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2 >
똑똑똑.
저녁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방에서 쉬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벽우진이 고개만 살짝 놀렸다.
“들어오시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는데요. 늙어서 그런지 잠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앉으시죠.”
조금은 건들거리던 진구가 확 달라진 태도를 보이자 벽우진은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확 달라질 줄은 정말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계기가 제자들일 테고 말이지.’
나이는 어려도 당돌하게 자기 할 말은 다 하던 등이규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슬쩍 웃었다.
생김새는 물론이며 덩치도 진구와는 닮은 게 전혀 없지만 묘하게 비슷한 거 같아서였다.
정작 구배지례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인데 말이다.
“무당파에 들어가면 따로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늦은 시간이지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편하게 하세요. 너무 예의를 차리시니 제가 다 불편하네요. 물론 우리의 시작이 썩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요.”
“···그때는 제가 너무 무례했었지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로 모셔온 제가 잘못한 것은 분명하니까요. 물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할 것이지만요.”
달랑 청민과 청범 밖에 없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던 시기였기에 벽우진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였다.
“이해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늦은 시간인 만큼 짧게 여쭙고 나가겠습니다.”
“오래 계셔도 됩니다. 저나 진 호법님이나 하루 안 잔다고 피곤함을 느끼는 몸은 아니지 않습니까.”
벽우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늦었다고 강조하지만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아서였다.
굳이 진구가 아니더라도 벽우진의 취침 시간은 자정 이후였다.
“장문인의 개인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을 묻고 싶으신 겁니까?”
“비천단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진구가 평소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가 곤륜파의 호법이라고 하지만 비천단을 요구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여유분이 제법 있다고 하지만 비천단은 곤륜파의 보물이자 재산이었다.
그가 함부로 사용할 수 없고 벽우진의 재가가 있어야 했기에 늦은 시간임에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선규 때문이군요.”
“예.”
“의방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환골탈태를 하면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던가요?”
“환골탈태를 한 무인을 본 경우가 없어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현이라면 가부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환골탈태로 치료가 가능하다면 비천단을 하나 허락 받고 싶습니다.”
“흐음.”
벽우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문파를 재건한다고 비천단을 많이 사용했지만 사문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제 절제를 해야 했다.
비천단을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비현이 떠날 것도 감안해야 했다.
‘제조방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만드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처음부터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완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일정한 품질이었다.
그것을 유지해야지만 진정으로 완성했다고 할 수 있었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는 현재 곤륜파 내에서 비현뿐이었다.
그렇기에 비천단을 사용하는 건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뼈를 묻겠습니다.”
“오늘 처음 본 아이입니다. 너무 섣불리 결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두 아이라면 제가 이루지 못한 것들까지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대성을 못했지만 두 아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두 아이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는 것을 호법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선규를 치료한다면 이규는 절대 곤륜파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선규 역시 마찬가지고요.”
벽우진이 말없이 진구를 향해 차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른 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정도로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예. 이미 확인도 다 한 상태입니다. 물론 제 예상일뿐이지만요.”
“드리죠. 이규에게도 하나를 주겠습니다. 형제한테는 차별하면 안 되니.”
“저, 정말이십니까?”
진구의 통방울 만한 눈이 더욱 커졌다.
하나만 허락을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두 개를 준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천당가에도 팔았는데 호법님들께 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물론 사천당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부유출이겠지만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억지로 끌려 나오셨는데. 그리고 사실 비현 호법님과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하다가 비천단 얘기가 나왔었거든요. 비천단이 보물인 건 맞지만 호법님들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진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설마 하니 벽우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두 개나 나갈 줄은 몰랐지만 말이죠. 하핫!”
예상치 못한 진구의 반응에 벽우진이 짐짓 크게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될 줄은 정말 몰라서였다.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지금만 해도 충분합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아이들을 잘 키워주시길.”
“걱정 마십시오.”
생각 외로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화는 자정이 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무당산 초입에 도착한 아이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높이도 높이지만 영험한 기운이 물씬 풍겼던 것이다.
곤륜산처럼 웅장한 느낌은 덜하지만 대신 영산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신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당산의 절경에 아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사람도 많아요.”
“아무래도 남존무당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게 무당파니까. 구대문파를 꼽으면 늘 소림과 함께 첫손에 거론되는 문파이기도 하고.”
“그래도 난 곤륜산이 더 좋아. 한적하니 고아한 풍취가 있다고나 할까.”
“솔직히 우리는 구경하러 온 거지, 뭐.”
아침임에도 무당산을 오르는 수많은 이들을 둘러보며 아이들이 재잘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어제부로 합류한 등선규와 등이규가 있었다.
“곤륜산이 그렇게 커요?”
“무당산보다 훨씬 크고 넓지. 대신 험하기도 하고.”
