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4 >
“기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고 계시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으십니다. 안 그래도 제가 매일 처소에 가서 확인하고 있고요.”
“다행이군.”
“근데 진짜 얼마 안 남으신 것 같아서···.”
혜량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음을 그도 느끼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한 번 뵐 수 있어서.”
“안 그래도 장문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빚도 있다고 하셨고요.”
“빚은 무슨. 깔끔하게 주고받았는데.”
벽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운정은 빚을 지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 역시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사백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하하.”
“다 내려놓고 싶으신 거지. 그래야 우화등선할 수 있을 테니까.”
“사백님께서는 진즉에 포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거야. 깨달음이야 언제,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니까. 자네도 알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혜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운정과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천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었고.
“쉽지 않지. 이별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지금도 적응이 안 되는 것 중에 하나이고요.”
“그렇지.”
벽우진이 굳은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이별이라는 말이 나오자 죽은 속가제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복수는 확실하게 해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아이들이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화풀이, 분풀이일 뿐이지. 어떻게 보면.’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벽우진은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절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벽우진은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면 단호하게 손을 쓸 생각이었다.
“참, 늦었지만 고생하셨습니다. 대막까지 다녀오시고.”
“고생은 무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겸사겸사 대막도 구경하고 왔지.”
“허허허. 두 번 구경 갔다가는 대막 전체가 박살이 날 것 같은데요?”
“박살은 무슨. 그보다 숙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숙소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혜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름 선별해서 결정한 숙소인데 벽우진에게는 별로인가 싶어서였다.
“아니. 숙소는 괜찮아. 나야 어디서나 잘 자니까. 문제는 왜 사천당가가 또 근처에 머무느냐는 거지.”
“그건 사천당가의 태상가주께서 직접 요구하셔서요.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내가 나빠.”
“예?”
“내가 원치 않는다고. 이제는 그만 좀 붙어 있고 싶다.”
벽우진이 얼굴 가득 진지한 기색으로 말했다.
친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부처럼 매일 같이 붙어 있는 건 사절이었다.
“아.”
“어차피 사천당가는 내일 도착한다며? 걔네 숙소 바꿔버려.”
“그건 좀 어렵습니다. 이미 다 배치가 끝난 상태라···.”
“그럼 우리 숙소를 바꿔줘. 그건 되지?”
사천당가의 가장 큰 어른은 당민호였지만 실세는 함께 오는 당문경이었다.
그런 만큼 혜량으로서도 마음대로 사천당가의 숙소를 바꾸기가 애매했다.
하지만 곤륜파는 달랐다.
“번거롭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아 있는 숙소는 다 주변이 시끄러운 곳인데요. 아마 그 쪽으로 이동하시면 장문인을 찾아오는 이들이 엄청날 겁니다. 들으셨을지 모르는데 장문인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방문하겠다는 숫자가 몇 배로 늘었습니다.”
“엄청 귀찮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아. 유명인의 비애인가.”
“허허허.”
현재 곤륜파와 벽우진에 대한 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정확하게는 패선이라 불리는 벽우진에 대한 관심이 더 컸지만.
그렇기에 혜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어야 한단 말인가.”
“그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난 욕심쟁이라 둘 다 가지고 싶은데?”
“크흠!”
노골적인 벽우진의 시선에 혜량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배정이 끝난 걸 바꿀 수는 없어서였다.
물론 벽우진이 난동을 좀 피운다면 얘기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다음에 언제 또 내가 여기에 올지 모르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힘듭니다. 대신 다음에는 꼭 감안해서 배정하겠습니다.”
“쳇쳇!”
벽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바깥에서 얼씬거리는 기척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다음번에는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난 그런 말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야. 다음보다는 당장이 중요하지.”
“허허허.”
혜량이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우진을 배웅해주기 위해서였다.
“나올 것 없어. 계속 바쁠 텐데.”
“그래도 모시는 게 예의지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선배님이시지 않습니까.”
“말은.”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안 믿어.”
벽우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갔다.
그 모습에 혜량이 멋쩍게 웃으며 벽우진을 향해 포권했다.
이번 용봉회를 위해 무당파에서 연회장으로 꾸민 칠성궁에 들어가며 벽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린 애들 노는 자리에 자신이 꼭 들어가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벽우진과 나란히 걷고 있는 당민호는 살짝 들뜬 기색이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가면 싫어한다니까?”
“아니라니까. 오히려 다들 궁금해 할 걸? 그리고 용봉회라고 해서 꼭 후기지수들만 모여 있는 건 아냐. 중견의 명숙들도 제법 있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말이지. 워낙에 혈기왕성한 아이들이라 치고 박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건 다른 애들한테 맡기면 되지.”
“어허. 그래도 우리가 좀 가서 중심을 잡아줘야지. 그리고 수장들이 모여 있는 곳 가봤자 시달리기 밖에 더해? 오히려 여기가 더 편하다니까 그러네? 어떤 녀석들이 감히 우리 앞에 오겠어?”
당민호가 호언장담했다.
곤륜파나 사천당가의 사람이 아니라면 칠성궁에서 두 사람을 귀찮게 할 이는 없을 게 분명해서였다.
