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98화 (198/325)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1 >

어느새 봄이 성큼 와 있는 듯한 날씨에 설백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맑은 산 공기와 함께 따뜻한 바람이 느껴졌다.

서늘했던 겨울바람이 어느덧 많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차합! 합!”

또한 설백의 제자 역시 훌쩍 자라 있었다.

하루가 다르다는 말처럼 정말 날이 지날수록 쑥쑥 자랐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제법 형(形)을 잡아가는 모습에 설백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3년 반 정도 남았나.”

혼자서도 열심히 보법을 밟으며 몸을 단련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설백이 중얼거렸다.

약속했던 시간이 어느새 빠르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과연 내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처음 벽우진에 의해 거의 강제로 곤륜파에 내려왔을 때는 솔직히 시간만 적당히 때울 생각이었다.

벽우진이 왜 자신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설백은 자신이 곤륜파에 정이 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처럼 홀로 사부를 모시며 살아가는 게 과연 좋을까?”

설백의 눈이 침중해졌다.

아주 어린 시절, 사부의 시중을 들며 수련하던 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괴로웠었다.

수련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재미라는 것을 몰랐다.

늘 똑같은 하루 일과. 반복되는 하루들.

지겹다는 말로 표현되는 그 시절을 떠올리자 설백은 자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설백의 시선이 다시 제자에게로 향했다.

벽우진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호법들의 제자들과도 형제처럼 지내는 제자를 혼자 떼어 놓으면서까지 가르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자신이야 혼자서 생활하는 게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제자는 아니었다.

이제 아홉 살인 아이는 한창 세상을 겪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때였다.

“스승님!”

“그래. 백 번씩 다 했느냐?”

“예! 혹시 몰라서 백한 번씩 했어요.”

“잘했다.”

어린아이임에도 다부진 얼굴로 다가와 씩씩하게 대답하는 제자를 설백은 인자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늘그막에 얻게 된 제자였기에 더더욱 소중한 아이였다.

또한 기대가 되는 아이이기도 했고.

“형님.”

“허 아우 왔는가.”

“안녕하세요.”

익숙한 음성과 함께 허륭과 그의 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둘의 모습에 설백이 슬쩍 웃으며 반겨주었다.

“허 아우의 제자도 쑥쑥 자라는구먼.”

“하하. 한창 클 나이이지 않습니까. 똑같지요.”

허륭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설백의 제자에게 향해 있었다.

“하긴. 요즘 아이들은 이상하게 성장이 빠른 것 같더라고.”

“저희 시절과는 다르게 잘 먹으니까요. 먹을 것도 많고, 영양적으로도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아무래도 그렇지.”

금세 어울려서 함께 노는 제자를 보며 설백이 옅게 웃었다.

아이들의 발랄함에 미소가 절로 나왔던 것이다.

“물론 저희도 지금은 호의호식하고 있지만 말이지요.”

“너무 잘 먹어서 탈이지. 왜 소속이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맞습니다. 때 되면 밥 나오는 게 정말 큰 것 같습니다. 홀로 산속에서 수행할 때는 벽곡단과 물이 전부였는데. 가끔 가다 산과일이 보이면 따 먹는 정도였으니.”

“여기서는 너무 잘 챙겨주지. 제철 과일은 늘 먹을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수련만 하면 될 정도로 거의 모든 게 지원되고 있었다.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호법이라는 직위 때문이겠지만 편한 건 사실이었다.

“제자도 좋아하고 말이죠.”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사담을 끝내며 설백이 용건을 물었다.

무언가 용무가 있어 찾아온 듯싶어서였다.

“문안인사도 드릴 겸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요.”

“허허허. 허 아우 나이에 문안인사는 무슨.”

“그래도 나이 차이가 꽤 되지 않습니까?”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설백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나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졌지 지금은 아니었다.

막말로 허륭이 먼저 귀천할 수도 있었고.

“그래도 위아래는 존재하는 법이지요. 허허.”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예.”

같이 뛰어 노는 아이들을 일별한 설백이 허륭을 데리고서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단출하게 필요한 것들만 있는 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하고 상의할 것이 있다고?”

“대막에서 봤었던 게 잊히지가 않습니다.”

“사왕성주를 처치했을 때 장문인께서 펼친 일검 때문이로구먼.”

“예.”

허륭의 앞에 차를 따라주며 설백이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허륭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다들 같았다는 건 알고 있지?”

“형님께서도요?”

“나는 사람 아닌가? 더구나 그렇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는데. 북해빙궁주를 잡을 때도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만큼은 아니었지.”

“맞습니다. 북해빙궁주는 나름 비등한 느낌이 있었는데 사왕성주는 어울려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막판에는 가지고 논 듯했고요.”

허륭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사왕성에서 있었던 대결을 떠올리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리고 잊히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런 경지를 봤는데.”

“근데 형님께서는 별로 놀라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거든. 막연하기는 해도. 장문인을 처음 봤을 때 말이지.”

“아, 저희들을 일일이 찾아왔을 때요? 그때 정말 놀랐었죠. 귀신 같이 저희가 있는 곳을 알아냈으니까요. 그 전까지는 누구도 저희가 있다는 것도, 위치도 몰랐었는데.”

