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4 >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이도 아닌 구룡의 일인인 구양검을 진짜로 이길 줄은 몰랐기에 다들 놀라면서도 축하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은밀히 질투와 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서예지를 쏘아봤다.
“잘했어, 예지야.”
“운이 좋았어요. 방심하지 않았다면 이기기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운도 실력이지. 그리고 방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겼을 거 같은데?”
서예지는 말없이 당소윤을 쳐다보며 웃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두 여인과 달리 구룡과 오화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구양검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와서였다.
“이보게.”
“···하하하.”
“괜찮나?”
단리경이 조심스럽게 구양검에게 다가갔다.
가장 친한 친구답게 누구보다 먼저 구양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믿기지가 않는군.”
“나도 그래. 아무리 신성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질 줄은···.”
“하지만 승부는 승부이고, 약속은 약속이지.”
구양검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하지만 진 건 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따질 것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서예지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그렇긴 하지.”
“근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오히려 더 좋아.”
“뭐?”
당소윤과 대화하는 서예지를 쳐다보며 구양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단리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엄청 상했는데, 생각을 조금 달리하니까 다른 게 보이더라고.”
“다른 거?”
“내 반려자로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겠다는. 내 재능과 서 소저의 재능이 합쳐지면 얼마나 뛰어난 자식이 태어나겠어?”
“참나.”
단리경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고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해서였다.
만약 그였다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 방방 날뛰었을 터였다.
다시 한 번 붙자면서 말이다.
“무인에게 있어 승패는 병가지상사지 않나. 생사결도 아니고 내 아녀자가 될 사람에게 졌는데 뭐 어떤가.”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네.”
“후후후.”
구양검이 조용히 웃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예지에게 향해 있었다.
정작 그녀는 그에게 일절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말이다.
“천하의 구양검이 이렇게 여인에게 홀딱 빠질 줄이야.”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쉽지 않아 보이는데. 완전 철벽이라.”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나의 진심을.”
구양검이 십대 소년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풋풋한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예지를 응시했다.
“뭐, 잘해 봐라. 난 뒤에서 응원해주마.”
“그거면 충분해. 겸사겸사 경쟁자들 좀 막아주고.”
언제 꿀 떨어지는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구양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비무가 끝나기 무섭게 남자들의 눈빛들이 묘하게 변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원래 아름다운 꽃에는 벌들이 많이 모이는 법이야. 그러니 꽃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지.”
“그래서 안 도와주겠다고?”
“도와주겠다고. 대신 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거다.”
“좋아.”
구양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빚 정도는 얼마든지 짊어질 수 있었다.
“잊지 말라고.”
“당연하지.”
서서히 서예지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군소방파의 자제들을 노려보며 구양검도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서예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한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당민호는 얼굴 가득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의외의 결과에 놀라기도 했고.
“진짜 예지가 이길 줄이야.”
“방심한 게 컸지. 나름 집중하기는 했지만 우리 예지를 만만하게 봤으니까.”
“맞아. 그게 컸어. 예지 실력이 결코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근데 일이 더 꼬이는 것 같은데?”
당민호가 눈짓으로 서예지에게 접근하는 청년들을 가리켰다.
실력으로 구양검을 쓰러뜨리자 오히려 더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하는 것 같았다.
“알아서 잘 할 거다. 마음에 드는 아이를 만날 수도 있고.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오호. 사뭇 개방적인데?”
“애도 아닌데. 언제까지 품안에만 둘 수도 없는 거고.”
“앞으로는 육화가 될 것 같아요.”
제갈미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서예지의 근처에는 표향림과 모용선, 심혜가 있음에도 정작 남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는 여인은 서예지였다.
더구나 비무로 구양검을 패배시킨 만큼 더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일 터였다.
곤륜파와 패선이라는 배경에 실력 역시 겸비했으니까.
‘용봉회는 만남의 장이기도 하지만 신분상승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거의 모든 후기지수가 모이는 용봉회이니 만큼 친목도모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교제가 활발히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노리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고.
심지어 개중에는 저돌적으로 육탄공세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곧 장문인께도 시작되겠지.’
제갈미미가 슬쩍 벽우진을 쳐다봤다.
빼어난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외모도 아니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개성적인 외모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무위와 명성이었다.
‘겉모습은 이십대와 다름이 없으니까.’
이미 발 빠르게 벽우진의 용모파기가 퍼지는 중이었다.
패선이라는 별호와 함께 많은 이들이 벽우진을 궁금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다른 것을 노리고 접근할 터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팔십 넘은 노인에게도 딸을 시집보내는 곳은 부지기수였다.
-미아(美兒)야.
