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3 >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봤다.
사실 이렇게 말은 해도 양일우나 양이추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 역시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노력도 노력이지만 또래의 아이들이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덕분이었다.
사선도 꽤나 많이 넘었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잡초라고 해야 하나.’
화단에서 돌봄을 받으며 자란 화초와 달리 그나 다른 제자들은 목숨을 건 전투들도 수없이 겪었다.
다른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아마 이 녀석들도 평탄하지는 않겠지.’
양일우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법님들의 제자들이 어떻게 가르침을 받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물며 배율석조차 매일 밤 끙끙 앓을 정도로 고된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 선규는 일단 치료부터 확실하게 하고.”
“예.”
끄덕.
자연스럽게 바짝 얼어 있던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준 양일우가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해검지에 거의 다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검을 놓고 가네요.”
“무당파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병장기를 맡기는 것이지. 물론 방문객 전부가 다 그러는 것은 아니고 무당파에서 허락한 이는 병장기를 소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아하.”
신기한 눈으로 해검지에 자신들의 무구를 내려놓는 이들을 구경하던 심소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병장기를 순순히 맡긴다는 게 신기했던 것이다.
“장문령부 같은 건 허가되지 않을까요? 한 문파를 대표하는 물건이자 보물인데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무당파를 방문하는 건 나도 처음이라.”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서예지를 향해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검을 맡겨야 하는 게 무당파의 규칙이라면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그렇게 하기 싫으면 들어가지 않으면 되는 거고. 답은 간단하지. 그런데도 어떻게든 병장기를 가지고 들어가겠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서예지의 시선이 무상검으로 향했다.
저 검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기에 해검지에 놓고 가기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누가 훔쳐갈 수도 있고 말이죠. 책임은 물론 무당파가 지겠지만, 그래도 분실사고가 일어나면 문제가 커지지 않을까요?”
“허투루 관리하지는 않겠지. 견물생심이라고 사람인 이상 욕심에서 초탈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도인이니까 믿어 봐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파인데.”
“전 그래도 불안해요.”
“난 그것보다 점심을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걸리는데. 우리 애들 굶으면 안 되는데. 한창 자랄 시기인데 말이지.”
벽우진은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상검이야 맡기는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외지물이었고.
하지만 제자들을 굶기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아는 얼굴이 있으면 좋겠는데···.”
“근데 진짜 사람 많네. 우리도 최소 무당파 정도만큼의 인원은 되어야 하는데.”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새삼 무당파의 위세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오독문과의 전쟁으로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무당파는 무당파였다.
또한 사람을 대하는 것도 모자람이 없었다.
“저희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는 거 알지?”
“예.”
“기대가 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양일우의 모습에 벽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든든하게 잘 성장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대로라면 정오가 지나도 해검지를 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민호가 있었다면 다짜고짜 무당파 제자들부터 불렀겠지요.”
벽우진만큼이나 제자들이 배고플까봐 신경이 쓰이는지 진구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보기에도 한 시진 안에 해검지를 지날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어서였다.
일반 양민들은 애초에 병장기가 없기에 그냥 지나갔지만 문제는 역시나 무가나 무문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었다.
“헉! 장문인!”
그때 해검지에서 매서운 눈으로 삼대제자들이 일처리를 지켜보던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퍼뜩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일을 하고 있던 삼대제자들은 물론이고 순서를 기다리던 방문객들 역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응?”
“이, 이쪽으로! 아니, 제가 가겠습니다!”
중년도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운종까지 펼치며 벽우진 일행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무당파의 일대제자가 저럴까 싶었던 것이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사람 불편하게.”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문인을 비롯해서 곤륜파 분들이 오시면 극진하게 뫼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누가?”
“저희 장문인이요.”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하니 이렇게 지시가 내려와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진구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야 편하니까 좋긴 한데 해검지는 들러야 하는 거 아냐?”
“괜찮습니다. 대부분의 귀빈들 역시 병장기 소지를 허락 받거든요.”
“그래?”
“예. 그리고 저희 장문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벽 장문인은 검의 소지 유무는 크게 중요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묘하게 기분 나쁜데.”
왠지 모르게 뼈가 담겨 있는 듯한 말에 벽우진이 인상을 썼다.
그러자 길을 안내하던 일대제자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진 후였다.
“이, 잊어주십시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
“어, 음···.”
일대제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실수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농담이야. 나이도 적지 않은데 순진하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고. 근데 이래도 되나?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차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마다 경중이 다른 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불만을 가지더라도 실제로 표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도 저런 대우를 받으려고 아등바등 대더군요.”