곤륜산은 높고 거대했다.

그런 만큼 마음먹고 한 사람이 숨으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도 벽우진은 마치 알고 있던 것처럼 호법들을 찾아냈었다.

“곤륜산의 종주이시니까.”

“종주이기에 가능한 걸까요?”

“그럴 리가. 재능은 하늘이 내리지만 결국 정점에 오르는 것은 인간이야. 스스로의 노력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지.”

“으음!”

허륭이 침음을 흘렸다.

그라고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또한 벽우진이 특이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도.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게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자네가 왜 자괴감에 빠졌는지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게나. 그런 경지를 볼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

“적어도 헤매지는 않지 않겠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륭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설백은 늘 그렇듯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끄러워 할 이유 없네. 다들 마찬가지였으니까. 천하의 소림무제와 제왕검도 똑같았는데.”

“그렇기는 했죠.”

“한 마디 더 첨언을 하자면, 포기하면 편하다네. 허허허허!”

“제가 보기에는 아니신 거 같은데요?”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우리 진헌이가 약관이 되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설백의 눈동자에 언뜻 걱정이 서렸다.

지금은 정정하지만 막말로 당장 5년 후에는 어떨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비현이한테 비천단 하나 달라고 하면 되지요.”

“천명은 영단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법일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아쉬워. 좀 더 일찍 제자를 들였어야 했는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여유는 없어도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럴 땐 자네가 참 부럽다니까.”

설백이 진심이 듬뿍 담긴 눈으로 허륭을 바라봤다.

지금껏 무엇 하나 부러워하지 않고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은 허륭을 비롯해서 호법들 전부가 부러웠다.

한 살이라도 더 어리다는 게 너무나 부러웠던 것이다.

“가는 데는 순서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말을 해도.”

“그보다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네들도 생각하고 있나보군. 아직 약속된 시간이 반 이상 남았는데.”

“그때야 개개인의 몸뚱이만 생각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다르니까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자를 바라보며 허륭이 말했다.

설백이 했던 고민을 그 역시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속세를 등지게 하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물려줄 것이 따로 있지 외로움은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혼자 산속에서 고행을 한다고 경지가 쑥쑥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요.”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처음에는 곤륜파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강제로 끌려오면 그럴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는 얼굴들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다들 똑같이 곤륜파라는 색깔에 물들었다.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스스로 선택한다면 모를까, 강요는 하지 않을 생각이야. 어차피 나중에는 혼자 수행하게 될 테니까. 우리가 그러했듯이.”

“맞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같이 사는 존재이니까. 질투도 하고 시기도 하겠지만, 얻는 것 역시 많지.”

“진짜 도사 같으십니다. 허허허!”

“원래부터 도사였네.”

설백이 빙그레 웃었다.

다들 가끔씩 망각하지만 자신들은 도인이었다.

벽우진 역시 마찬가지였고, 곤륜파는 중원도맥을 당당히 잇고 있는 도문(道門)이었다.

“진구가 걱정입니다. 소혜가 자주 어울려주고는 있는데, 많이 외로워 보입니다.”

“기다리게. 인연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때가 되면 인연이 찾아올 것이네. 더구나 진구는 가장 어리지 않나?”

“많이 조급해 보이는 게 사실이라서요.”

허륭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아닌 척,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모두가 알았다.

진구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제자로 들일 수는 없지. 나뿐만 아니라 선대의 무맥을 잇는 일인데. 괜히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장문인만 하더라도 되게 까다롭게 심사를 보니.”

“그게 맞는 것일세. 이런 이유로 받아들이고 저런 이유로 받아들이다가 탈이 나는 걸세. 그러니 우리는 그저 기다리세. 이번 무당행에 데려간다고 하니, 기대해 봐야지.”

“진구에게 유익한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두 사람은 똑같은 마음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런 둘의 귓가로 제자들의 힘찬 기합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집무실에 도착한 벽우진은 의자에 앉자마자 늘어졌다.

대막에 다녀오는 사이 봐야 할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벽우진은 일단 늘어졌다.

“어후, 좋다. 바람도 좋고. 잠이 솔솔 오는구나.”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한서불침을 이루었기에 맨몸으로 폭설을 맞아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찬바람도 벽우진에게는 선선하게 느껴졌다.

똑똑!

“사형. 저 청범입니다.”

“어, 들어와.”

업무를 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자신의 전용석에서 늘어진 상태로 벽우진이 입만 뻐끔거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단정한 옷차림의 서진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대로 돌아오셨네요.”

“사람은 변하면 안 돼.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거든.”

“저보다 사형이 더 오래 사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최소한 내가 갇혀 있던 58년은 보상 받아야 하지 않겠어?”

벽우진이 늘어진 채로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실제 나이가 많다고 하나 그렇다고 또래와 비슷한 시기에 죽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최소한 시공간의 진에 갇혀 있던 시간만큼은 누리다 갈 생각이었다.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꼭 아침 댓바람부터 그걸 가져와야 했어?”

< 제 63장. 인연은 있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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