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01화 (201/325)

<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1 >

등이규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자신들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모를까 빼먹을 것도 없는데 사기꾼들이 작업을 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인신매매라면 모를까.

근데 그게 목적이라면 굳이 곤륜파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데.”

“전직 소매치기라고 그렇소이다.”

묵묵히 앉아 있던 진구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손버릇이 나쁘거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기에 진구는 아예 처음부터 밝혔다.

나쁜 짓인 건 분명했지만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 소매치기인 건 맞는데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어요.”

스윽.

뜬금없는 순간에 밝히는 진구의 말에 등이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그러자 형인 등선규가 먹는 것을 멈추고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모든 이들이 동생을 손가락질해도 그만은 언제나 등이규의 편이었다.

“앞으로 안하면 되지.”

“혼, 안 내세요?”

“사람을 죽인 것보다는 낫지. 어차피 네가 훔칠 수 있는 돈이라고 해봐야 푼돈일 테고. 운이 좋아서 큰돈을 훔쳐도 금세 다른 애들한테 빼앗겼겠지.”

“헉!”

등이규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벽우진을 쳐다봤다.

너무나 정확하게 그의 과거를 꿰뚫어봐서였다.

“그리 놀랄 것 없다. 나 정도 살면 자연스레 보이는 게 있으니까. 어쨌든 진 호법님의 전낭을 털다가 만난 거구만? 참 배짱도 좋다.”

“그러게요. 보통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간이 진짜 큰 것 같습니다.”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자 서예지와 도일수도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배짱이 보통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게, 형을 치료하려다가 그만···.”

“나무라는 거 아니니까 그리 긴장할 거 없다. 밥도 마저 먹고. 선규라고 했던가? 너도 얼른 먹어. 몸도 성치 않은 애가.”

꾸벅.

말을 못하는 등선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 폭풍 같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벽우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둘러봤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둘 다 마른 체형이기는 하지만 근골은 나쁘지 않네. 골격도 옹골차고. 확실히 진 호법님의 무맥을 잇기에 괜찮은 육체야. 다만···.’

벽우진의 시선이 등선규에게로 향했다.

동생인 등이규의 근골도 훌륭한 편이었지만 등선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비쩍 마른 모습임에도 벽우진은 등선규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선천적인 벙어리라고 했던가. 무공을 익히는데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 전음도 성대가 어느 정도는 움직여줘야 할 수 있으니까.’

전음은 입을 다물고도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능은 아니었다.

말을 아예 하지 못한다면 전음 역시 펼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의념을 전달할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 길은 전음보다 훨씬 어려웠다.

“둘은 나이가 어떻게 돼?”

“저는 아홉 살이고 형은 열 살이에요.”

벽우진이 입을 다물자 다시 조용해진 식탁의 분위기에 도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열은 막내지만 나이는 제자들 중에 그가 가장 많아서였다.

또한 사회 경험 역시 가장 많았고.

“와! 나보다 동생이다!”

“선규는 율석이랑 동갑이네.”

등이규의 대답에 심소혜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번에도 다 자기보다 어려서였다.

“누가 봐도 누나는 저보다 누나로 보이는데요?”

“내가 키가 좀 크기는 하지?”

심소혜가 히죽 웃으며 콧대를 세웠다.

예전과 달리 키가 상당히 자란 상태여서였다.

마치 대나무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기도 하고.

“발목은 어떻답니까? 의방에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다행히 뼈가 붙기 전이라고 하더이다. 일단 부목을 해서 제대로 붙게 만드는 중인데 적어도 4주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소.”

“다행이군요. 다시 부러뜨리고 붙이는 지경까지는 안 가서.”

흠칫!

너무나 담담한 표정과 달리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벽우진의 모습에 등선규와 등이규가 동시에 움찔거렸다.

그러면서 새삼 자신들이 무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뭐해? 먹지 않고.”

“아, 네.”

일순 굳어버린 둘의 모습에 심소혜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도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말이다.

그 모습에 등이규는 새삼 무인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근데 곤륜파면 도가계열의 문파 아닌가?’

등이규가 계란탕을 한 입 떠먹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도사 같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아서였다.

특히 제자가 되라고 했던 진구는 누가 봐도 산적이나 장수 같았지 도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도 긴가민가 하지?”

“어···.”

“이해해. 우리가 좀 가족 같은 분위기라. 근데 한 번 멸문지화를 입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이번에 속가제자들을 받아서 외롭지는 않을 거야. 이 아이들도 있고.”

“네에.”

“근데 글은 좀 알아?”

원탁에는 음식이 한 가득이었지만 정작 한 젓가락만 먹고 이후에는 한 입도 대지 않던 벽우진이 갑자기 물었다.

그러자 두 형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는데요.”

“일단 글부터 시작해야겠네요. 몸도 불리면서 말이죠.”

“안 그래도 그리 할 생각이었소.”

진구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형제가 밥을 먹는 사이 그는 앞으로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

특히 등선규에 대해서 말이다.

“저기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든지. 아, 나에 대한 욕이나 궁금증은 제외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말해 봐.”

벽우진이 편하게 물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말에도 등이규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말할 듯 말 듯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궁금한 얼굴로 등이규를 주시했다.

