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1 >
“두 부족이라면 혈사자와 철사자의 부족이겠군.”
“예. 마지막까지 혈투를 벌이던 이들이 혈사자군단과 철기대였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부대가 산산조각 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원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사왕성주와 네 개의 부족인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기회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저희들을 이용해 사왕성주를 쳐낼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차도살인계인가.”
남궁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맞물리면 상식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과 소속의 이득이었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기회이기는 하겠지. 우리가 대패한다고 해도 그들 입장에는 이득이니까. 적어도 사왕성주의 세력은 줄어들 테니.”
“맞습니다. 물론 저희가 패배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지만 말이지요. 물론 숫자에는 장사가 없습니다만, 세상에는 간혹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니까요.”
제갈현의 시선이 벽우진에게로 향했다.
차이나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가 그들에게는 있어서였다.
게다가 벽우진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독황이라 불리는 당민호나 소림무제 법무의 무경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숫자도 어느 정도 충원이 되었으니, 할만 해. 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부분에만 집중하면 되고.’
사실 제갈현은 지금처럼 마음이 편해본 적이 없었다.
북해빙궁과의 전쟁 당시 그는 늘 마음을 졸였다.
소림무제와 제왕검을 비롯해서 숱한 거대방파와 명문세가가 함께 했지만 북해빙궁의 전력은 강북무림을 상회했다.
때문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렸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패선이라는 절대고수가 함께 하는 지금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사왕성주가 대막의 지배자이자 절대자라고 하나 패선보다 강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지금까지 벽우진이 보여준 무위는 엄청났나.
아직도 서른두 자루의 검으로 이기어검을 펼치는 광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 자루도 제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심지어 그가 알기로 벽우진은 지금까지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벽우진이 진지하게 싸운 게 북해빙궁주와 검선과 대결할 때뿐이었다.
“고민할 것 없어. 단순하게 생각해. 어차피 싸우는 건 나인데.”
“내 말이. 내가 괜히 건성으로 듣는 게 아니라니까? 결국 결판은 우진이가 낼 텐데.”
“대충 듣는 걸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냐?”
“뭐 어때? 안 될 것도 없잖아? 내가 빈둥빈둥 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어차피 다 때려잡으면 되는 일인데.”
당민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분으로도 실력으로도 그에게 뭐라고 딴죽을 걸 수 있는 이는 이곳에서 벽우진 뿐이었다.
“그게 정답이기는 하지.”
“하지만 대충 싸우는 이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내가 이 노구를 이끌고 대막까지 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됐어.”
진심이 담긴 벽우진의 말에 당민호가 씨익 웃었다.
쉽지 않은 선택과 걸음이었지만 당민호는 단 한 번도 대막행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사천당가가 위험했다면 벽우진 역시 한걸음에 달려왔을 테니까.
“자, 그럼 이만 해산하자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야 할 텐데.”
“예.”
“개왕은 좀 남고.”
“저요?”
벽우진의 말에 개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의를 파하는데 자기만 남으라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개왕이랑 할 말이 좀 있어서.”
“아, 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설마 하니 우진이가 널 패겠어?”
“하하. 그렇죠. 이유 없이 주먹을 날리시지는 않으니까요.”
당민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지만 개왕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부담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민호도 있으니까.”
“진짜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고.”
당민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개왕은 마음에 들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는 너무나 싫었다.
후각이 다른 감각들에 비해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개왕의 체취는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모두가 나가는 것을 살짝 부러운 눈으로 보며 개왕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남긴 것인지 조용히 생각해봤다.
“저도 같이 남으면 안 될까요?”
그때 머뭇거리며 일어나던 곽자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뒤늦게 합류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벽우진과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앞으로의 종남파를 생각하면 벽우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강자가 될 수 없다면, 강자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게 그가 보아온 무림이었다.
“응. 안 돼.”
“어···.”
단호한 벽우진의 대답에 곽자량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당민호를 슬쩍 쳐다봤다.
혹시라도 그가 도와주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당민호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갈가주에게 가 봐. 따로 설명 들어야 할 게 있을지도 모르니.”
“예에.”
그나마 개왕이 나서주었지만 곽자량은 입맛을 다셨다.
앞으로의 강호는 누가 뭐래도 벽우진을 중심으로 흘러갈 게 뻔했다.
그 대단하다던 소림무제와 제왕검이 이곳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때문에 어떻게든 벽우진과 친해져서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한 소리 듣지 말고.”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곽자량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천막을 나섰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남아 있고 싶다는 티를 냈지만 벽우진이나 당민호는 그런 곽자량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벅저벅.
