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1 >
장로를 따라가며 당민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후기지수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구룡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네 생일 때 봤잖아?”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어. 인사만 받았지. 근데 너도 못 보지 않았나?”
“지나가면서 보긴 했는데, 딱히 보고 싶다거나 궁금하다거나 그런 건 없는데.”
벽우진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구룡이건 오화건 그에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기도 하고.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상석으로 가자 황급히 일어나서 인사해오는 이들에게 마주 인사한 벽우진이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간단한 다과상이 차려졌다.
“술은 없나?”
“가져다 드릴까요?”
“응. 이 녀석은 안 먹으니까 나 먹을 것만 가져오면 돼. 너무 비싼 건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웃으며 물러났다.
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업무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이 정도 일은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직접 가져올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어때? 풋풋하지?”
“그러네. 젊음이 가득하네. 여기저기에서 사랑도 꽃피고.”
“바로 그게 용봉회의 묘미지.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기는 하지만 또 그걸 영악하게 노리는 이들도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지.”
“너에게나 재미지 다른 이들한테는 아닐 걸? 그런 애들은 나름 절박하다고.”
“흠흠!”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당민호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그머니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주들이 어디에 있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저기 오네, 구룡오화.”
“어디?”
미리 모였던 것인지 다 같이 들어오는 열네 명의 선남선녀들의 모습에 당민호가 눈을 빛냈다.
특히 그는 오화를 유심히 쳐다봤다.
당소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두 눈으로 직접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으음! 조금 밀리는군.’
비구니인 심혜만 하더라도 그 미모가 주변을 밝힐 정도였다.
심지어 심혜는 여인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머리카락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당민호는 속이 더욱더 쓰렸다.
“저 여아가 비화(秘花)라 불리는 아이인가?”
“맞아. 아미파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 비화라는 별호가 생겼지. 대부분의 시간을 폐관수련으로 보내서 아미파의 속가제자들도 보기 힘들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오화에 꼽힐 만 하네.”
인자한 미소로 다가오는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심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카락이 없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미색이 전혀 가려지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그녀의 미모에 벽우진은 아주 살짝 감탄했다.
“예지만이 비견될 정도네.”
“우리 예지가 참 예쁘지. 곱기도 하고.”
“그래서 저렇게 모여 있구만. 하긴, 곤륜파 소속에다가 패선의 제자이니 눈이 안 돌아가는 게 이상하긴 하지. 어? 저 놈도 가네?”
당민호의 시선이 구양검에게로 향했다.
대전에 들어오기 무섭게 누군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던 구양검이 서예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놀란 것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치근덕거렸다고는 했는데.”
“이거 재미있겠는데?”
“예지 옆에 네 손녀도 있다.”
“그러니까 더 흥미진진하지. 흐흐흐!”
당민호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주시했다.
역시나 용봉회는 용봉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어···.”
“응?”
“안녕하세요. 형산의 표향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표향림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따뜻하게 반겨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까칠할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게, 저기, 장문인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왜 애한테 겁을 주고 그래. 그것도 인사하러 온 아이한테.”
몸을 떠는 표향림의 모습에 보다 못한 당민호가 나섰다.
단순히 인사하러 온 아이에게 너무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서였다.
“겁은 무슨.”
“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럼!”
사천당가에서 서예지에게 못되게 군 게 자꾸 기억에 남아 먼저 인사할 겸 찾아왔던 표향림이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는 곧장 서예지에게로 향했다.
당사자인 그녀에게도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기겁을 하네, 기겁을.”
“쟤 반응이 이상한 거야.”
“나라도 네가 그렇게 대하면 겁을 먹겠다. 소혜한테 하는 거 반의 반만이라도 다른 애들에게 해줘봐라.”
“내가 뭘 어쨌다고.”
혀를 차는 당민호를 향해 벽우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자신은 정말로 그럴 의도가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딱히 차갑게 대한 것도 없고.
“제자들에게 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잘 대해줘. 부드럽게. 사람 인연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난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다니까.”
“아까부터 계속 인상 쓰고 있었으면서.”
“아니거든.”
벽우진이 미간을 쫙 폈다.
혹시라도 좁혀져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바닥으로 이마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당민호의 시선이 서예지에게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아 보여서였다.
“오랜만입니다, 서 소저.”
“그러네요.”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서예지부터 찾았던 구양검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민망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여인들 중 몇몇은 대놓고 부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은 자제해 주시죠.”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제 뜻과는 다르게 갑자기 튀어나와서 말이지요. 하하.”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요.”
서예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누가 봐도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우리 사저 진짜 화났나보다.”
“그러니까. 얼굴에 아주 한풍이 부네.”
“정말 싫으신가봐.”
양이추가 양일우에게 속닥거렸다.
제법 오랫동안 서예지와 함께 수련했기에 이제는 눈빛만 봐도 그녀의 기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사부님도 와 계시네.”
“응? 정말이네?”
안쪽으로 고개를 돌린 양이추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벽우진이 손만 들어 까딱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제 오셨지?”
“아까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파묻혀 있을 때 오셨어요.”
“그래?”
“네.”