물론 관심은 많겠지만 선뜻 다가오는 이는 없을 터였다.
“수장들은 수장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는 여기서 편하게 구경이나 하면서 쉬자고. 싹수가 보이는 애들이 있으면 슬쩍 가르침도 주고.”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사실 내가 가르쳐줄 건 없지. 독공을 익힌 아이가 있다면 모를까. 근데 중원에는 본가 말고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 없지.”
“근데 왜 왔어?”
“강호유람. 너도 온다고 하기에 겸사겸사 놀러 왔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당민호가 대답했다.
진짜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벽우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오랫동안 갇혀 지내봐서 알 거 아냐? 한 곳에만 있으면 얼마나 답답한지.”
“그래도 너 정도는 아냐. 나는 일 때문에 온 거고.”
“어쨌든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너도 궁금하지 않아? 제자들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별 게 다 궁금하다. 알아서 잘 하겠지. 예지도 있고. 어디 가서 맞을 정도로 약하지도 않고 말이지.”
당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사부를 닮아서 그런지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돼먹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일단 분명한 이유가 있다면 손을 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렇게 공손하고 깍듯한 아이들인데 말이지.”
“참기만 하면 호구된다.”
“그건 본가가 자주 쓰는 말인데. 그래서 우리가 친구인 건가?”
“그런 식으로 엮지는 말고. 아, 혹시 손녀 사윗감을 찾으러 가는 거냐?”
대전처럼 넓게 펼쳐진 내부로 들어가자 대번에 시선이 박혔다.
곳곳에서 놀란 표정으로 그와 당민호를 쳐다봤던 것이다.
“겸사겸사? 근데 성에 차는 사내가 없나 봐. 좀처럼 말이 없네.”
“데릴사위를 구해야 하니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그런 문제도 있고. 근데 확실히 네가 알려지긴 했나 봐. 예전에는 내 시종으로 보는 듯한 시선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대번에 알아보네.”
“사천당가에도 갔었으니까.”
놀란 기색은 잠시뿐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벽우진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의 시선 집중은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그때보다 배는 많을 거야. 내 생일 때에는 초대장이 있는 사람만 장원으로 들어왔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용봉회는 기준이 없으니 엄청나게 모여들었을 거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고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아마 계속 들어올 거다. 그나저나 감회가 새롭네. 나도 용봉회에는 거의 다 참석했었는데.”
당민호가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참석하는 사람들은 달라졌어도 용봉회가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참석하고 싶었었는데.”
“그래서 내가 데려온 거야. 늦게라도 후기지수들의 모임을 느껴보라고.”
“이 나이에 무슨.”
“외모만 보면 충분히 후기지수라고 우길 수 있잖아?”
“알맹이가 늙은이잖아. 노땅인 건 숨길 수가 없어. 게다가 이미 얼굴이 알려진 상태고.”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용봉회를 느끼고 즐기고 싶어도 젊은이인 척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두 분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때 칠성궁에서 장내를 지켜보고 있던 무당파의 장로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
뒤늦게 둘을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뛰어왔던 것이다.
“구경 좀 하려고. 고리타분한 대화만 듣는 건 이제 지겨워서.”
“허허허. 그렇긴 하지요. 재미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벽 장문인께서는 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태상가주님이야 당가주님이 있으시지만 곤륜파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당민호의 말에 대답한 장로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수장들이 모이는 자리에 곤륜파의 장문인이 빠져도 되나 싶어서였다.
“그냥 왔어.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따로 찾아오겠지.”
“그, 그렇긴 하지요.”
장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겠지만 상대는 벽우진이었다.
배분도, 나이도, 심지어 실력도 비교할 자가 없는.
그렇기에 장로는 순식간에 납득했다.
“우리가 와도 되지? 안 되는 건 아니잖아?”
“맞습니다. 오히려 후기지수들이 좋아할 겁니다.”
“반대로 왕 대접을 받던 명숙들은 불편해 하겠지. 아예 자리를 피하거나.”
당민호가 슬쩍 웃으며 안쪽의 상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역시나 얼굴을 찡그리는 몇몇 중년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기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몇 없겠지. 그런 아이들은.”
“후기지수들은 더없이 반겨할 것입니다. 두 분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적어도 자신은 반긴다는 듯이 장로가 말했다.
벽우진과 당민호가 떡하니 있는데 말썽을 피울 간 큰 후기지수는 없을 게 분명해서였다.
당민호는 몰라도 벽우진은 괜히 패선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들면 일단 주먹부터 날린다고 하니.’
품위에 신경 쓰는 다른 수장들과 벽우진은 달랐다.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알려진 만큼 적어도 오늘 만큼은 별다른 사건사고가 없을 터였다.
‘겸사겸사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다른 이도 아니고 천하제일인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알려진 벽우진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조언은 금과옥조(金科玉條)와 다를 바 없을 터였다.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딱히 없지만 말이지. 우리는 저리로 가면 되나?”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히 드실 것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구룡오화는 아직 안 왔나본데?”
<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4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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