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3 >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만약에 지면 서 소저가 약속을 지킬까요?”
“당연히. 이 많은 사람들이 들었는데. 그리고 예지 성격 상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
“장문인은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제갈미미의 말에 남궁희선 역시 눈을 빛냈다.
오화에 속해 있기에 구룡과는 자주 만났고, 그렇기에 구양검의 실력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예지 역시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구양검보다는 아래라고 생각했다.
명문세가의 저력은 결코 경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였다.
“나야 당연히 내 제자를 응원할 수밖에 없지.”
“나도 예지한테 한 표. 생각 없이 저런 제안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내기도 아닌데 한 표는 무슨.”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는 했지만 벽우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래도 제자를 응원해주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흥미진진한 대결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구경하는 재미는 있지. 누구는 가슴을 졸이겠지만 말이야. 흐흐흐!”
“내가 왜 가슴을 졸여?”
“일단 지켜보자고. 슬슬 시작하려는 것 같으니까.”
말을 아끼는 제갈현과 달리 당민호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인파가 상당했지만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단상 위에 마련되어 있기에 지켜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서예지는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서 구양검을 주시했다.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구양검이 풍기는 기도는 군계일학이었다.
구룡 중에서도 두세 명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외모 역시 여자들이 호감을 가질 정도로 매끈했다.
‘하지만 그뿐이지.’
누가 봐도 잘생기고 배경도 좋은 구양검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서예지의 취향은 아니었다.
또한 아직은 남자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곤륜파를 재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그녀였기에 구양검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은 부담스럽기보다는 불편했다.
‘어차피 남자는 다 똑같기도 하고.’
점잖은 떠는 남자도 결국에는 다 똑같았다.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물론 아버지처럼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가 보기에 구양검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미모와 곤륜파라는 배경 때문에 집착을 보이는 것에 불과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한동안은 질척거리지 않겠지.’
뛰어난 무공만큼이나 자기애와 자존심이 강하다고 알려진 구양검이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패배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접근하지 않을 거라고 서예지는 생각했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예.”
“저도 다 되었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예.”
정중한 구양검의 말에도 서예지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누가 봐도 차갑게 구양검을 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양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기기만 하면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단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 초식을 양보하는 게 예의겠지만, 그러기에는 서 소저의 실력이 너무 출중하기에 선수만 양보하겠습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뽑아들며 말하던 구양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예지의 검이 파고들어서였다.
‘과연!’
서예지의 무공실력에 대해서는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암암리에 그녀의 검공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게 알려졌던 것이다.
게다가 정식으로 입문한 시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성장세를 보여주었기에 구양검은 당황하기는 해도 반응이 늦지는 않았다.
터엉!
서예지와 달리 그는 다섯 살 때부터 목검을 잡고 아홉 살 때 진검을 잡은 몸이었다.
더구나 구환비룡(九幻飛龍)이라 불릴 정도로 속검(速劍)에 능한 검객이 그였다.
그런 만큼 기습처럼 파고드는 서예지의 검격에도 구양검은 여유롭게 받아냈다.
빠르긴 해도 육안으로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일검이었다.
‘나도 시작해볼까.’
구양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단순한 비무라면 얼마든지 어울려 줄 수 있었다.
또한 패배한다고 한들 크게 개의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대결에는 단 둘만의 만남이 걸려 있었기에 그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서 소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대막행에서도 상당한 활약을 했다는 사실을 구양검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독나찰(毒羅刹)라 불리며 가파르게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당소윤과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구룡이라는 이름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수많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격이 다른 아홉 명에게만 허락된 이름이었다.
‘이번 대결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수없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친 끝에서야 얻게 되는 칭호가 바로 구룡이라는 칭호였다.
그런 만큼 구양검은 아무리 서예지가 발군의 성장세를 보여준다고 해도 자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파파파팟!
이윽고 자신감이 가득한 기색으로 구양검이 검을 뿌렸다.
가문의 최고 절학이자 구양세가를 대표하는 검공인 구류천벽검(九流天霹劍)을 펼쳤던 것이다.
아홉 줄기의 검기가 섬전처럼 서예지의 팔방으로 노리고서 쇄도했다.
“흡!”
창졸간에 펼쳐진 아홉 줄기의 날카로운 검기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승부가 결판났다고 생각했다.
단 일검이었지만 구양검이 어중간한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게다가 동시에 파고드는 아홉 개의 검기는 개수도 개수지만 빠르기 역시 눈부신 수준이었기에 대부분은 비무가 여기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타앗!
그런데 그들의 생각을 비웃든 서예지가 땅을 박찼다.
곤륜파가 자랑하는 운룡대팔식으로 허공에서 유려하게 회피했던 것이다.
“아아!”
“저게 운룡대팔식이구나!”
