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2장. 위령제(慰靈祭). -02 >
이른 아침부터 벽우진은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하게 잘 빨고 말린 도복을 입었다.
평소의 낡은 도복이 아니라 그나마 새 것에 가까운 도복을 입었던 것이다.
그런데 옷을 입는 벽우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늘 권태롭던 그의 얼굴에는 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똑똑똑.
“저희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나도 나가겠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청민의 목소리에 벽우진이 무상검을 챙기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청민은 물론이고 서진후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왜 다 여기에 와 있어? 위령비 앞에서 모여도 되는데.”
자신이 나오기 무섭게 제자들이 허리 숙여 인사해오자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당연히 저희들이 모셔야지요.”
“너희들만큼이나 건강하다. 모셔야 할 사람은 청민이나 청범이지.”
“저희도 튼튼합니다. 강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년 시절 정도는 됩니다.”
“그러다가 훅 가는 거야.”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드는 청민을 향해 벽우진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비천단이 아무리 대단한 영단이라고 하나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약효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게 세월의 이치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민호랑 사천당가 아이들은?”
“먼저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법님들도 도착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마륭은?”
“진구 호법께서 직접 데려오신답니다.”
벽우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건 청민과 서진후도 마찬가지였다.
“사마세가의 잔당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어떻게 됐어?”
“우선 사마세가가 있던 하남성 중심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작질을 하는 놈들이 있을 거야. 산적 놈들을 모은 것도 마찬가지고. 웬만한 정보력이 아니면 그렇게 하기 힘드니까.”
사마륭을 사로잡았고 사마세가를 풍비박산 냈지만 벽우진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옛말에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었다.
그런데 사마세가는 열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명문세가였다.
사마척이 죽고, 사마미령도 죽어 직계 혈족은 끊겼지만 방계 쪽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또한 후환거리를 남겨두면 어떻게 되는지 이번에 제대로 알 수 있었기에 벽우진은 확실하게 끝을 낼 생각이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라 하오문의 조력을 얻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오문이 중간에서 장난질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감안하고 있습니다. 사천당가 역시 도움을 주는 상태이고요.”
서진후가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비청단뿐만 아니라 하오문과 사천당가까지 나선 상태였다.
중간에 하오문이 장난질을 하더라도 사천당가가 있기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할 터였다.
“확실하게 하자. 어중간하게 일을 처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예. 확실하게 뿌리 뽑겠습니다.”
“좋아. 가자.”
벽우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이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만들어진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벽우진을 비롯한 일행들은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 아이들의 마음을 하늘이 아는 건지도 모르겠어.”
“일찍 왔네.”
“당연히 와야지. 우리가 남이가?”
“고맙다.”
진심이 담긴 벽우진의 말에 검은 옷을 입고 있던 당민호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주들과 함께 한쪽으로 물러났다.
지금부터는 곤륜파 사람들의 시간이었기에 알아서 적당히 물러난 것이었다.
스윽.
당민호와 손주들이 물러나는 것을 일별한 벽우진이 높게 세워진 위령비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그러자 죽어간 서른두 명의 속가제자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흑!”
“히잉!”
그리고 그건 속가제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나같이 묵념을 하면서 훌쩍 거렸다.
이렇게 위령비를 보니 그때의 일촉즉발의 상황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반대로 여전히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장문인.”
벽우진이 조용히 죽은 속가제자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진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췌하기 그지없는 꼴의 사마륭을 데리고서 말이다.
사로잡힐 당시의 철검은 모두 뽑힌 상태였지만 대신 전신에 흉터가 가득했다.
심지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듯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아이들이 고생했지. 이 놈이 아사를 노리는 바람에 음식을 먹인다고 고생했소이다.”
진구가 짐짝 던지듯이 점혈당해 있는 사마륭을 벽우진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그러자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사마륭이 흔들리는 눈으로 벽우진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미래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덜컹.
뒤이어 양일우와 양이추, 심대현이 등에 메고 있던 목궤를 내려놓았다.
대막에서 사마륭의 몸에 박혔던 서른두 자루의 검이 담긴 목궤를 천천히 열었던 것이다.
“읍읍!”
단지 뚜껑을 연 것뿐인데도 진하게 풍겨 나오는 혈향에 사마륭이 악을 썼다.
그러나 사마륭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싸늘한 눈으로 사마륭을 노려보기만 했다.
“아혈을 풀어.”
“자결하지는 않겠죠?”
“내 앞에서는 불가능해. 이미 단전도 박살난 상태고.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봤자 혀를 깨무는 것밖에 없지.”
“풀겠습니다.”
청민이 서릿발 같은 얼굴로 사마륭의 아혈을 풀었다.
하지만 아혈이 풀린 걸 알았음에도 사마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처처척!
대신 그의 앞으로 길기가 각기 다른 서른두 자루의 검들이 역으로 박혔다.
은월단의 손에 죽은 속가제자들의 검들이, 이미 한 번 그의 육체를 마구잡이로 꿰뚫었던 철검들이 일렬로 나란히 박히는 광경에 사마륭이 경기를 일으켰다.
