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99화 (199/325)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2 >

벽우진이 입술을 삐죽 거렸다.

사제의 방문은 언제나 반갑지만 서진후의 품에 한 가득 들려 있는 서류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많이 쌓여 있기도 했고 말이다.

“일은 늘 있지 않습니까. 해도 해도 줄지 않는 게 일이니까요.”

“아는 사람이 더더욱 그러면 안 되지.”

“허허허허.”

서진후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 책상 위에 들고 온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벽우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어쩔 수 없습니다. 사소한 업무라도 사형께서 하나하나 직접 보셔야 하니까요.”

“난 도장 찍으려고 장문인 된 게 아닌데 말이지.”

“이 또한 장문인으로서 해야 할 업무입니다.”

“하아.”

벽우진이 더욱더 늘어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모습에도 서진후는 눈 하나 껌뻑이지 않았다.

비청단을 맡으면서 자신이 보는 서류는 이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급한 건 없습니다. 천천히 보시고 결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급한 불은 다 껐으니까. 응? 이건 뭐야??”

여전히 늘어진 자세로 팔만 뻗어 서진후가 가져온 보고서를 한 장 들어본 벽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종이에 적혀 있어서였다.

“사형께서 복귀하신 이후 이런 문의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청해성뿐만 아니라 인접해 있는 감숙성, 사천성은 물론이고 섬서성, 산서성, 하남성, 호북성 가릴 것 없이요.”

“허어.”

자신의 아들이, 손녀가 동네에서 알아주는 신동이라는 소개말과 함께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한 서찰의 내용에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웃긴 건 이런 서찰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고관대작의 자제도 심심찮게 있었다.

“저도 받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본 파에 관심을 가지는 중입니다.”

“대체 왜?”

“대막까지 가서 속가제자들의 복수를 하고 온 것을 상당히 좋게 보는 것 같습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지만 의외로 그런 곳은 적으니까요. 명문대파일수록 더 그렇고요.”

“호오.”

대막행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죽은 속가제자들의 복수를 위해서 시작된 일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세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하자 벽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사형께서 속가제자들도 끔찍하게 챙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조금 다르지만요.”

“애들 수련성과에 대해서는 매일 보고 받고 있어.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라고.”

“그것도 잘 알고 있죠. 제 말은 조금 과대평가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요것들만 아니라도 반 시진은 애들을 봐줄 수 있을 걸?”

벽우진이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서류더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눈짓에도 서진후는 담담히 웃었다.

“제가 아는 사형이라면 시간을 어떻게든 만드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야. 나 역시 한낱 필멸자에 불과하지.”

“얼마 안 남지 않았습니까?”

“뭐가?”

은근슬쩍 물어보는 서진후에게 벽우진이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그런데 의외로 서진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속가제자들은 사형께 충분히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다들 의욕도 상당하고요. 이번 대막행으로 결속력이 더욱 끈끈해진 느낌입니다. 사실 속가제자들 중에는 차별 아닌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었거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니까.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들지. 행동으로 보여주기보다는 말이 더 확실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행동으로도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니까요.”

서진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의 사형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남자로서도 참 멋있는 사람인 것 같아서였다.

누구나 다 복수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상황 상 마음대로 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벽우진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본산제자도 아닌 속가제자들을 위해서.

“내가 쫌 멋있기는 하지.”

“위엄까지 갖추었으면 정말 금상첨화였을 텐데 말이지요.”

“그건 어쩔 수 없어.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서.”

“지금도 저는 좋습니다. 까칠하지만 친근한 느낌이라서요.”

“내가 까칠하다고?”

벽우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까다롭기는 해도 까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예. 엄청. 아마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맞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럴 리가.”

“내기할까요?”

“네가 불리할 것 같은데?”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누가 봐도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어서였다.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애들이 솔직한 건 알고 있죠? 그 중에는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도 있고요.”

“설마 나에게 안 좋은 말을 하려고.”

“그건 모르는 거죠.”

서진후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묘하게 벽우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장사꾼인 서진후가 뻔히 질 것 같은 내기를 한다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에이, 됐다.”

“역시 사형도 찔리는 게 있으신가 보네요.”

“귀찮아서 그래, 귀찮아서.”

벽우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다시 의자에 늘어졌다.

서류에는 더 이상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저는 속가제자들을 다시 한 번 모집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많은 곳에서 관심을 보이니까요.”

“기회이긴 하지. 하지만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어. 앞으로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까.”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기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곤륜파에 대한 관심은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욱 커질 터였다.

“역시 자신감.”

“내가 자신감 빼면 시체지. 그리고 아직 속가제자들의 기본도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여기서 추가로 더 받는 건 아닌 것 같아. 관리하기도 힘들도, 심사를 감당할 수도 없고.”

