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200화 (200/325)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3(8권 끝) >

‘어떤 놈이 감히.’

이리저리 치이는 순간을 노리고서 절묘하게 전낭만 빼가는 기술에 진구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병장기 하나 없이 도복 하나만 달랑 걸치고 있다고 하나 자신의 외모는 누가 봐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괜히 태산권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배짱 좋게 도전하는 짓에 진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호오.”

한데 바람처럼 사람 사이로 빠져 나가는 소매치기를 본 진구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키는 오 척도 채 안 될 정도로 작고 마른 체격이었는데 의외로 신체적 균형이 좋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체격임에도 근골이 훌륭했던 것이다.

“터가 좋아서 그런가. 그나저나 소매치기는 어디에나 있군.”

진구가 혀를 찼다.

무당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기에 균현에는 흑도무리가 없었다.

심지어 흔하디흔한 뒷골목 왈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매치기나 기루, 빈민가는 균현에도 있었다.

스스슥!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소매치기를 진구는 느긋하게 뒤쫓았다.

지 딴에는 나름 꼬리를 잡히지 않게 거리와 골목을 빙빙 돌며 흔적을 없애는 것이겠지만 진구에게는 소용없었다.

애초에 얼굴을 모르는 것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본 상태였기에 놓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놓치더라도 하오문에게 알아봐 달라고 하면 반 시진도 채 걸리지 않아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지가 용의주도해 봤자지.”

고작해야 열 살 남짓한 아이였다.

아무리 약삭빨라도 아이는 아이였기에 진구는 느긋하게 주변을 살피면서 아이를 쫓아갔다.

“형형!”

거리를 몇 번이나 돌고 돈 소매치기는 빈민가가 아닌 균현 외곽의 작은 다리 밑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달려가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런데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다리 밑에서 앙상하게 마른 남자아이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개방의 제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반겼던 것이다.

“이것 봐! 오늘 제대로 한탕 했어! 이 돈이면 형 다친 다리도 치료할 수 있어!”

진구의 전낭을 크게 흔들며 소매치기가 소리쳤다.

하지만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내는 전낭을 보고도 형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무언가를 먹는 행동을 했다.

입이 있음에도 말을 하지 않고 말이다.

“밥 먹자고? 아냐. 나 배 안 고파. 오늘 아침에도 송사리 잡아서 구워 먹었잖아. 그리고 밥보다는 형 다리가 먼저지.”

동생의 말에도 남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치료는 늦은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다리 말고도 다친 곳이 워낙에 많았기에 치료비가 엄청 나올게 분명했다.

“내가 슬쩍 봤는데 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무려 금자도 있다니까!”

소리쳤던 아이가 순간 퍼뜩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이곳에는 자신들만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내 실수. 목소리가 너무 컸어. 큰돈은 피를 부르는 법인데. 어쨌든 일단 의방부터 가자, 형. 치료가 먼저야!”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이가 다시금 형을 재촉했다.

밥보다는 형의 치료가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생각하긴 싫지만 어쩌면 늦었을 수도 있기에 아이는 한시가 급했다.

“걷는 자세를 보니까 다친 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으헉!”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던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타난 이가 바로 전낭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형의 팔을 붙잡고서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 다리로 어떻게 도망치려고.”

“어, 어떻게 찾아왔지?”

“허어.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이로다. 누가 봐도 아비 뻘이거늘 대뜸 반말이라니.”

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쳐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형은 다리가 불편한 상태이기에 도망친다고 한들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힐 게 뻔했다.

‘설마 무인인가? 하지만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무인이라면 순순히 빼앗기지도 않았을 테고.’

아이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만약 눈앞의 중년인이 사이비나 말코 도사가 아닌 진짜 무인이라면 도망친다고 한들 금세 붙잡힐 터였다.

또한 아주 고통스럽게 죽을 터였고.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어째서!’

소매치기는 기술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눈썰미였다.

만만한 상대를 골라야 뒤탈이 없었기에 소매치기들은 보통 작업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훔쳐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작업을 했는데 여기까지 쫓아오자 아이는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우선 예의범절부터 가르쳐야겠군. 아니, 전낭이 먼저지.”

진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아이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주인은 진구였지만 지금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리고 이 전낭이 있어야 하나뿐인 형을 치료할 수 있기에 아이는 선뜻 돌려줄 수가 없었다.

“왜? 네 것 같더냐?”

“······.”

아이가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알고 있었고, 지금의 상황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이 전낭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도 늦었는데 여기서 더 시간이 지체된다면 평생 동안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기에 아이는 전낭을 놓을 수가 없었다.

툭.

그때 다리가 불편한 형이 나섰다.

동생에게서 전낭을 빼앗았던 것이다.

손등에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있던 손도 형의 손길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렸고 전낭은 이내 형의 손으로 넘어갔다.

“으으!”

“형이 더 눈썰미가 있구나. 조금만 늦었어도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는데. 근데 원래 말을 못했느냐?”

천천히 다가와 두 손으로 공손히 전낭을 내미는 형의 모습에 진구가 서늘한 눈빛으로 동생을 쳐다봤다.

