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1화 (211/325)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2 >

양일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성 어디에서도 분하거나 짜증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패배가 익숙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과 남궁혁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땅꾼이었으니까.’

아버지를 따라 온 산을 뒤지고 다니던 게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다가 천운이 닿아 벽우진을 만났고, 무인이 되었다.

반면에 남궁혁은 남궁세가의 적자이자 차대 가주였다.

애초부터 시작점이 다른데 이 정도로 접전을 벌였다면 선전한 것이었다.

“다행히 제대로 알고 있네.”

“소혜가 말해준 게 컸습니다. 만약 소혜가 알려주지 못했다면 아직도 어설프게 알고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알면 되었다. 그럼 대책 역시 생각해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더욱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양일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머리를 숙였다.

결국 필요한 건 수련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것은 중요해. 상대보다 우위에 있는 걸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점을 살리기 전에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져놓아야 한다는 거다. 강점을 살리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오히려 더욱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잘했어. 짧은 시간에 이 만큼 성장해주어서 고맙다.”

“아닙니다.”

벽우진이 제자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비무에 대해서 족집게 조언을 해주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내일은 제가 오빠들을 대신해서 꼭 이길게요!”

“무리는 하지 말고.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해.”

“흠흠!”

앙증맞은 주먹을 불끈 쥐고서 소리치는 심소혜를 바라보며 벽우진이 말했다.

어린만큼 충동심도 크기에 불의의 사고는 의외로 많았다.

조심한다고 해도, 감독한다고 해도 사상자가 심심찮게 발생했던 것이다.

‘죽은 이의 대부분이 치정 문제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당차게 소리치는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벽우진이 생각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양일우가 헛기침을 했다.

제자들 중에서 가장 상처가 많은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대련이나 비무에서 이기면 좋지만, 그렇다고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생사결이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무리하지 말고.”

“예!”

“오늘 비무를 했지만 그렇다고 수련을 빼먹어서는 안 되겠지?”

“네!”

우렁차게 대답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몸 풀기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제자들 역시 그를 따라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몸을 풀었다.

아주 기초적인 체력훈련만 했음에도 하루 만에 감기몸살에 걸려 용봉회 첫 날에는 참석하지 못했던 등이규가 목발을 짚고 있는 등선규를 부축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당파에 들어온 것도 들어온 것이지만 말로만 들었던 용봉회에 직접 참석하게 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등이규는 형을 부축하면서도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기하지?”

“예.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용봉회에 참석하다니.”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래. 앞으로는 더한 곳에도 갈 수 있을 텐데.”

심소혜가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그녀도 용봉회는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어제 참석했다고 등이규 앞에서 거들먹거렸다.

“이 녀석. 너도 용봉회는 처음이잖아.”

“용봉회는 처음이지만 이런 자리는 두 번째지. 사천당가에서도 이거랑 비슷한 자리가 있었으니까.”

반대쪽에서 등선규를 부축하던 심소천의 핀잔에도 심소혜는 당당했다.

그녀가 느끼기로 용봉회나 사천당가 때나 크게 다르지 않아서였다.

“대체 누굴 닮았기에 한 마디도 안 지는지.”

“그야 엄마를 닮았지. 그리고 그건 작은 오빠도 마찬가지야.”

“끄응!”

왠지 모르게 자신이 패배한 것 같은 느낌에 심소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등이규는 물론이고 등선규도 어색하게 웃었다.

둘 다 형제에게는 아직 어려운 사람들이었기에 자연스레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애들 구경하게 가만히 놔둬. 그게 애들 도와주는 거야. 괜히 아는 척 하다가 실수하지 말고.”

“응.”

“옙!”

조용히 한 마디 하는 심대현의 말에 심소천은 심드렁하게, 심소혜는 귀엽게 대답했다.

마치 병사처럼 절도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던 것이다.

그 모습에 심대현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이런 곳에 와도 될까요?”

“안 될 건 뭐야?”

“어···.”

“너희 스승님이 곤륜의 태산권이신데. 별호는 너희도 들어봤지?”

“예. 패선, 대벽검, 태산권. 이 세 별호가 가장 유명하잖아요.”

등이규가 곧바로 대답했다.

곤륜파 하면 떠오르는 별호가 바로 저 세 개였기에 그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 태산권의 제자가 바로 너희들이야. 또한 곤륜의 제자들이고.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구경해. 비무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적지 않을 거야.”

“예!”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귀찮은 기색도 안 내는 심대현의 말에 등이규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등선규 역시 제 나이 또래다운 얼굴로 힐끔 거리며 주변을 구경했다.

“난 진 호법님과 저 쪽에 가 있을 테니 잘들 놀 거라.”

“예!”

“이규랑 선규 잘 챙기고.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이니까.”

“제가 책임지고 신경 쓰겠습니다.”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도일수의 모습에 벽우진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일수라면 안 믿을 수가 없었다.