“그래도 길은 잘 닦여 있어. 관리를 꾸준히 해주고 있거든.”
한 번도 균현을 벗어나보지 못한 등이규의 질문에 심소혜와 심소천이 대답했다.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법 많이 친해진 모양새였다.
“서둘러야겠어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해검지(解劍池)에서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게 절차라면 어쩔 수 없지.”
서예지의 말에도 벽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외로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줄 용의가 있었고.
‘두 번은 힘들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만 벽우진의 인내심은 결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색다른 경험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무당산을 방문한 건 벽우진도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서두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민호가 좀 부럽다니까. 아무것도 안 가지고 다니니까.”
진구까지 합세하자 벽우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산을 오르면서 볼 수 있는 정취가 상당히 훌륭해서였다.
“대신 몸이 무기잖아요.”
“그렇긴 하지. 피도 극독을 함유하고 있으니까.”
“근데 가마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도 많네요.”
슬쩍 벽우진의 곁으로 다가온 심소혜가 재잘거렸다.
걸으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부럽니?”
“아뇨! 저는 이렇게 다 같이 얘기하면서 올라가는 게 좋아요.”
“가마를 타고도 대화는 할 수 있어.”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잖아요.”
“후후!”
앙증맞은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하는 심소혜를 보며 벽우진이 빙그레 웃었다.
누구 제자인지 정말 반듯하게 자란 것 같아서였다.
“나들이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앞으로는 자주 나오자. 바람도 쐴 겸.”
“저는 좋아요! 헤헤!”
“목마를 태워주고 싶은데, 이제는 다 커서 태울 수가 없네. 이제는 숙녀가 되어서 말이지.”
“으히히히!”
숙녀라는 말에 심소혜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입은 귀에 닿을 정도로 쭉 찢어져 있었다.
“정말 많이 크기는 했죠. 꼬마아이가 꼬마숙녀가 되었으니.”
“꼬마숙녀는 싫어요.”
심소혜가 서예지를 쳐다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숙녀라는 말은 좋지만 앞에 붙은 꼬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사춘기가 오면 안 되는데. 언니오빠들 힘들어지는데.”
“꼬마 아닌데···.”
“그럼 소녀 해. 소녀는 괜찮잖아?”
놀리듯이 말하는 서예지에게서 고개를 확 돌리는 심소혜를 향해 심소천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히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녀도 마음에 안 들어.”
“으이구. 숙녀라는 단어에 꽂혀서는.”
“머리 만지지 마! 아침부터 열심히 신경 써서 말렸는데.”
“괜찮아, 괜찮아. 좀 헝클어져도 귀여우니까.”
심소천과 티격태격하는 심소혜의 모습에 벽우진이 빙그레 웃었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어서였다.
평화로운 한 장면이기도 했고.
“저기 저 사람 형도 알지? 균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명문가 자제야.”
끄덕끄덕.
“옷도 엄청 화려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게다가 호위무사들도 있어.”
말끔한 얼굴에 영웅건까지 둘러메고 서릿발 같은 기세를 뿌리는 호위무사들을 대동한 채 무당산을 오르는 청년을 쳐다보며 등이규가 중얼거렸다.
같은 남자가 봐도 참으로 멋져 보여서였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고관대작의 자제는 물론이고 균현 인근 군소방파의 대제자나 후계자들이 줄줄이 무당산을 오르는 모습에 등이규는 기가 팍 죽었다.
“어후···.”
등이규가 주눅이 팍 든 얼굴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한 명만 나타나도 식겁할 인물들이 주위에 수두룩하게 보이자 절로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등이규는 감히 저들을 마주 볼 자격도 없는 신분이었다.
“어깨 펴. 대 곤륜파의 제자가 고작 저 정도 이들에게 왜 주눅을 들어?”
“맞아. 너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진 호법님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명심해.”
“아···.”
“겁먹을 것 없어.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정처 없이 흔들리던 등이규와 등선규의 동공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양일우, 양이추 형제의 말이 그들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말이 두 사람의 가슴에 화인처럼 박혔다.
지금껏 두 형제 말고는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 양일우에게서 흘러나와서였다.
“모두가 너희들을 손가락질해도 우리만은 언제나 네 편이야.”
“사부님 역시 마찬가지고. 속가제자들의 죽음에 대막까지 쳐들어간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어봤겠지?”
“예.”
“우리 사부님은 그런 분이셔.”
“또한 대막도 평정하셨지. 진 호법님도 한 손 거드셨고.”
조용히 등선규, 등이규 형제를 따라 걷던 진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양일우와 양이추의 띄워주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가까스로 막는 중이었다.
“예!”
“물론 아직은 입문도 하지 못했지만.”
“우리도 똑같았는데, 뭘.”
<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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