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94화 (194/325)

<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2 >

“그럴 리가. 너와 달리 나는 사람이거든.”

“본능을 숨기면 쓰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거늘. 설마 아직 운우지락의 즐거움을 모르는 건가? 요상한 진에 갇혀 있어서?”

사왕성주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로서는 그런 곳에 갇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다.

여인 없이 혼자서만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니.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쪽이 신경 쓸 바는 아니고.”

저벅저벅.

벽우진이 뒷짐을 진 채로 걸어 나갔다.

느릿하게 사왕성주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하긴. 어차피 싸우러 온 마당에.”

“그래서 그쪽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맞아. 왕좌를 차지한 이는 늘 도전자를 기다려줘야 하는 법이니까.”

사왕성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말하는 것과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옅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육사자말고는 그의 권좌에 감히 도전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사왕성주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북해빙궁주를 때려잡은 이라.’

사왕성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벽우진을 살폈다.

웃고 있는 표정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벽우진은 들었던 것보다 더 젊은 것 말고는 딱히 특이한 점이 없었다.

언뜻 보면 도복을 입은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이들이 바로 저런 녀석들이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숨긴 이들이야말로 진짜 고수들이었다.

더구나 벽우진은 몇 번의 전투로 자신의 무명을 천하에 알린 고수였다.

그런 만큼 사왕성주는 기대는 하되 결코 방심은 하지 않았다.

“도전자라.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복수자라면 모를까.”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그 복수행은 여기에서 끝날 것이야. 네 무명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사왕성주가 피식 거렸다.

어째 성격이 자신과 비슷한 거 같아서였다.

특히 오만으로 가득 찬 눈빛이 자신과 비슷했다.

“내 검을 가져와라.”

대막의 지배자라 불리는 자신을 앞에 두고도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에 사왕성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오랜만이군. 태랑(太狼)을 잡는 것도.”

친위대주가 두 손으로 공손히 내미는 자신의 애병을 받아들며 사왕성주가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애병인 태랑의 검병을 잡은 지 거의 10년은 된 것 같아서였다.

웅웅웅!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검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태랑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에일 것 같은 예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던 것이다.

“무식하게 크군.”

“그래서 양단을 내기에 아주 좋지. 단 한 방이면 양분 낼 수 있으니까.”

거의 사람의 키만 한 대검의 모습에 벽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신이 아닌 사왕성주의 키와 거의 엇비슷한 크기여서였다.

하지만 그런 대검을 쥐고도 사왕성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너무나 가볍게 대검을 이리 저리 휘둘렀다.

“그럼 끝을 내볼까.”

스르릉.

벽우진이 무상검을 뽑았다.

그러자 양손에 매달려 있는 일월쌍환이 다시금 칭얼거렸지만 벽우진은 무시했다.

굳이 일월쌍환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곤륜파의 일을 마무리 짓는 일에는 무상검이 더 어울렸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마. 물론 그 대가는 네 죽음이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입으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쌔애애액!

벽우진이 이죽거린 순간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검강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태산압정의 초식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펼친 이가 사왕성주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쩌저저적!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 검강에 대지가 양분되었다.

말 그대로 수십 장이 갈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쩌적! 쩍!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사왕성주는 연거푸 휘둘렀다.

벽우진의 표홀한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잡으며 연이어 참격을 뿌렸던 것이다.

“흠!”

대검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섬세하고 빠른 공격에 벽우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확실히 처음 느꼈던 대로 보통이 아니어서였다.

투박하지만 그 투박함을 강맹함으로 가려버리는 호쾌한 검격이 연속으로 벽우진의 주위를 갈라버렸다.

“패선이라더니. 이거 실망스러운데?”

사왕성주가 비아냥거렸다.

피하기만 하는 모습이 너무나 실망스러워서였다.

적어도 패선이라 불릴 정도의 무인이라면 피하기보다는 정면승부를 해오는 게 맞았다.

소문으로 알려진 성격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구경 좀 하느라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대막의 절대자라 불리는지 궁금했거든.”

“이 정도면 충분히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설마 겁먹은 건가?”

“설마.”

이죽거리는 사왕성주와 눈을 마주하며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그 순간 무상검에서 솟구친 시퍼런 검강이 사왕성주의 검강과 충돌했다.

쩌어어엉!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그저 검강이 부딪친 것뿐인데도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의 진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진즉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사왕성주의 부대들뿐만 아니라 중원무림의 무인들조차 비틀거릴 때 기꺼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벽우진의 일검에 사왕성주가 흥이 제대로 돋은 것이었다.

특히 손목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반발력에 사왕성주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이런 긴장을 느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사왕성주는 즐거운 표정으로 재차 검을 휘둘렀다.

우르르릉!

황색의 검강이 벼락 같이 쇄도했다.

단순한 찌르기지만 워낙에 검강의 크기가 크다보니 웬만한 절정고수의 참격보다도 거대했다.

또한 빠르기는 비교불가의 수준이었다.

