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3 >
콰우우우!
바닥에서 솟구친 모래들이 삽시간에 사왕성주를 감쌌다.
마치 그를 보호하듯 기이한 흐름으로 일렁이며 주위를 배회했던 것이다.
쉬이익!
그러다가 갑자기 벽우진을 향해 덮쳐들었다.
사왕성주를 감싸고 있던 모래들이 채찍과 같은 형태로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흡!”
듣도 보지도 못한 광경에 벽우진이 순간적으로 몸을 띄웠다.
사왕성주를 감싸고 있는 모래뿐만이 아니라 땅바닥의 모래 역시 창처럼 변해서 그의 발을 노렸기 때문이다.
“죽어라!”
그리고 그것을 본 사왕성주가 눈을 빛냈다.
허공이라고 한들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아서였다.
아무리 벽우진이 허공답보를 펼친다고 해도 사람의 내공에는 한계가 있었다.
파바바밧!
전후좌우는 물론이고 위아래에서도 쏟아져 내리는 날카로운 모래의 공격에 벽우진의 표정이 달라졌다.
만만한 공격이 아님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북해빙궁주와 비슷한 수준인가.’
운룡대팔식을 펼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모래의 모습에 벽우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지난번에 상대했던 북해빙궁주에 필적하는 수준이어서였다.
터더더덩!
허공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크게 이동했던 벽우진이 이내 모래에 집어삼켜졌다.
모래로 이루어진 창들이 벽우진을 두들기다 못해 집어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모래 창의 폭격에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차합!”
그때 모래들을 조종하던 사왕성주가 형형한 안광을 뿌리며 땅을 박찼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서 그대로 벽우진이 있는 곳을 향해 필살의 일격을 준비했던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끝장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사왕성주는 이게 마지막 공격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전력을 다해 혼신의 일검을 뿌렸다.
쒜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대검과 혼연일체가 된 사왕성주가 모래에 뒤덮여 있는 벽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호신강기와 함께 벽우진도 양분할 작정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생명체처럼 벽우진을 뒤덮고 있던 모래가 일순 갈라졌다.
안쪽에서부터 너무나 깔끔하게 모래가 갈라졌던 것이다.
“큭!”
그리고 모래를 가른 한 줄기 선은 순식간에 사왕성주에게 쇄도했다.
분명 모래로 인해 시야가 가렸을 텐데도 벽우진의 일격은 너무나 정확하게 그를 노리고서 뻗어왔던 것이다.
한데 그 선을 본 사왕성주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선이었지만 그걸 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피할 수··· 없다!’
이기기 위해 비장의 한 수까지 사용했건만 그 결과는 대실패였다.
도리어 역으로 당할 판에 사왕성주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벽우진이 아니라 그가 양분될 게 분명해서였다.
으득!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보는 순간 사왕성주는 알 수 있었다.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피해로 이번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을 해야 했다.
카아아앙!
창졸간에 판단을 내린 사왕성주가 전력을 다해 펼친 공격으로 벽우진의 검을 짓눌렀다.
어떻게든 날아오는 선의 궤적을 비틀기 위해서였다.
“흐아아압!”
안간힘을 쓴 덕분일까.
도도하게 뻗어오던 선이 서서히 아래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비틀지는 못했다.
결국 오른쪽 발이 잘려 나갔던 것이다.
슈우우욱!
그러나 사왕성주는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이를 악물고서 전방의 벽우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공력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한 번! 딱 한 번만 성공하면 된다!’
사왕성주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모래가 출렁였다.
그의 진기를 머금은 모래들이 일제히 일어났던 것이다.
마치 해일처럼 일어난 모래는 삽시간에 주변을 장악하며 벽우진을 덮쳐갔다.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똑같이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또한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뿐이야.’
오른발을 잃었지만 사왕성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라고 처음부터 대막의 절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고, 그 과정에서 숱하게 자신보다 강한 이들과 싸워서 이겼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기면 되는 일이었다.
살아남는 자가 진정으로 강한 자였으니까.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모래의 해일에서 수십 마리의 뱀들이 솟구쳤다.
어떻게든 벽우진의 시선을 현혹하고자 사왕성주가 공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것이었다.
우우우웅!
하나같이 벽우진의 육신을 씹어 삼키겠다는 듯이 모래의 뱀들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사방을 가득 채우는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도 벽우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늘어뜨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벽우진의 주위로 청명한 푸른빛의 빛무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빛무리가 일순 수십, 수백 개로 나뉘어졌다.
하나하나가 강환으로 변환되었던 것이다.
퍼퍼퍼펑!
그리고 그 강환들은 모두 정확히 모래로 이루어진 뱀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현혹되기는커녕 아예 접근하기도 전에 터트려버렸던 것이다.
“끄윽!”
한순간에 모조리 날려버리는 공격에 사왕성주가 비틀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심력이 담겨 있는 모래가 공격당하자 그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에게 쇄도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기일전하여 신검합일의 수법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푹.
