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10화 (210/325)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1 >

당민호가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두 번째 보는 사이라지만 저렇게 대뜸 구룡에게 다가가 대련신청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군소방파나 작은 가문의 자제들은 감히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말도 못 해볼 건 또 뭐야?”

“보통은 저래.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발만 동동 구른다고.”

“그래서 바뀌는 게 없는 거야. 까이더라도 일단은 시도해 봐야지. 안 될 거라고, 거절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하면 진짜 그렇게 되는 거야.”

“말을 해도 참.”

“내가 뭐?”

벽우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정말 원한다면, 자기에게 필요하다면 일단 시도라도 해봐야했다.

물론 상대방이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었다.

되던가, 안 되던가.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어떻게 네 밑에서 저런 아이들이 나타났는지.”

“내 안목이 특별한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당민호와 달리 벽우진은 히죽 웃으며 콧대를 세웠다.

지금까지의 제자들 다 그가 직접 뽑은 아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자부심도 남달랐다.

“일수를 제외하면 아직은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겠지.”

“맞습니다.”

남궁진이 맞장구쳤다.

곤륜파 제자들이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아직 구룡에 비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예지야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수로 인해 승리를 따낼 수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구양검과 서예지의 비무로 인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방심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언제 또 구룡 수준의 애들과 비무를 해보겠어? 고수와의 비무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비슷한 상대에서 얻는 것 또한 꽤 많은 법이지.”

“구경하는 쪽에서는 후자가 훨씬 재미있지.”

“누가 봐도 네가 제일 신나 보여.”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흥겨워 보이는 이가 바로 당민호였다.

유일하게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언제 또 이런 걸 볼 수 있겠어? 어쩌면 내 인생에서 이번이 마지막 용봉회일 수도 있는데.”

“네 집안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한다.”

“매정한 자식.”

“네가 근시일 내에 안 죽을 걸 알아서 그러는 거다.”

처연하게 말을 이었던 당민호가 발끈했다.

자신의 연기를 꿰뚫어보자 흥분한 것이다.

“말을 해도 꼭.”

“오, 저 대결도 재미있겠는데. 사천당가의 소가주와 소림사의 차대 방장의 대결이라.”

“어?”

시시덕거리며 구경하던 당민호가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자가 차대 소림사 방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각우에게 도전할 줄은 몰라서였다.

“근데 좀 불리하지 않나? 독공은 펼치지 못할 텐데. 암기도 독을 바르지 암기만 사용이 가능하고.”

“생사결이 아니니까 조금은 불리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불리한 것은 아냐.”

“조금 무리한 도전 같은데.”

“끄응!”

당민호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각우에 비해 당주혁이 살짝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독을 사용할 수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과 같은 대련에서 위험한 독은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마비독조차도 사용금지였다.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배우는 것 역시 많지 않겠습니까. 싸움이라는 게 늘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패배에서도 배우는 게 있지요.”

제갈현과 남궁진의 말에 당민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에 입만 불퉁하게 내밀자 벽우진이 키득거렸다.

“이 좋은 날 왜 그래? 그리고 무인이 늘 이길 수만 있나.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후벼 파지 않아도 돼.”

“혹시 알아?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결과가 뒤집힐지?”

콰콰콰쾅!

벽우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당주혁이 속절없이 튕겨져 날아갔다.

소림권룡(少林拳龍)이라 불리는 각우의 강권에 무모하게 정면대결을 펼쳤던 당주혁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주혁은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각우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충돌로 정면대결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영리하게 다른 방식으로 비무를 이어가는 모습에 당민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네요.”

“진즉에 이랬어야지.”

“저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요, 장문인.”

“궁금한 거?”

제갈미미가 눈을 빛내며 슬쩍 다가왔다.

비어 있는 벽우진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던 것이다.

“예. 제자 분들과 어떻게 만났는지가 궁금해요.”

“진짜 궁금한 건 1년 만에 어떻게 저렇게 키워냈느냐겠지?”

“그것도 궁금하고요.”

의미심장한 벽우진의 말에도 제갈미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벽우진을 마주봤다.

이 상황에서 굳이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네가 예상하는 게 맞아.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당민호가 맞장구를 쳤다.

면전에서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대단하세요.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과가 좋으면 된 거 아닌가?”

벽우진의 시선이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좀 전에 대결을 펼쳤던 양일우처럼 다들 구룡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밀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승리를 넘겨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며 어떻게든 기회를 노리는 그 처절한 모습에 벽우진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 사부에 그 제자라니까.”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안 부러워. 독기로는 우리 가문 역시 어디 가도 뒤지지 않아.”

“후후후.”

