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2장. 위령제(慰靈祭). -01 >
개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만약 벽우진이 중원의 패권을 노렸다면 진즉에 그 징조를 보였을 터였다.
물론 음흉하게 뒤로 준비를 했을 수도 있지만, 개왕이 보기에 벽우진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앞에서 큰소리치며 자기 발아래 꿇으라고 할 성격이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뭐, 바람을 넣을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능성이 희박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성격도 아니시고 말이지.”
“그렇죠.”
제갈현이 옅게 웃었다.
남에게 조종당할 바에는 차라리 다 때려 부수는 게 벽우진의 성격이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부분만 조심하면 돼. 정신 나간 것들이 일을 벌이지 못하게. 아마 그로 인한 후폭풍은 우리가 감당할 가능성이 크니.”
“허허허.”
코를 파는 개왕을 보며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역시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였다.
“게다가 가주가 받은 충격은 두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하긴.”
제갈현의 시선이 법무와 남궁진에게로 향했다.
사왕성주와의 대결 이후 두 사람은 급격하게 말수가 줄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심마에 빠지면 안 되는데 말이지.”
“무공을 수련하신지 수십 년이 넘으신 분들입니다. 심마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절망이 하수에게만 찾아오나? 절망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단단한 사람이라고 해서 늘 단단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거대한 바위도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박살이 나는 법이야.”
“그렇지요.”
제갈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도 어느 순간 무너지는 경우가 있었다.
때문에 확신해서는 안 되었다.
“물론 둘 다 나이가 있고,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니 잘 이겨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군. 가주도 알다시피 우리의 적이 한둘인가?”
“확실하게 정리된 곳은 사왕성뿐이죠. 그것도 대막의 전력은 고스란히 있으니.”
“거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는데 부족들 간의 전쟁이 발발했어. 가주 말대로 대막의 패권을 잡기 위해 대부족들이 치고 박는 중이야.”
“다행이네요.”
제갈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막이라도 정리가 되니 정말 다행이었던 것이다.
“이제 곧 해산하겠군. 난주가 코앞이니.”
“그리 긴 시간이 아닌데, 엄청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래.”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난주를 주시하며 개왕이 히죽 웃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게다가 피해 역시 처음의 예상보다 적었기에 개왕의 마음은 가벼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개왕의 시선이 묵묵히 말을 몰고 있는 남궁진에게로 향했다.
‘사왕성주를 죽인 공격. 그게 무엇이었을까.’
남궁진은 곱씹고 또 곱씹었다.
벽우진이 사왕성주의 친위대를 쓸어버린 공격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왕성주를 쓰러뜨린 공격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검극이 사왕성주를 가리킨 순간 결판이 났는데 무슨 수법을 썼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검환은 아냐.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수나 암기를 사용했을 리 없고.’
분명 검에 의한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무상검을 움직인 것이고.
한데 대체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남궁진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으드득!
그리고 그건 곧 벽우진과의 격차가 그 정도로 크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왕검이라 불리며 적어도 검에 한해서는 천하제일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평가 받는 그가 말이다.
‘의형살인강(意形殺人罡)이 기반인 공격이라면 내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고.’
남궁진이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고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남궁진은 너무나 답답하고 짜증났다.
벽우진이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자 남궁진은 정말 오랜만에 좌절감을 느꼈다.
“후우.”
그럴수록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한데 그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비슷한 느낌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음?”
남궁진과 눈이 마주친 법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심정인지 둘은 단박에 알아챘던 것이다.
“이거 참.”
“힘냅시다, 남궁가주.”
“그래야지요.”
“아미타불.”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로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눈빛 교환만으로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윽.
법무를 일별한 남궁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남과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막내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막을 가로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용모를 빛내고 있는 남궁희선의 모습에 남궁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래 전 파기 시켰던 계획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흐음.”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그 계획을 떠올리며 남궁진이 침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지만 성사만 된다면 남궁세가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번성할 터였다.
‘문제는 세인들의 시선인가.’
묘하게 경직된 얼굴로 남궁진이 사천당가 쪽을 쳐다봤다.
수십 년 넘게 지켜왔던 천하제일가라는 이름이 서서히 사천당가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음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천당가에는 독황이라 불리는 당민호가 건재했다.
또한 현 가주인 당문경 역시 오독문과의 전쟁으로 독절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무위를 보여주었기에 그로서는 초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렵군, 어려워.”
남궁진이 다시 한 번 두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머릿속은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복잡해져 있었다.
“애들이 받은 충격이 상당한 모양인데?”