“저희 형제는 곤륜파의 무공을 배우는 건가요? 아까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곤륜파의 호법이라고 말하셨거든요. 그러면서 전수할 무공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아는 곤륜파의 무공이 단 하나도 없었지?”

“예.”

등이규가 조심스럽게 진구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중에 진구에게 따로 물어봐도 되는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자기 하나만의 일이라면 모르겠으나 형의 인생까지도 걸린 문제였다.

그렇기에 등이규는 확실하게 듣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곤륜파 소속이라고는 하기 힘들지.”

“크흠!”

“맞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만···.”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하실 겁니까?”

벽우진이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반쯤 농담 삼아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진구의 태도가 이상했다.

단칼에 거절하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으음!”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대답을 아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서예지는 물론이고 심소혜를 제외한 제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 충분히 고민하셔도 됩니다.”

“어, 그럼 저희는 곤륜파 소속이 아닌 건가요?”

이어지는 벽우진의 말에 등이규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곤륜파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또 그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왜? 곤륜파의 제자라는 게 중요해?”

“당연하죠! 곤륜파는 명문대파잖아요! 이왕이면 명문대파 소속이 낫죠.”

“어린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는.”

“배경이 든든한 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피식 웃는 벽우진을 향해 등이규가 진지하게 말했다.

가진 게 없었기에 든든한 뒷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등이규였다.

그리고 진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또한 그 이유에서였고.

“만약 진 호법님의 제의를 거절하면 다시 뒷골목을 전전해야 될 텐데?”

“······.”

등이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리지만 철이 빨린 든 만큼 그는 세상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당돌하게, 영악하게 살아왔고.

“농담이다. 곤륜파의 제자는 아니더라도 연은 유지가 되니 그 부분은 걱정할 거 없다.”

“남겠소이다.”

“음?”

“사실 고민은 좀 했소. 아니, 했습니다. 다시 혼자 산속으로 들어갈 자신도 없고. 또 소혜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도 싫고 말이지요.”

진구가 말투를 바꿨다.

끝끝내 반존대를 하던 그가 처음으로 벽우진을 향해 존칭을 상대했던 것이다.

“그 말씀은?”

“곤륜파에 남겠습니다. 어차피 뿌리가 곤륜파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지요. 여타의 곤륜의 무공들이 그러했듯이.”

“제자의 힘이 대단하기는 하군요.”

“장문인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벽우진이 옅게 웃었다.

그 역시 동감해서였다.

“맞습니다. 저를 참 많이 변화시켰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자, 그럼 얘기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밥 먹자. 오늘 푹 쉬고 내일은 무당산에 올라가야 하니. 너희들도 모자라면 더 시키고.”

“무당산이요?”

조용히 벽우진과 진구의 대화를 지켜보던 등이규가 눈을 껌뻑거렸다.

반면에 얌전히 듣고만 있던 등선규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대신 새로 나온 음식을 동생의 앞 접시에 덜어주었다.

“그럼 균현에 우리가 왜 왔겠어?”

“아.”

“너희들에게야 무당산이 가깝지만 우리에게는 아니야. 큰마음을 먹어야 올 수 있는 곳이지.”

“그러고 보니 저희들도 곧 청해성으로 가게 되겠네요.”

“당연하지.”

등이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십 년 가까이 균현에서 살아왔는데 떠나야 한다고 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던 것이다.

“물리고 싶으면 지금 물려야 해. 내일은 늦어.”

“에?”

그때 양일우가 슬쩍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도망칠 수 있는.”

“형은 왜 애한테 쓸데없이 겁을 줘?”

“겁이라니. 사실을 말해주는 건데.”

양이추가 양일우를 타박했다.

좋은 분위기를 괜히 망치는 것 같아서였다.

“농담도 때가 있는 법이야.”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거절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어쩌면 무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단순히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받아들인 걸 수도 있잖아.”

“그렇기는 하지. 아직은 어리니까.”

양이추의 시선이 등선규, 등이규 형제로 향했다.

아직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기에는 둘 다 어린 나이였다.

정말로 배고픔을 면하고자 진구를 따라가겠다고 한 걸 수도 있었고.

“그런 건 아니에요. 신중하게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끄덕끄덕.

등이규의 말에 등선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민은 짧았지만 그렇다고 대충 결정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신 시작하기로 했으니 제대로 해야 해. 우리는 게으름 피우는 거 못 보니까.”

“형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이 녀석들 사부가 누군지 잊었어?”

“아.”

양일우가 계면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진짜 가족처럼 화목한 분위기를 풍겼던 것이다.

그 광경을 등이규는 조용히 지켜봤다.

‘일단 사람들은 나쁘지 않네. 진짜 곤륜파인지는 내일이면 알게 될 테고.’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파였다.

그런 대문파에서 사기꾼이나 사칭하는 자들을 몰라볼 리 없었기에 등이규는 내일이면 이들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남는 장사였지만 말이다.

우걱우걱.

생각을 정리한 등이규가 다시 음식을 입 안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형도 챙기면서 말이다.

< 제 64장. 용봉회(龍鳳會).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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