심대혜의 말에 양일우가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때라면 자신이 보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소문대로 사이가 정말 좋으신가 봐요?”
“아, 네.”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모용선을 보며 양일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청해일미라 불리는 서예지와 늘 붙어서 수련했기에 미녀라면 나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모용선을 오늘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제가 불편하세요?”
청화(淸花)라는 별호처럼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지닌 모용선이 양일우를 올려다봤다.
아담한 그녀와 달리 양일우는 부친을 닮아 우람한 체격을 지녔기에 모용선으로서는 자연스레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다행이에요. 전 또 양 공자께서 저를 불편해하시는 줄 알고. 아, 태경(太景) 상인이라 불러드리는 게 나은가요?”
“편하신 걸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양일우도, 태경도 다 저를 뜻하는 말이니까요.”
이제는 좀 적응이 되었는지 양일우가 평소의 신색으로 돌아와서 대답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 양이추가 팔꿈치로 형의 등짝을 계속해서 찔렀다.
-왜 그래?
-다 알면서! 흐흐흐! 형에게도 봄이 온 모양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양일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인 모용선이 그에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왜? 사부님이 패선이고 곤륜파의 대제자인데. 모용 소저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 하지.
-땅꾼의 자식이랑 명문세가의 금지옥엽이랑 만나는 게 가당키나 하냐?
-못 만날 건 뭐야? 우리가 혼례를 못 올리는 것도 아니고.
양이추가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대꾸했다.
땅꾼의 자식인 건 변함이 없지만 패선의 제자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구룡오화가 나타나기 전에는 명문세가나 군소방파의 여식들이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고.
단순히 통성명을 하려고 다가올 만큼 그녀들은 한가하지 않았다.
-너무 앞서갔다. 그쯤 해.
-에휴. 우리 형도 참. 아, 도 사제도 마찬가지네.
양이추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여인들 사이에서 쩔쩔매고 있는 도일수를 쳐다봤다.
평소에는 그렇게 믿음직스럽던 도일수가 질문공세를 퍼 붓는 여인들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자 양이추는 한숨만 나왔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사형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뉘에뉘에. 사형이란 말을 꼭 붙이겠사옵니다.”
동갑이지만 조금 늦게 입문했기에 사제가 된 심대현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양이추는 피식 웃었다.
그 역시 농담 삼아 이러는 거지 편하게 대하는 게 더 좋았다.
기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부럽지?”
“뭐, 뭐가?”
“두 사람에게만 몰리는 게.”
“아, 아니거든?”
“근데 말은 왜 더듬어?”
심대현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귀신은 속여도 자신의 눈은 속일 수가 없어서였다.
“이 사형이 대사형에 비해 외모가 좀 부족하긴 하지.”
“맞아. 똑같이 눈, 코, 입이 있지만 여자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는 아니지.”
“이 녀석들이!”
친형을 그렇게도 잘 놀리던 양이추가 도리어 자신이 놀림을 당하자 흥분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심대현과 심소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절망하지는 마세요. 저희들이 있잖아요.”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아직 어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이제 열여섯 살이시잖아요. 저는 열다섯이고.”
“그럼 뭐해. 몸은 이미 장정인데. 좀 더 크면 그것대로 더 안 좋지 않을까?”
양일우처럼 장대한 체격을 지닌 게 양이추였다.
나이는 세 살이나 어린데 말이다.
“여기서 더 크면 안 되는데···. 지금도 큰데.”
“아직은 성장기니까. 근데 왜 나는 안 자라는 거지···.”
심대현이 놀리다가 자괴감에 빠졌다.
어느새 팔척장신이 된 양이추와 달리 그는 아직도 육척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물론 아직 성장이 끝난 게 아니기에 더 자라기는 하겠지만 너무 지지부진한 것 같아 심대현은 그게 불만이었다.
‘무투가는 팔다리가 긴 게 유리한데 말이지.’
가뜩이나 접근전을 펼쳐야 하는 그인 만큼 팔다리가 길면 길수록 좋았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만큼 성장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
“내 키 좀 주고 싶다.”
“나도 정말 받고 싶다.”
양이추와 심대현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불가능하단 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들 나름 용봉회를 잘 즐기는 거 같아, 언니. 아니, 사저.”
“그러게. 저 쪽은 좀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왜 자꾸 다들 큰 사저를 귀찮게 할까?”
“너무 예뻐서 그래. 남자들은 미녀를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거든.”
심대혜가 싱긋 웃으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심소혜도 알게 될 터였다.
“근데 왜 언니한테는 안 그러지?”
“미녀들이 워낙에 많잖아. 오화 분들도 다 계시고. 그 못지않은 분들도 계시니까.”
“나중에는 나한테도 그럴까?”
심소혜가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나중에 자신에게도 서예지처럼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온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아서였다.
특히 구양검 같은 남자는 질색이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으. 그건 싫은데.”
“그래도 미녀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만···.”
심소혜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예뻐지는 건 좋지만 저렇게 남자들이 꼬이는 건 싫어서였다.
“대체 제가 어떻게 하면 만나주실 겁니까?”
< 제 65장. 호랑이도 있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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