대막 최고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오고 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사막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도시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던 것이다.
거기다 중원과는 확실히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도 벽우진의 시선을 끌었다.
“정말 여기까지 왔군.”
“소림무제와 제왕검도 있다던데?”
도시에 도착한 벽우진 일행은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받았다.
그런데 의외로 적대적인 시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경계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공격해 오는 이들은 없었다.
“일단은 지켜본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먼저 죽고 싶은 이들은 없을 테니까.”
“결과가 어느 정도 나왔을 때 움직일 것입니다.”
“나야 좋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방해 받지 않는다는 소리이니까.”
“저곳입니다.”
벽우진을 보필하듯 함께 걷던 제갈현이 손을 들어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방벽을 가리켰다.
성벽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높이이지만 도시 내에서는 가장 높았다.
그렇기에 멀리서도 보였고.
“정문으로 가지.”
“예.”
뒷짐을 진 상태로 벽우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로 사천당가와 소림사, 남궁세가, 제갈세가, 공동파, 종남파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여유로운 벽우진과는 달리 다들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특히 뒤늦게 합류한 종남파의 무인들이 유독 크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웅웅웅!
한편 선두에서 느긋하게 걸어가던 벽우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소매에 가려져 있던 일월쌍환이 도시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칭얼대고 있어서였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들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듯이 말이다.
후우우웅!
그리고 그 이유에는 사왕성주가 내뿜는 존재감이 한 몫하고 있었다.
여기는 자신의 땅이라는 듯이 성벽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묵직한 존재감에 벽우진이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존재감만으로도 사왕성주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도 왕이라는 건가.”
“예?”
“제갈가주는 안 느껴지는 모양이야?”
제갈현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반면에 법무와 남궁진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 가고 있었다.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그들 역시 서서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가주는 아직 힘들지. 무공이 전문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갈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벽우진은 물론이고 당민호의 말도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법무와 남궁진의 표정을 보면 확실히 무언가 일이 생기기는 한 듯싶었다.
“어쩌면 쉽게 성벽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까요?”
“대막의 전왕(戰王)이 날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야. 중간의 방해 없이.”
벽우진이 히죽 웃었다.
느껴지는 존재감만으로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자신감이지.”
“대막의 지배자 정도면 그래도 되지. 세외 중 한 곳인 대막을 평정한 자인데.”
“우리 또래가 유독 이상한 놈들이 많은 것 같아. 가까운 예로 금강신니도 그렇고.”
“너도 이상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지?”
“자기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성장은 시작하는 법이지.”
당민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벽우진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이는군.”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벽우진의 시야에 정문이 보였다.
그런데 입구를 지키던 두 명의 위사는 벽우진을 보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따라 들어오라는 듯이 등을 보이며 둘 다 통로 안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어···.”
그 광경에 제갈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벽우진의 말대로 되자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휘적휘적.
반면에 벽우진은 마치 자기 집 안방에 들어가듯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통로 안에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돼. 웬만한 것들은 우진이가 처리해줄 거니까.”
“장문인을 보내고 저희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날 믿어.”
당민호가 히죽 웃으며 제갈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말에 제갈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벽우진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통로를 지나가는 와중에 기습은 없었다.
“이제야 왔군.”
제법 긴 통로를 지나 성벽 안으로 들어온 벽우진은 品자 형으로 구축된 진영의 안쪽 가운데에 서 있는 사왕성주를 볼 수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맞기 싫다는 듯이 양쪽에 두껍고 긴 나뭇잎을 여인들에게 들게 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을 본 제갈현과 남궁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마미령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정문 쪽만 열어놓은 듯이 좌우로 길게 포진한 사왕성주의 병력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제갈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남궁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마미령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물론 날씨로 인해 순백이었던 피부는 갈색 빛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얼굴은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인형이 되어버렸군.”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나이도 이제 열여덟에 불과하니까요.”
제갈현이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사마세가가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거기에 사마미령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갈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마세가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사마륭을 아비로 두었다는 이유로 사마미령이 잃어야 하는 게 너무나 많아서였다.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모양이로군. 여인에 시선이 먼저 가는 것을 보면.”벽우진을 비롯해서 제갈현, 남궁진, 당민호의 시선이 사마미령에게 향하자 사왕성주가 느끼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사마미령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 제 61장. 대막지왕(大漠之王).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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