“뭐, 그게 사람의 습성이긴 하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우 받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건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었다.
물론 그게 더 커져서 특권의식이 생기면 문제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역시 경계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기도 했고.
“이쪽으로 오시죠.”
“확실히 크긴 커. 혼자 왔으면 길을 잃었겠는데.”
“곤륜파는 더 크지 않습니까?”
“크긴 한데 여기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아.”
벽우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건물의 규모로 따지면 무당파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곤륜파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늘긴 했지만 그래도 무당파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확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에도 벽 장문인께서 직접 오신다고 하자 뒤늦게 참여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내가 좀 유명해지기는 했지.”
“유명해진 정도가 아닙니다. 하하하.”
“금칠은 그만하고. 근데 우리 숙소부터 가는 거 맞지?”
“예. 한적한 걸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조용한 곳으로 준비했습니다.”
저번에 벽우진을 한 번 본 적이 있기에 일대제자는 어렵지 않게 응대했다.
원래부터 까칠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당황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천당가는 도착했어?”
“내일쯤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
“지금 내가 미리 연락 안 했다고 돌려 까는 거지?”
“아, 아닙니다.”
“동공이 흔들렸는데?”
일대제자가 두 눈에 힘을 팍 줬다.
여기서 인정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 아닙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깜빡한 거니까 이해해 달라고.”
“참, 저희 장문인께서 언제라도 찾아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손님들이 많아서 바쁘지 않나? 구대문파는 다 모였을 거 아냐?”
벽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한가할 리가 없어서였다.
“장문인께서 벽 장문인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왜 그래. 부담되게. 나 그냥 애들 데리고 유람 나온 건데.”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이렇게 전달하라는 지시만 받아서요.”
“흐음.”
벽우진이 침음을 흘렸다.
왠지 모르게 귀찮은 일을 떠맡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너무 부담 가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더 부담스러워. 아무 이유 없이 보자고 할 리가 없잖아.”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저곳입니다.”
“우와, 예쁘다.”
“신선들이 사는 집 같아요.”
심소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눈을 빛냈다.
사문의 전각들도 주변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멋스러움을 뽐냈지만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예스러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2층 전각에는 그 예스러움이 있었다.
“우, 우와···.”
한편 어제 합류한 등선규와 등이규 형제는 보이는 모든 게 놀랍다는 듯이 연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크게 놀라고 감탄했던 것이다.
균현에서 살기는 했지만 이렇게 무당파 내부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기에 둘 다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봤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천당가의 숙소만 좀 떨어뜨려줘. 이제는 민호 얼굴 좀 그만 보고 싶어.”
“하하,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설마 진짜 옆이야?”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답과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근처에 붙여 놓은 것 같아서였다.
“사천당가 측에서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거절할 정도의 위세는 있잖아? 남존무당 아냐? 더구나 집주인이 그렇게 외부인에게 휘둘려서야 되겠어?”
“저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저희 장문인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가장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장 가야겠군.”
벽우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차피 무당파에 있는 내내 붙어 있을 텐데 굳이 숙소까지 가까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단 말이 많아서 시끄럽기도 했고.
귀찮게 하는 건 청민과 청범으로 충분했다.
“아, 안내해 드릴까요?”
“응. 너희들은 짐 풀고 있어. 방도 알아서 정하고. 일우하고 예지, 일수가 적당히 분배해.”
“예.”
“네.”
“알겠습니다.”
당장 찾아가겠다는 듯이 벽우진이 빠르게 말했다.
그러자 세 명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가자고.”
“아, 네.”
“갔는데 말을 바꾸지는 않겠지?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으니.”
“그, 그럴 겁니다.”
중년의 일대제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하니 숙소도 들어가지 않고 장문인을 찾을 줄은 몰라서였다.
“가지.”
“예.”
진구가 앞장서서 제자들을 데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일대제자가 황급히 자소궁으로 안내했다.
벽우진은 현묘함이 물씬 풍기는 자소궁을 천천히 둘러봤다.
세월의 풍파는 물론이고 그간의 역사가 올올히 남아 있는 모습에 벽우진은 내심 감탄했다.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곤륜파의 옥청궁도 천년마교에 의해 불타지 않았다면 이런 분위기와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낡았지요?”
“낡기는. 고풍스럽고 멋진데.”
“허허. 사실 본 파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소림사와 달리 아직은 외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지요.”
“부럽네.”
벽우진이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앞으로도 쭉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님은 어떠신가?”
<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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