“그걸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벽을 부수는 거지.”
“그게 말처럼 쉽냐?”
벽우진과 나란히 말을 몰던 당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쉬웠으면 이 세상에 고수 아닌 자는 없었을 터였다.
“쉽지 않아도 더 위의 경지에 올라가려면 그렇게 해야지. 안 된다고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야.”
“진짜 매정하네.”
“애들도 아니고. 각자 알아서 해야지. 다른 이도 아니고 무제와 제왕검이라 불리는 이들인데.”
“그래서 더 힘겨울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
“안 도와주는 게 더 도와주는 거다.”
벽우진이 딱 잘라 말했다.
이미 자신만의 무경을 쌓아가는 두 사람이었다.
어중간한 조언은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터였다.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봐. 사실은 귀찮아서 그렇지?”
“그럴 리가. 조력을 받았는데 입 싹 닦을 정도로 난 염치가 없지 않다. 받은 건 어떻게든 돌려줄 생각이다.”
“근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아.”
당민호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나서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다. 우리끼리만 쳐들어갔으면 피해도 피해지만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을 거다. 길도 잘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아, 나도 곤륜산에 들렀다가 갈 거야?”
“인원 전부?”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곤륜파였다.
그런 만큼 사천당가의 인원이 전부 다 곤륜산에 간다면 써먹을 데가 많았다.
“나랑 소윤이, 주혁이, 진수만.”
“흑의대는 본가로 바로 가고?”
“응. 걔네들도 고생했으니까 쉬어야지.”
넷만 따라온다는 말에 벽우진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민호는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굳이 너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에이. 그래도 한 번은 들러야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편한 대로 해.”
벽우진은 만류하지 않았다.
오든 안 오든 그로서는 상관없어서였다.
“나 역시 사마륭에게 할 말이 있기도 했고 말이지.”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벽우진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감숙성의 수도 난주를 쳐다봤다.
저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터였다.
곤륜산에 도착한 아이들이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의 곤륜산 공기를 흡입하기 위해서였다.
“후아아아!”
“역시 집이 최고야!”
“이 산내음은 그 어떤 곳도 흉내 낼 수 없지.”
“나무도 많이 자랐어요!”
산불로 인해 곳곳이 민둥산처럼 보였던 장소들에 어느새 묘목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벽우진과 호법들, 제자들이 대막으로 떠난 사이 속가제자들과 비호표국, 청하상단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묘목들을 심은 것이었다.
아직은 어린 나무들이기에 울창한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듯한 풍경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들 고생했다.”
“아니에요, 사부님!”
“고생이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막행으로 인해 다들 얼굴이 살짝 타기는 했지만 그래도 출발했을 때보다는 다들 안색이 밝아져 있었다.
복수를 했기에 가슴 속의 울분이 어느 정도 풀린 것이었다.
“호법님들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라니요. 아닙니다.”
아이들과 달리 호법들은 설백만 대표로 입을 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굳이 대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른 들어가죠. 제자들이 보고 싶으실 터인데.”
“허허허!”
제자라는 말에 설백은 물론이고 다른 호법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꽤나 오랜 시간 곤륜산을 떠나 있었기에 안 그대로 다들 제자가 보고 싶은 상태였다.
다들 어린아이들이었기에 하루가 다르게 자라기도 했고.
“흐음.”
반면에 진구는 입맛을 다셨다.
아직 그만이 제자가 없어서였다.
“이번에 무당산에 같이 가시죠. 청해성과 사천성, 감숙성, 대막에는 없었지만 호북성에는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소이다.”
이제는 빼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대답하는 진구의 모습에 벽우진이 옅게 웃었다.
다른 호법들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진구였다.
시작은 분명 썩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당산까지도 제가 말동무 해드릴게요, 호법님.”
“그래주겠느냐?”
“물론이죠!”
언제 다가왔는지 심소혜가 해맑게 웃으며 진구의 손을 잡았다.
그 따스한 손길에 진구의 표정이 훈풍에 닿은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고맙구나.”
“우리는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헤헤헤!”
“그렇지.”
진구가 흐뭇하게 웃으며 심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곤륜파는 그에게 있어 집이나 마찬가지인 장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시간만 때우자고 했는데 이제는 혼자인 삶을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들어가자.”
“예!”
곤륜산과의 해후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벽우진이 다시 말을 몰았다.
진짜 집으로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먼저 떠났던 파풍과 함께 사마륭도 확인해야 했다.
‘진짜 위령제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말이지.’
벽우진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아직 복수는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다.
< 제 62장. 위령제(慰靈祭).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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