철검만 봐도 그 날의 고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왜 아직도 네놈을 살려두었는지, 모르지 않겠지.”
“······.”
창백해진 얼굴로 사마륭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도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빠져나갈 빈틈이 전혀 없었기에 사마륭은 현재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고통 없이 죽는 것이랄까.
“저주도 좋다. 지껄여 봐.”
말없이 두 눈을 감는 사마륭의 모습에 벽우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마륭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군. 억울한 건 내 쪽인데 네가 왜 억울해하지? 죄 없는 속가제자들을 잃은 건 나인데?”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섬뜩한 살기가 장내에 폭발했다.
호법들은 물론이고 청민과 서진후, 그리고 제자들의 살기가 사마륭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농밀하고 서늘한 살기에 사마륭이 침을 삼켰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죽여라.”
“죽일 거다. 그러나 쉽게는 아냐. 아직 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했거든.”
푹!
맨 끝에 있던 피 묻은 철검이 무릎 꿇고 있는 사마륭의 용천혈을 꿰뚫었다.
어슷한 각도로 날아와 그대로 발을 꿰뚫고 땅에 박혔던 것이다.
“끄읍!”
소리도 없이 날아와 박힌 철검에 사마륭이 이를 악물었다.
벽우진이 원하는 대로 비명소리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게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은 아무 변화 없는 얼굴로 두 번째 철검을 떠올렸다.
푹!
이번에는 반대쪽 발에 철검이 박혔다.
그러나 사마륭은 이를 악물고서 신음을 참았다.
어떻게든 벽우진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래도, 무지하게 아프군···.’
가뜩이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출혈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피가 부족한 상태였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다.’
사마륭이 속으로 웃었다.
관통상이 늘어날수록 자연히 출혈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과다출혈로 죽을 가능성 역시 커진다는 뜻이었다.
“청민. 금창약 뿌리고 지혈해. 과다출혈로 죽지 못하게.”
부르르르!
그러나 이어진 벽우진의 말에 사마륭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의 속내를 꿰뚫어본 것 같아서였다.
“우리가 쉽게 죽도록 내버려둘 줄 알았느냐?”
스산한 청민의 말에 사마륭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가닥 기대마저도 사라지자 끝없는 절망이 그를 잠식해왔던 것이다.
물론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낮았다.
‘사왕성주마저 때려잡은 괴물이 내가 혀를 깨무는 걸 모를 리 없겠지···.’
금창약으로 인해 상처 부위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빠르게 출혈이 멎어가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푹!
출혈이 멈추자 다시 철검이 그의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인대며 근육이며 일절 상관치 않고 그저 빈 곳이 있다면 박히는 철검에 사마륭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읍!”
팔다리부터 시작되었던 고통이 어느새 복부까지 왔다.
다시 한 번 단전이 있던 자리를 헤집었던 것이다.
그러자 목구멍으로 피가 역류해왔다.
“속가제자들의 싸늘한 시신을 보면서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
“쿨럭!”
사마륭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앞뒤로 철검이 네 개나 박히자 사마륭이 피를 토했다.
하지만 벽우진은 철검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사과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 네놈이 사과한다고 한들 진심이 담겨 있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그 사과를 들을 아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주르륵.
벽우진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흐를 눈물이 남은 것인지 본산제자, 속가제자 할 거 없이 너도 나도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장로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하나같이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사마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 뭐 하러, 이렇게까지···.”
“약속했거든. 너희들을 죽게 만든 원흉을 반드시 잡아서 바치겠다고. 적어도 너희들의 원한은 풀어주겠다고 말이지.”
“그르륵!”
남아 있던 여섯 자루의 검들이 모두 다 사마륭의 몸을 꿰뚫었다.
그 중 한 자루는 목을 관통했다.
고통은 주되 단숨에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게 말이다.
“저승에 가서 우리 아이들에게 천 번, 만 번 사죄해라. 그게 네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다.”
“퉷! 원귀가 되어서 네놈들을 끊임없이 저주할 것이다!”
가래 끓는 목소리로 사마륭이 울부짖었다.
핏발이 잔뜩 선 눈빛으로 벽우진과 곤륜파 사람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소리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겁먹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원귀는 무슨. 네놈은 잡귀도 되지 못한다.”
“커헉!”
저절로 뽑혀져 나온 무상검이 단칼에 사마륭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원통함이 가득한 사마륭의 얼굴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데구르르 굴렀다.
정확히 벽우진의 발아래로 말이다.
툭.
정확히 발끝 앞에 멈춘 사마륭의 수급을 들고서 벽우진은 몸을 돌렸다.
향 대신 사마륭의 머리를 위령비 앞에 놓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사마륭의 육신에 박혀 있던 철검들을 뽑아 위령비 앞에 일렬로 박아 세웠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구나.”
사마륭의 수급을 내려놓으며 벽우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아도 절절한 슬픔이 목소리에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사람들의 묵념이 이어졌다.
< 제 62장. 위령제(慰靈祭). -02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