그러자 동생의 몸이 바짝 얼었다.

절망스럽게도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 같아서였다.

“예, 예!”

“다리는 언제부터 다쳤지?”

“다, 닷새 정도 되었어요.”

차가운 진구의 목소리에 동생이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생긴 것도 험상궂은데 목소리까지 내리 까니 더욱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반면에 형은 계속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동생 대신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이는?”

“저, 저는 아홉 살이고 형은 열 살이에요.”

“부모님은?”

난데없는 호구조사였지만 아이는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무게를 잡고 말하니 본능적으로 대답이 술술 나왔던 것이다.

“안 계세요.”

“돌아가신 게냐?”

“몰라요. 어릴 때부터 저희 둘뿐이어서요.”

“그런가. 넌 고개 들고. 동생이 잘못했는데 네가 왜 사과하고 있어?”

진구의 시선이 다시 형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깊숙이 허리를 숙이기만 했다.

“죄, 죄송합니다.”

“다리 밑에서 지내는 거냐?”

“···예.”

“겨울에도?”

“네.”

바람조차 막을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는 광경에 진구가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러자 동생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죽지 않은 게 용하네.”

“안 그래도 지난 겨울에 동사로 많이 죽었어요. 저희는 그래도 같이 있어서···.”

“일단 갈 곳도, 가족도 없다는 뜻이렸다.”

“예.”

“잘됐네. 따라 와라.”

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따라오라는 말에 겁부터 집어먹은 것이었다.

동시에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세외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당도 있다는 얘기가 떠오르자 동생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일부러 신분을 속이기 위해 낡은 도복을 입은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어,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니다. 나 곤륜파의 호법이다. 너희들을 데려가는 건 묻고 싶은 게 있어서고.”

“곤륜파요?!”

동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무당산에 가까운 균현에 있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소식에 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이내 아이는 미심쩍은 눈으로 진구를 쳐다봤다.

“왜? 거짓말 같으냐?”

“어···.”

“만약 내가 나쁜 의도로 너희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말로 할까? 손을 쓰는 게 더 편한데?”

“저희 둘을 들고 가기 귀찮아서 꼬드기는 것일 수도 있죠.”

“의심만 많아서는.”

진구가 헛웃음을 흘렸다.

냉혹한 세상에 두 형제만 덩그러니 있으니 의심이 많은 건 이해가 되었다.

오히려 순진한 성격이라면 그게 더 이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의심이 많자 진구는 피곤해졌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요.”

“내 전낭을 훔쳐간 주제에 너무 많이 따지는 것 같지 않느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게 너희들의 상황인 거 같은데.”

“그, 그렇긴 하죠.”

“싫으면 말아라. 강제로 데려갈 생각은 없으니. 하지만 너희 둘은 오늘 밤도 쫄쫄 굶어야겠지.”

진구가 몸을 돌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싫다면 그로서도 별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겠지만 그 역시 벽우진과 함께 하면서 많이 변했다.

힘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따, 따라가면 밥도 주나요?”

꼬르륵!

형제의 배에서 동시에 천둥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극도로 허기진 상태였던 것이다.

“밥 정도야.”

“가겠습니다!”

“따라오너라.”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아이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대신 형의 팔을 꽉 붙잡으며 진구에게 다가갔다.

“예!”

“일단 의방부터 가자. 다친 것부터 확인해 봐야지.”

“가, 감사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였지만 아이는 일단 냉큼 받았다.

우선은 형의 치료가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군.”

“헤헤헤!”

아이가 멋쩍게 웃었다.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진구는 이내 몸을 돌려서 오는 길에 봤었던 가장 큰 의방으로 향했다.

우걱우걱!

의방에서 치료를 받고 온 두 형제가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원탁 위의 음식을 입 안으로 쓸어 담았다.

아귀처럼 쉬지 않고 음식들을 흡입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서예지를 비롯한 제자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들 그렇게 쳐다 봐?”

“신기해서요.”

“호법님께서 이렇게 일찍 데려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기질이 완전 다른 거 같은데. 체격도 그렇고.”

순식간에 쏟아지는 대답에 진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자신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아이들이 놀란 것도 이해가 갔다.

“아이들과 얘기는 잘 된 겁니까?”

“일단은 그런 것 같소이다.”

“지, 진짜 곤륜파의 장문인이세요?”

“어떤 것 같아?”

“어, 음···.”

동생인 등이규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반문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 등이규는 입을 우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맞다고 하면 순순히 믿을 거야?”

“들은 소문에 의하면 맞는 것 같아요. 패선께서 엄청 젊어 보인다고 들었거든요. 그리고 저 누나를 보니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문인의 제자 중에 엄청난 미인이 있다는 말도 들었거든요.”

등이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균현에서 나름 미녀라 불리는 이들을 제법 봤지만 그 누구도 서예지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눈도 마주치기 힘들 정도의 미모에 등이규는 먹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사칭하는 사기꾼들일 수도 있지. 곤륜파 장문인의 유명세를 이용하려고.”

“에이. 저희 형제한테 뜯어먹을 게 뭐 있다고요.”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3(8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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