한데 그때 미약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잘 들리지도 않는 미세한 파육음과 함께 날아가던 사왕성주가 멈칫거렸다.
허공에 뜬 채로 벽우진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던 것이다.
“기적은 없다.”
“그, 그건···.”
“네가 본 게 맞아. 다음에 네가 이루었어야 할 경지지. 물론 이제는 닿을 수 없지만.”
사왕성주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그는 단박에 이해했던 것이다.
“승부는, 애초에 나와 있었던 건가···.”
“안타깝게도.”
“흐흐흐!”
머리 위로 검을 크게 들어 올린 채로 허공에 떠 있던 사왕성주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모든 공격이 결국 발버둥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전신에 힘이 빠졌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이마가 갈라지며 피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은 없을 거다.”
“믿을 수가 없군. 내가, 이 몸이, 본좌가···.”
“과욕은 늘 화를 부르는 법이지. 또한 호기심 역시 명을 단축하게 만들고.”
“크큭!”
무감정한 벽우진의 말을 들으며 사왕성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서도 그는 웃었던 것이다.
“곧 사마륭이 뒤를 따를 것이다.”
“그건 다행이군. 마지막 갈 길이 외롭지는 않아서. 다만 내가 졌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말이지.”
사왕성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생명력이 꺼져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애병을 든 채로 사왕성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공력으로 유지되던 모래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 성주님!”
“저 놈을 죽여라!”
“싹 다 죽여라!”
“성주님의 복수를!”
이마에 혈흔 하나만을 남긴 채 힘없이 지면으로 떨어지는 사왕성주의 모습에 지금껏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주군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채로 벽우진을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느릿하게 바닥에 착지한 벽우진은 물경 천 명이 가뿐히 넘는 적들을 보고도 눈 하나 껌뻑이지 않았다.
대신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들어 가볍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휙 긋기만 했다.
쩌어어억!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달려들던 적들이 모조리 양분되었던 것이다.
푸하하핫!
병장기이며 갑옷이며 가리지 않고 갈라버린 일검에 준비하고 있던 법무와 남궁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광경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벽우진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를 말이다.
‘역시 한참 멀었음이야.’
‘이건···.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군.’
중원에서는 그토록 추앙받는 고수였으나 벽우진 앞에서는 빛이 바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왕성주만 하더라도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였다.
둘이 함께 협공을 한다면 모를까.
한데 벽우진은 그런 사왕성주를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다.
“가지.”
단 일검에 사왕성주의 세력을 몰살시켜버린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무상검을 납검하고는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스스슥!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뒷짐을 지고서 걸음을 옮기는 벽우진의 모습에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사왕성의 무사들이 뒷걸음질쳤다.
친위대가 단 한 칼에 몰살하자 어느 누구도 감히 벽우진의 앞을 가로막지 못한 것이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호법들과 제자들, 그리고 사천당가, 소림사, 남궁세가, 제갈세가, 공동파, 종남파가 뒤따랐다.
중원으로 복귀하는 길은 너무나 편했다.
사왕성에서 있었던 벽우진과 사왕성주의 대결이 순식간에 대막 전역으로 퍼지면서 감히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이들이 없었다.
제갈현의 계획이 필요 없게도 벽우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모든 게 해결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사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직접 봤다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테니.’
말에 타고 있던 제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까이에서 직접 본 그는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의 벽우진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사왕성주도 마찬가지였고.
‘가히 초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 아닌 초인들의 대결과도 같았던 그 날을 떠올리며 제갈현이 눈을 감았다.
그래서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그런 이들에게는 그 어떤 전략도, 전술도, 비책도 통하지 않았다.
‘전략전술은 인간에게나 통하는 것이니.’
무인들 역시 범인들이 보기에는 초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벽우진은 그런 무인들조차 뛰어넘은 상태였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내 오판이었어.’
이번 대막행으로 인한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갈현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확연히 줄었다.
때문에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웠다.
막말로 벽우진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중원에서는 그를 막아낼 사람이 없어서였다.
‘정말 다행인 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제갈현이 은근슬쩍 선두에서 당민호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말을 몰고 있는 벽우진을 쳐다봤다.
가만히 보면 한량도 저런 한량이 없었다.
평소에는 곤륜산을 잘 벗어나지도 않고.
‘건드리지만 않으면 잠잠히 있으니.’
세인들은 말한다.
이제(二帝) 못지않은 고수가 패선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제갈현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소림무제나 무당권제의 시대는 저물었음을.
“두려운 모양이야.”
“방주님.”
“근데 두렵다고 해서 용의 코털을 건드는 우를 범해서는 안 돼.”
제갈현의 곁으로 개왕이 다가왔다.
그 역시 말을 타고 있는 상태였는데 시종일관 경직된 얼굴의 제갈현과 달리 표정은 밝았다.
“절대 그런 생각 없습니다.”
“가주도 알지 않나. 장문인은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히 계실 분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용은 용일 뿐이네. 사람과 엮일 일이 별로 없지. 그것처럼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네. 용 주변에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이지.”
<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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