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06화 (206/325)

<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2 >

일순 주위의 시선이 구양검에게로 쏠렸다.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모두가 그와 서예지를 쳐다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구양검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앞에 선 서예지만 바라봤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싫다고요.”

“식사 정도는, 아니 차 한 잔 같이 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기대감을 주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뜻을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만나보면 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구양검이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곤륜파가 대막으로 향할 때 그도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친이자 구양세가주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서예지와의 혼사에는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장남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막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달라질 것 없어요.”

“···혹시 연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왜···!”

구양검의 얼굴이 붉어졌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근데 좋아하는 이가 없으면서도 자신을 거절하자 구양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제 취향이 아니에요.”

“그럼 어떤 취향이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구양검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그 취향에 맞추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지금껏 구양검이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여주자 다들 놀란 것이었다.

“상당히 무례한 질문인 거, 알고 계시죠?”

“처음에는 사실 호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저는 제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맞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노력 여하에 따라서요.”

서예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이런 상황을 우려했는데 역시나 이렇게 되고 말았다.

“주위를 잘 둘러보시면 좋은 분이 분명히 계실 거예요.”

“아니요. 저에게는 서 소저뿐입니다.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서 소저를 만날 수 있는지. 만약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곤륜산으로 갈 것입니다.”

저돌적인 구양검의 말에 몇몇 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남자다운 모습에 어느새 응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몇몇 여인들은 서예지를 응원했다.

서예지가 거절을 해야만 자기들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아.”

서예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감한 상황에 한숨만 나왔던 것이다.

스윽.

그 모습에 양일우가 슬그머니 서예지에게로 다가갔다.

계속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서예지의 입이 열렸다.

“좋아요.”

“그럼···!”

“저를 이기면 식사를 한 번 같이 하죠.”

첫 마디에 기뻐하던 구양검이 이어지는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서예지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로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제안이어서였다.

“정말입니까?”

“예. 여인이지만 말의 무거움에 대해 모르지 않아요.”

짧은 순간 서예지는 고민했다.

단순히 말로는 구양검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구양검의 자존심을 건드리기로 했다.

‘겸사겸사 경험도 쌓고 말이지.’

사천당가에서도 구룡오화를 만나기는 했지만 잔칫날이기에 피를 볼 수 없어 다들 가급적 비무를 피했었다.

물론 도일수가 언기준을 후려 패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피를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용봉회가 열리는 동안은 자유롭게 비무나 대련을 할 수 있다고 했기에 서예지는 구양검도 떨쳐내고 경험도 쌓을 겸 비무를 선택했다.

“좋습니다.”

“바로 하죠.”

“예.”

구양검의 대답에 절친한 친구가 할 수 있는 단리경이 주위를 물렸다.

두 사람이 편하게 비무를 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데?”

“재미는 무슨.”

“원래 싸움은 하수들 싸움이 제일 재미있잖아. 긴박감 넘치고. 아, 너는 네 제자라서 좀 다를라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당민호의 수준이라면 서예지와 구양검의 대화를 코앞에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민호는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히죽 웃었다.

“다를 게 뭐 있어. 이미 결과를 아는데.”

“예지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만하게 봐서는 곤란해. 괜히 후기지수들 중에서 구룡에 뽑힌 게 아냐. 얼굴이랑 가문의 힘만으로는 구룡에 뽑힐 수 없다고.”

“그래 봤자 도토리 키 재기지.”

“장담은 일러. 일단 장소도 낯설고, 변수가 많으니까.”

당민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지만 벽우진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서예지를 믿는 것이었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패배에서도 배우는 게 있으니까. 그런데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예지가 무섭게 성장하기는 했지. 남자에게는 일절 관심도 주지 않고 무공만 팠으니.”

“소윤이도 많이 발전했어.”

“저기 예지 덕분에 말이지. 근데 왜 우리 소윤이한테는 아무도 관심을 안 보이는 거야?”

도일수와 나란히 서 있는 당소윤을 주시하며 당민호가 툴툴거렸다.

같이 있는 심대혜에게도 심심찮게 남자들이 다가가는데 당소윤에게는 한 명도 접근하지 않아서였다.

“성격을 아니까 그렇겠지.”

“뭐라고?!”

당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발언이어서였다.

하지만 당민호의 고성에도 벽우진은 느긋하게 귀를 팠다.

“다가가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아직 소윤이의 매력을 몰라서 그러는 게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이익!”

전세가 역전되었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당민호와 달리 벽우진은 날리는 족족 유효타를 먹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당민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분께서는 오늘도 여전하시군요.”

“응?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두 사람의 귀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바로 제갈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왠지 두 분께서 이곳에 계실 것 같아서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갈미미라고 해요.”

“제 딸입니다.”