“애들 잘 부탁한다.”

하지만 진구는 제자들이 계속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지 평소답지 않게 도일수의 손을 잡았다.

다시 한 번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예. 걱정 마십시오.”

“그래.”

“별 일 없을 겁니다. 우리가 계속 주시하고 있을 거고요.”

“알겠습니다.”

도일수에게 한 차례 눈짓한 벽우진이 진구를 데리고서 어제 앉았던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선객이 있었다.

제갈현과 남궁진, 거기에 법무와 목진자, 개왕도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왔냐? 오늘은 좀 늦었는데?”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당민호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제와 달리 개왕과 함께 말이다.

“인원이 왜 점점 늘어나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사람이 오고 가는 거야 자기들 마음이니까.”

“참나.”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을 띠는 벽우진과 달리 당민호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실실 웃었다.

그러다가 벽우진의 뒤에 서 있는 진구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판났군.”

“흐흐흐! 제가 또 과거에 역마살이 있던 녀석 아닙니까. 이렇게 마실을 나오니 너무 좋습니다. 애기들의 파릇파릇한 열정도 짜릿하고요.”

“그것보다는 술판이 벌어져서 좋은 것 같은데.”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거나하게 취했는지 코사 살짝 벌게진 당민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으로 보아 밤새 술을 퍼 마신 게 분명했다.

“쯧쯧. 그 나이에 그러다가 훅 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에이. 그렇게까지는 안 마시죠. 나름 조절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리로 가시죠.”

넉살 좋게 대꾸하는 당민호를 일별한 벽우진이 다른 원탁으로 갔다.

같은 원탁에 앉으면 귀찮게 굴 게 뻔하니 아예 다른 자리로 간 것이다.

그런데 벽우진이 비어 있는 원탁에 앉기 무섭게 법무와 목진자, 제갈현과 남궁진이 자연스럽게 넘어왔다.

“뭐야?”

“저는 술보다는 차를 좋아해서 말이지요.”

“흠흠!”

제갈현과 남궁진이 겸연쩍은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저 아이들이 진 대협의 제자들인가 봅니다.”

“그렇소이다.”

조용히 벽우진의 옆에 앉는 진구를 향해 법무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진구의 시선은 두 제자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사제의 연을 맺어서 그런지 진구는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어린아이를 강가에 내놓은 것처럼 온갖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제자사랑이 대단하시네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진구의 모습에 법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벽우진에게 말했다.

그러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첫 제자니까 어쩔 수 없지. 근데 이곳에는 웬일이야?”

“장문인이 여기 계실 것 같아서요.”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허허, 숙소에 혼자 있기도 좀 그래서 말이지요. 진 대협께서 드디어 제자를 받으셨다고 해서 궁금하기도 했고요.”

법무의 시선이 등선규와 등이규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민호를 제외한 모두가 두 형제를 은연중에 주시했던 것이다.

“보니까 어때?”

“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근골은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만.”

“최상의 자질은 아니지?”

“허허허.”

법무가 멋쩍게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림사의 무승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진 호법님의 무맥을 잇기에 적합 하느냐, 적합하지 않느냐이지.”

“그렇지요. 아미타불.”

법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건 진구의 무공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였다.

“지금은 볼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글쎄. 내년이 되면 어떻게 될까나. 잊은 모양인데 내 제자들은 아직 2년도 채 안 되었어.”

“으음!”

법무를 비롯해서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간과하고 있던 것을 모두 깨달은 것이었다.

게다가 곤륜파는 단기간에 제자들을 성장시킬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비법을 전수 받을 수 있다면 꼭 전수 받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고 있지?”

“하하하.”

제갈현이 넉살 좋게 웃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다들 여기에 모여 계셨군요.”

“응? 자네가 여기는 웬일이야?”

“하하. 제가 무당의 장문인입니다.”

등선규와 등이규를 신경 쓰면서 나름 후기지수들과 잘 어울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님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야 하는 혜량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건 알지. 근데 바쁘지 않아?”

“다행히 무당에는 저만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요. 게다가 중요한 분들은 어제 다 만나기도 했고요.”

“뭐, 올 사람은 다 오긴 했지.”

“그리고 저도 궁금해서 말이지요.”

“이상하게 본 파에 관심이 많네.”

혜량의 시선이 여전히 적응을 하지 못한 듯 어정쩡하게 서 있는 등선규와 등이규에게 향하자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왜들 이렇게 곤륜파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무당산을 찾은 모든 이들이 장문인과 진 호법,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 참. 사람 부담스럽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관심을 가져주는 건 좋지만 살짝 과한 것 같아서였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장문인께서 이번 용봉회에 참석하신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참석하겠다는 인원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요.”

“쯧쯧. 내 얼굴 봐서 뭐하려고.”

“혹시 모르니까요. 내 자식이, 혹은 우리 혈족 중에 장문인과 연이 닿는 아이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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