절세미녀라 할 수 있는 서예지의 운룡대팔식에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선보이는 운룡대팔식도 운룡대팔식이었지만 움직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였다.
“음!”
하지만 단 한 사람, 구양검만은 얼굴을 굳혔다.
나름 신경 써서 펼친 검초이기에 이번 공격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예지가 너무나 완벽하게 회피해내자 구양검이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쌔애액!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허공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튼 서예지의 검격이 그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신요혈을 노리는 공격에 구양검 역시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렸다.
따다다당!
변화무쌍한 구양검의 검격과 달리 서예지의 초식은 단순했다.
화려함보다는 진중한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지는 않았다.
간결하지만 그만큼 강맹한 기운이 서려 있었기에 구양검은 부딪칠 때마다 연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힘에서, 안 밀려?’
구양세가의 소가주로서 어려서부터 벌모세수와 온갖 영약들을 먹으며 자라온 그였다.
그렇기에 또래와는 격이 다른 공력을 쌓을 수 있었다.
한데 서예지는 그런 그와 정면으로 부딪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까앙!
“흡!”
오히려 구양검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딱딱해져갔다.
내공의 수준도 수준이지만 정순함이 자기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구양검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사실 그는 검술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서예지와 달리 그는 벌써 십수 년 넘게 검을 수련해왔다.
시간 자체가 비교가 안 되는 만큼 당연히 자신이 이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르르릉!
그런데 예상과 달리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접전이 이어지자 구양검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본격적으로 공력을 사용해서라도 서예지를 찍어 누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듯 구양검의 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구양검이 제대로 구류천벽검을 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가 왔어.’
서예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달라진 기세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구양검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말해주었기에 서예지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린 때였기에 서예지는 속으로 웃으며 검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그녀의 검에서 옥빛의 빛이 터져 나왔다.
옥심귀일공(玉心歸一功)의 공력을 가득 머금은 검에서 검강이 솟구친 것이었다.
그 광경에 멀찍이 떨어져서 관전하던 후기지수들이 화들짝 놀랐다.
서예지가 절정고수라는 걸 대부분이 알고는 있지만 저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칠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다들 깜짝 놀란 것이었다.
쩌저저적!
“큭!”
하지만 가장 놀란 이는 누가 뭐래도 구양검이었다.
이렇게 대뜸 검강부터 날려댈 줄은 몰랐기에 구양검의 반응은 살짝 늦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가 익힌 검은 환검 계열이었다.
변화무쌍하지만 그만큼 검영(劍影) 하나하나가 지닌 힘은 약했기에 강맹하다 못해 패도적인 일검에 구양검이 뿌린 검기들은 썩은 짚단처럼 허무하게 박살났다.
‘지금!’
그와 동시에 서예지가 눈을 빛냈다.
구양검이 나름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저변에는 아직도 자신에 대한 방심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생사결이었다면 구양검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쉽게 결판을 내기 힘들었겠지.’
서예지는 구양검이 방심을 하면서도 조급해할 때를 기다렸다.
그때야말로 승부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방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서예지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벽우진을 따라 다니면서 그녀가 얻은 경험은 결코 녹록치 않았으므로.
시간으로 따지면 구양검과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였다.
“하압!”
수십 줄기의 검기들을 박살내며 우직하게 쇄도하는 서예지의 검격에 구양검도 다급하게 검강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미 기세는 서예지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서예지를 압박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구양검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려버렸다.
꽈앙! 꽝!
묵직하면서도 강맹한 일검에 구양검이 연신 뒤로 밀렸다.
놀랍게도 힘에서 그가 밀리는 것이었다.
물론 육체적인 능력은 구양검이 서예지보다 앞섰지만 중요한 것은 공력과 기세였다.
“크윽!”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구양검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활로를 만들어보고자 그는 구류천벽검을 극성으로 펼쳤다.
하지만 서예지는 그런 구양검의 생각을 꿰뚫어보며 검로를 방해했다.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치지 못하게, 방어만 급급한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파바바밧!
거기에 서예지는 그간의 경험을 보여주듯이 왼손도 너무나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장풍과 지풍을 현란하게 사용하며 구양검을 더욱더 몰아붙였던 것이다.
‘이번에 끝내야 해. 확실하게.’
연신 뒷걸음질치는 구양검의 모습을 전부 두 눈에 담고서 서예지가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다가는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것이었다.
꽈아앙!
옥빛의 검강을 머금은 서예지의 검이 저돌적으로 구양검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구양검의 목을 겨누었다.
“허!”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목젖 앞에 닿아 있는 검극에 구양검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약속은 지킬 거라고 생각해요.”
“······.”
서예지가 검을 회수했다.
하지만 구양검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어중간하게 검을 들고만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짝짝짝짝!
<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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