꽈아아앙!

하지만 그 공격을 벽우진은 어렵지 않게 튕겨냈다.

똑같이 힘으로 사왕성주의 일검을 받아쳤던 것이다.

“크하하하!”

그 모습에 사왕성주가 생사결임을 잊은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반면에 벽우진은 약간 심드렁한 얼굴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사왕성주와의 간격을 좁혔던 것이다.

콰앙! 쾅!

그런 벽우진의 접근에 사왕성주 역시 검강을 서서히 줄였다.

크기만 커봤자 벽우진에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역시 빠르게 벽우진과 간격을 좁혔다.

“제대로 붙어보자고.”

“언제는 안 붙었나?”

벽우진이 검을 찔러 넣었다.

빠르지도 않고 그저 심장을 향해 무상검을 내질렀다.

그런데 그 검을 사왕성주는 피해내지 못했다.

전후좌우 그의 움직임을 모두 봉쇄하는 듯한 일검에 사왕성주는 히죽 웃으며 대검으로 상반신을 가렸다.

쩌어어엉!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사왕성주가 입술을 비틀었다.

단 한 점을 노리는 공격이었지만 충격은 그렇지 않았다.

검극에 닿아 있는 점을 통해서 무지막지한 충격이 육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사왕성주가 좌장을 내질렀다.

애검인 태랑으로 벽우진의 무상검을 막아낸 상태에서 왼손으로 장력을 내뿜었던 것이다.

“흥.”

그러나 왼손이 비어 있는 건 벽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벽우진의 좌장에서 펼쳐진 육양수와 사왕성주의 장강이 격돌했다.

쿠르르릉!

무지막지한 공력이 담긴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뿐만 아니라 모래가루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폭발의 여파로 더욱 잘게 부서졌던 것이다.

푸스스스···.

그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다.

모래가루로 인해 사방이 뿌옇게 변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이나 사왕성주 정도 되는 고수에게 이 정도 환경은 크게 제약이 없었다.

굳이 시각이 아니더라도 다른 감각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서였다.

쑤아아앙!

또 다른 방법이라면 지금처럼 아예 검초로 갈라버려도 되고 말이다.

‘지극히 실전적인 검술이로군.’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맹공을 펼치는 사왕성주의 공격을 무상검으로 받아내며 벽우진이 평가를 내렸다.

일정한 규칙이 없는 게 무초식의 경지에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지극히 실전적인 검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배제한, 오로지 살인만을 위한 검로만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스극.

오로지 치명적인 사혈만을 노리는 검초도 검초였지만 사왕성주가 뿌리는 무형지기 역시 범상치 않았다.

지금껏 상대했던 적들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무형지기를 사용하는 모습에 벽우진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대막의 절대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파지지직!

하지만 무형지기를 다루는 것이라면 벽우진도 만만치 않았다.

내공이 비슷하지도 않지만,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효율을 내는 건 아니었다.

“크흠!”

서서히 자신의 영역이 밀리는 것을 깨달은 듯 사왕성주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비등비등했던 영역이 갑자기 줄어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단전의 공력을 가일층 끌어올리며 벽우진의 무형지기를 거칠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키이잉! 키잉!

보이지는 않지만 매서운 무형지기가 쉴 새 없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서 모래폭풍이 일었지만 누구 하나 상대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밀린다고?’

사왕성주의 안면이 딱딱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온 세월만 70년이 넘었다.

또한 누구보다 넘치는 재능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대막에서는 비교할 대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한데 그런 그가 정면대결에서 밀리고 있었다.

꽝! 꽈앙!

심지어 검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교묘하게 맥을 끊어버리는 벽우진의 검초에 그의 검술이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육체적인 능력에서 압도하지도 못했다.

평범한 체구의 벽우진이 신력을 지닌 그의 검격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냈던 것이다.

‘아무리 육신이 젊어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어쩔 수가 없거늘!’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사왕성주는 점차 초조해갔다.

호기롭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 것 하나 자신이 압도하는 게 없자 서서히 조급해졌던 것이다.

반면에 벽우진의 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날카로워져갔다.

비슷한 실력자와의 대결 경험이 몇 번 없는 사왕성주와 달리 벽우진은 늘 똑같은 수준의 상대와 싸웠다.

그것도 자신처럼 영악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상대와 말이다.

“큭!”

태허도룡검의 매서운 검격이 순식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사왕성주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물론 사혈이나 치명타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유의미한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검에 베인 부위의 옷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지만 사왕성주는 지혈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절묘하게 파고드는 검초도 검초지만 사방팔방에서 쇄도하는 무형지기로 인해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어느 순간 빼앗겨버린 주도권에 사왕성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즐거워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서서히 긴장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사왕성주의 주변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막대한 진기가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이것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흠?”

“인정하지. 네가 나 못지않은 강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결국 이기는 것은 나다!”

포효와 함께 사왕성주의 전신에서 기묘한 아지랑이가 피워 올랐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던 모래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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