벽우진이 당민호와 티격태격 하고 있을 때 제갈미미는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서 시작된 비무에 다들 눈에 휘둥그레져서 구경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비무에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애초의 목적이 비무나 대련이 아니었던 이들이었다.

‘슬슬 시작되려나.’

특히 남자보다는 여인들의 눈치싸움이 살벌했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구룡이나 사천당가, 그리고 곤륜파의 제자들에게 향해 있었다.

향후 무림을 주름 잡을 가능성이 큰 후기지수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도가 높아진 것이었다.

‘이쪽으로도 서서히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고 말이지.’

구룡과 사천당가의 직계들, 그리고 곤륜파의 제자들이 유망하다면 벽우진은 그야말로 현재 중원무림의 정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를 가만히 놔둘 리는 만무했다.

“피도 튀기고, 불꽃도 튀기는구만.”

“어때? 날 따라오길 잘했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널 따라온 게 아니라 난 끌려온 거지.”

“흐흐! 그게 그거지.”

허무한 대결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박진감이 넘쳤다.

다들 승부욕과 호승심을 불태웠기에 구경하는 맛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승패가 나올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갈렸다.

용봉회의 첫 날을 무사히 마치며 벽우진이 처소 뒤의 아담한 연무장으로 제자들을 불렀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아이들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누구 하나 고개를 들어 벽우진을 쳐다보지 않았던 것이다.

“왜들 그래? 죄라도 지었어?”

“그게···.”

“저희가 사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같아서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제자들이 우물쭈물 거리며 어렵게 대답했다.

서예지와 달리 다른 제자들은 구룡과의 비무에서 전패했기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푸하하하!”

그런데 그 모습에 벽우진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뒤늦게 아이들이 왜 이런 반응인지 알게 된 것이었다.

“사부님?”

“고개 들어. 너희들이 잘못한 거 없으니까. 명예가 왜 실추 돼? 비무에서 졌다고? 그 정도에 실추될 정도로 본 파는 낮지 않다. 그리고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져도 괜찮아. 너희들이 입문한 시간을 생각해 봐.”

벽우진이 부드럽게 제자들을 달랬다.

고작 비무에서 패배한 것 가지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오히려 단순히 성장세를 생각하면 구룡도 감히 비교가 안 되었다.

“그래도 저희는 비천단까지 먹었는데···.”

“비천단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냐. 먼저 달리기 시작했던 이들과 벌어진 간격을 좁혀주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면 편해.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입문한 시기도 생각해야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단 한 명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예지가 특별한 거야. 변수도 잘 이용했고. 그러니 너무 풀 죽지들 말아. 난 정말 뿌듯했으니까.”

“정말요?”

언니오빠들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심소혜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환히 웃으며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이지. 민호도, 남궁가주도, 제갈가주도 너희들을 보고 얼마나 놀랐다고. 다른 이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고.”

“헤에.”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너희들은 이미 충분히 잘 해주고 있으니까. 또 이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벽우진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지막 말이 그들의 가슴에 콕콕 박혔던 것이다.

아직 용봉회는 끝나지 않았고, 이번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자책은 해도 좋아. 좌절감에 빠지는 것도 피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게 뭘까?”

제자들의 달라진 눈빛과 표정을 보며 벽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복기 아닐까요?”

“거의 다 왔어. 하지만 정답은 아니지. 좀 더 명확하게.”

도일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결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 상태를 확인하고 복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벽우진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했던 실수나 혹은 잘못된 선택 같은 거 아닐까요?”

“오, 거의 근접했어. 그걸 좀 더 간략하고 명확하게.”

“으음!”

벽우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제자들의 표정은 더욱더 진지해졌다.

“저요, 저!”

“오, 그래. 우리 소혜.”

언니오빠들이 고뇌에 빠져 있을 때 심소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거일까, 저거일까 고민하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심소혜는 무언가가 번뜩이자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며 소리쳤다.

“자신의 약점을 아는 거 아닐까요?”

“정답.”

“꺄아!”

“우리 소혜 진짜 똑똑한데?”

벽우진이 웃으며 다시 한 번 심소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심대혜가 예쁘게 정리해준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심소혜가 슬그머니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해맑게 웃었다.

쓰다듬기 편하도록 각도를 조정한 것이다.

“헤헤헤!”

“모두 다 들었지?”

“예.”

“오늘 비무에서 다들 느꼈을 거야.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점 때문에 상대방에 밀렸는지 말이야.”

헤실 거리는 심소혜와 달리 다른 제자들의 눈에서는 기광이 번뜩였다.

이어지는 말에 다들 낮에 있었던 비무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먼저 일우.”

“예.”

“왜 진 거 같아?”

“기본기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일단 기술적으로 저보다 남궁 공자가 훨씬 위에 있었습니다.”

< 제 66장. 천정부지(天井不知).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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