“저희가 인원이 많이 부족하기는 하죠.”

서진후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높아지는 명성과 다르게 곤륜파의 규모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속가제자들이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축소된 상태였기에 벽우진의 말마따나 심사도 벅찰 터였다.

“그래도 내 제자들이 쑥쑥 성장하고 있으니까 한 오 년 정도 후에는 제 몫을 해줄 거야.”

“이미 지금도 훌륭한데요. 대막에 다녀온 후로 더욱 가파르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한창 성장할 때니까. 경험도 또래와는 다르게 팍팍 쌓고 있고. 물론 내가 잘 가르친 것도 있지만.”

벽우진이 늘어진 채로 콧대를 세웠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서진후는 딴죽을 걸지 못했다.

비천단이라는 영단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비천단은 말 그대로 기반만 다져주었다.

아이들이 지금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진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형께서 안목은 있지요. 사실 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거든요.”

“그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사형께서 계시지만 아무래도 후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더 잘 키워봐야지. 다양한 경험도 쌓고. 그래도 이제는 무시는 안 받을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몰락한 문파의 제자가 강호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모르지 않는 벽우진이었다.

지금이야 자신 덕분에 곤륜파의 명성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멀쩡히 살아 있어야 가능했다.

만약 자신이 대막에서 잘못 되었다면 곤륜파는 다시 힘들어졌을 게 분명했다.

“할 수가 없죠. 사형께서 이렇게 버젓이 살아계시는데요. 그럼 제자에 대한 건 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도 꼭 넣고.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괜찮겠네.”

“적당히 쓰겠습니다.”

“그래그래.”

“사형께서도 이제 업무 보시죠.”

서진후가 씩 웃으며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우진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그래야겠지···.”

일어나는 서진후를 일별하며 벽우진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보자 머리가 아파왔던 것이다.

“힘내십시오.”

“너도 고생해라.”

“그럼.”

짧게 목례한 서진후가 집무실을 나가고 벽우진이 정말 하기 싫은 얼굴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확인하는 속도는 빨랐다.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에 도착한 일행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함께 온 진구조차도 살짝 들뜬 얼굴로 저잣거리를 구경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진구였지만 호북성은 그도 처음이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또 우리끼리만 돌아다니는 거 같아서 혁문이에게 미안하네.”

“혁문이도 같이 오고 싶어 했는데.”

“그러니까.”

정신을 차린 심대혜가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대막에 갈 때야 위험했기에 함께 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강호의 후기지수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였기에 심대혜는 계속 배혁문이 걸렸다.

이번 일정은 배혁문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기에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뭐. 혁문이는 지금 사숙께 한창 기본을 다져야 할 때니까. 대막에 가 있는 동안 파풍 호법님께서 봐주시기는 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니.”

“그리고 혁문이는 아직 어리니까.”

심대현과 심소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두 사람도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앞으로는 자주 있을 것 같은데.”

대화에 양일우와 양이추 형제도 끼어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사천당가에서도 후기지수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처음이었기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더구나 무당산이니까.”

“바로 가고 싶지만 시간이 애매하니 차라리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가는 게 낫겠지?”

“아마도? 균현에서 남쪽으로 백 리 정도 떨어져 있다니까.”

아이들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결정권자가 벽우진이기에 자연스레 사부를 쳐다봤던 것이다.

“급할 것 없으니까 여기서 머물고 가자. 저녁에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그럼 제가 객잔을 알아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객잔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심대현이 알아서 나섰다.

그 뒤로 심소천이 뒤따르며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굳이 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절약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였다.

“뭐,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귀엽지 않아요?”

“소천이는 몰라도 대현이는 아니지. 이제는 장정이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내년이면 나보다 더 커질 것 같은데?”

“너무 크는 것도 좋지 않은데 말이죠.”

“아냐. 남자는 일단 크고 봐야해. 그게 키던 덩치던.”

서예지의 말에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키가 작은 것보다는 큰 게 모든 점에서 나았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흠흠! 장문인.”

거리의 한쪽에 비켜서서 심대현과 심소천을 기다리는데 진구가 슬쩍 다가왔다.

마치 할 말 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말씀하시죠.”

“따로 둘러보고 오겠소이다.”

“숙소는 정하고 가시죠.”

“알아서 찾아갈 수 있소.”

벽우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행길이지만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순순히 허락했다.

“조심히 다녀오시길.”

“그럼.”

진구가 금세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애초의 목적인 제자를 찾기 위해 균현 곳곳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응?”

무당산이 인근에 있어서 그런지 성도 못지않게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마을을 돌아다니던 진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사람들로 빽빽한 골목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지나갈 때 누군가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품속의 전낭을 빼가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것도 앞뒤로 사람들에 끼어 있던 찰나를 노리는 기가 막힌 수법에 진구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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