자신의 표정을 본 것인지 부친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릴 적 부르던 아명으로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확정한 것도 아니고요.
-나는 강요할 생각 없다. 언제나 네 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고마워요, 아빠.
제갈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어릴 때는 자주 들었지만 요즘에는 듣기 힘든 아빠라는 말에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이왕이면 칠화(七花)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당민호가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좌중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잉!”
그 모습에 당민호가 인상을 팍 쓰면서 술잔을 잡아챘다.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보려는 것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불이 붙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이들이 모이니, 그것도 눈이 부신 대결을 보니 당연히 피가 끓지 않겠습니까.”
남궁진이 눈을 빛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양일우가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가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제갈현 역시 그 모습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는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둘 다 얻는 게 많겠지. 물론 남궁혁이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남궁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양일우의 모습에 벽우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남궁혁에게 가는지 그는 훤히 보여서였다.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곤륜파의 대제자이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도일수를 더 원했겠지만요.”
남궁진 역시 아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도일수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는지, 하루라는 시간을 얼마나 알뜰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사용하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대막에서도 곤륜파의 제자들은 단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
전투를 치른 후에도 말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게 도일수였지.’
괜히 그의 아들이 자극을 받는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양일우가 도일수보다 위에 있지만 먼 훗날에는 달라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앞서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 언젠가는 똑같은 벽을 마주하게 되지. 그때부터는 재능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벽을 결국 부수느냐, 정체되느냐는 결국 마음가짐에 따라 결정되어지니까.’
사람은 강하면서도 연약한 존재였다.
그 누구보다 강인했던 사람이 별 거 아닌 이유로 무너지는 경우는 비일비재였다.
반대로 처음에는 나약했던 이가 그 어떤 사람보다 강건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이제 첫 날인데. 보통은 이레 정도 한다며?”
“일반적으로는. 근데 도중에 가는 곳도 많아서 이레를 다 채우는 경우는 드물지.”
“시작하네.”
당민호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린 벽우진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서였다.
객관적인 무위는 남궁혁이 좀 더 높았지만 비무라는 게 꼭 실력으로만 고하가 나뉘지는 않았다.
변수에 따라 승패는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었고, 그 예가 방금 전 서예지와 구양검의 대결이었기에 벽우진은 살짝 기대했다.
“오호? 기대하나본데? 천하의 군자검룡을 상대하는데 말이지.”
“못할 건 또 뭐야?”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냐? 예지도 이긴 마당에. 내가 보기에는 주변의 운까지 다 끌어다 쓴 것 같은데.”
“뚜껑은 까봐야 아는 법이야.”
“흐흐흐!”
당민호가 음충맞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벽우진과 남궁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일 수도 있어서였다.
남궁혁은 남궁진에게서, 양일우는 벽우진에게 사사했으니까.
“맞습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물론 아들의 승리를 바라겠지?”
“저 역시 한 아이의 아비이니까요.”
남궁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 역시 사람인지라 아들의 승리를 바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벽우진이 양일우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공은 일우로군.”
“선배로서 당연한 일이지. 생사결이 아닌, 단순히 서로의 무를 겨루는 대결이니까. 뭐, 구양검이 저랬다가 훅 갔지만.”
당민호가 묘하게 웃으며 남궁진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는 당민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의 비무를 주시했다.
“방심은 없는 것 같군.”
벽우진 역시 남궁진과 같은 얼굴이었다.
그 역시 두 사람의 대결에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카카카캉!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부딪쳤다.
서로가 상대방의 검을 완벽하게 받아친 것이었다.
하지만 여유가 있는 남궁혁과 달리 양일우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역시 군자검룡이라는 건가.’
남들에게는 백중세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양일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미세하게 밀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어차피 나는 도전자의 입장.’
벽우진에게서 배운 태청검을 펼치며 양일우가 마음을 다잡았다.
이기면 너무나 좋겠지만 패배해도 괜찮았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였고, 이미 패배에는 익숙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승리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다만 어처구니없이 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서예지처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고.
우우웅!
그런 마음가짐이 담긴 것인지 미약한 검명이 토해지며 허공에 태청검의 검로가 아로새겨졌다.
빠르면서도 강력한 검격이 남궁혁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쩌엉!
하지만 그 강맹한 일격을 남궁혁은 유연하게 받아냈다.
조금의 힘든 기색도 없이 양일우가 뿌리는 검격을 부드럽게 받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흡!”
마치 허공을 유영하듯이 매끄럽고 순식간에 파고드는 일검에 양일우가 다급성을 토해냈다.
그 정도로 남궁혁의 검초는 위협적이었다.
<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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