큰 눈이 인상적인 여인이 공손하게 인사해왔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벽우진과 당민호를 번갈아 쳐다보며 허리를 숙였던 것이다.

“딸은 왜 데리고 왔어?”

“두 분을 만나보고 싶어 해서요. 특히 장문인을요.”

퉁명스러운 당민호에게 대답하며 제갈현이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장문인.”

“영광까지야.”

“역시 여기 계셨군요.”

“응?”

제갈미미가 막 벽우진을 향해 입을 열려는 찰나 또 다른 이가 다가왔다.

제갈현에 이어 남궁진도 칠성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니 남궁가주님께서 어쩐 일로?”

“자소궁에 있어 봤자 지루한 얘기만 들을 것 같아서. 차라리 아이들이 구경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남궁진이 평소의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묘하게 장난기가 서린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제갈현은 그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남궁진의 곁에는 그의 딸인 남궁희선이 있어서였다.

혜화(慧花)라 불리는 제갈미미와 마찬가지로 남궁희선 역시 오화에 속해 있었다.

‘설마?’

제갈현의 눈동자가 미비하게 흔들렸다.

한 가지 가정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게다가 대막에 갔을 때도 남궁진은 아들, 딸을 대동했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장문인.”

“아아.”

“잘 지내셨어요?”

초면인 제갈미미와는 달리 남궁희선은 대막까지 동행했었기에 좀 더 친근했다.

그 점을 앞세우며 남궁희선이 대번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야 뭐 늘 똑같지.”

“한량처럼 건들건들 지냈겠지.”

“무슨 소리.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청민이랑 청범이 날 가만두지 않는다고. 내가 농땡이 피우는 걸 원천봉쇄하려고 악착같이 매달린다고.”

당민호를 보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은 그러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원래 그게 정상이야. 수장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두 사람. 너무하는 거 아냐?”

“크흠!”

“허허허.”

당민호의 시선이 남궁진과 제갈현에게로 향했다.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던 것이다.

마치 자신은 둘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 적나라한 눈빛에 남궁진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고, 제갈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쭈?”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딸에게 너무 한 거 아냐?”

당민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했지만 그가 알기로 제갈미미의 나이는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이가 중요한가요. 함께 살아갈 시간이 중요하지요.”

“그건 그렇지만.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데.”

혀를 차는 당민호와 달리 제갈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소림무제나 무당권제, 제왕검이라면 당연히 반대하겠지만 벽우진은 달랐다.

경쟁가문도 아닐뿐더러 외견 상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먼저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도 했고요.”

“헐.”

이어지는 제갈미미의 대답에 당민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돌함의 수준을 넘어 기가 막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좀 당혹스러워서. 무림이 언제부터 이랬나 싶기도 하고.”

“뭔 소리야?”

시선을 서예지에게 둔 채로 벽우진이 반문했다.

그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넌 이해하기 힘들겠네. 곤륜파에서는 이런 쪽으로 고민할 일이 없었을 테니.”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좀 이해를 할 수 있게 해. 요상한 말만 하지 말고.”

“근데 심판이 필요하지 않을라나?”

당민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를 도와주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절대 배알이 꼴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무당파의 아이들도 있고. 우리도 여기 있으니까 크게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근처에 일우랑 일수도 있고.”

“도 공자가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무공에 늦게 입문했다고 들었는데.”

“노력파지. 진짜 근성 있는 노력파. 다 노력하는데 제일 열심히 하는 건 아무래도 일수니까.”

“그래서 저희 오빠가 자극을 많이 받고 있어요.”

남궁희선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특유의 붙임성으로 대화에 참여했던 것이다.

“군자검룡이?”

“예. 아무래도 장문인의 제자이니까요. 게다가 대막에서 직접 두 눈으로 도 공자의 실력을 보기도 했고요.”

구룡 중에서도 수좌에 꼽히는 강자가 남궁혁이었다.

그런데 그가 도일수에게서 경쟁심을 느낀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물론 도일수가 남궁혁에게 뒤떨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확실히 긴장할 만 하긴 하지. 우리 애들이.”

“제자들도 정말 잘 가르치시는 거 같아요.”

남궁희선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아직도 그녀는 대막의 사왕성에서 벽우진이 보여주었던 신위가 눈에 선했다.

단 일검으로 수백 명을 썰어버린 그때의 광경이 말이다.

그때의 벽우진은 진짜 절대고수 같았다.

‘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제왕검이라 불리는 부친 역시 대단한 고수였다.

하지만 벽우진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하니까.”

“승부는 어떻게 될까요? 다들 구양 공자의 승리를 점칠 것 같은데. 근데 서 소저가 먼저 제안을 한 것 보면 이길 자신이 있어서 말을 꺼낸 것 같고.”

제갈미미가 슬쩍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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