다.

그러나 반대로 염화적은 초조해졌다.

경쟁자들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벽우진을 향해 접근하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뭐가 중요하다?”

“저 무서운 삼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맞아. 그러니까 얼른 가자. 저 분의 제자가 되기만 하면 절강성이 문제가 아니야. 전 중원에 아들의 이름을 떨칠 수 있어. 그리 되고 싶지?”

“응!”

아들이 방금 전과 다르게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근육이라고는 전혀 없는, 살이 포동포동한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자, 가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 염화적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이 기세를 몰아 벽우진에게 자신의 아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패선이라면 반드시 내 아들의 자질을 알아볼 것이야! 아니, 어쩌면 절강성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가문과 손잡는 것을 감안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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