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0장. 혈채의 무게. -02 >
익숙한 신음소리에 사마륭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와 같이 말을 몰던 아들이 어느새 벽우진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어서였다.
목이 붙잡힌 채로 아등바등 대는 사마척의 모습에 사마륭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남은 건 아들뿐인 거 같은데.”
“노, 놓···. 끅!”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는 아귀힘에 사마척이 이를 악물고서 두 손으로 벽우진의 손을 긁었다.
악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긁어서라도 고통을 주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곱디고운 모습과 달리 벽우진의 살갗은 고래 힘줄 못지않게 질겼기에 아무리 긁고 꼬집어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대신 점점 더 조여지는 힘이 강해졌다.
“뭐, 아들을 희생한다고 해도 얼마 도망치지 못할 테지만.”
“사, 살려주···!”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사마척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도 벽우진은 가차 없었다.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으며 그대로 목뼈를 꺾어버렸던 것이다.
부르르르!
직각으로 목이 꺾인 사마척이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혀를 내밀며 축 늘어졌다.
사마세가의 장남이자 소가주인 사마척이 끝내 죽은 것이었다.
“처, 척아!”
그 모습에 사마륭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사마륭의 모습에 벽우진은 더없이 싸늘한 얼굴로 사마척의 시선을 그의 앞으로 던졌다.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는 법이지. 무슨 짓을 해도 말이야.”
“크흐흐흑!”
딸을 사왕성주에게 바칠 정도로 비정한 아비였지만 그렇다고 부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마륭은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척의 몸은 빠르게 식어갔다.
불어오는 열풍과는 다르게 아들의 시신은 반대로 차가워져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왜 시작했어. 네놈이 시작하지 않았다면 불필요한 죽음은 없었을 텐데.”
“모두 네놈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이 모든 게 시작됐어!”
시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사마륭이 소리쳤다.
벽우진을 노려보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마륭의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야 했다는 거냐? 네 꼭두각시가 되어서?”
“그냥 넘어가도 되었잖아! 굳이 공론화시키지만 않았어도···!”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이군. 모든 상황이 네 마음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시종일관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저런 작자가 사마세가의 가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꼬마아이나 할 법한 모습을 불혹이 넘은 사마륭이 보여주자 어이가 없었다.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본가가···! 절대 네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네놈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 역시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푹!
미치광이처럼 악을 쓰던 사마륭이 순간 휘청거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철검이 어깨를 꿰뚫자 비틀거린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푹! 푸푹!
선혈로 물든 철검들이 벼락처럼 그를 노리고서 쇄도했던 것이다.
파공음으로 철검들이 날아오는 걸 알아차린 사마륭이 황급히 땅을 박찼다.
그러자 맹렬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철검 두 개가 땅바닥에 박혔다.
“희망사항은 알겠는데, 네게 허락된 건 딱 하나뿐이다.”
“끄으!”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스물아홉 개의 철검들을 주시하던 사마륭이 느닷없이 신음을 흘렸다.
어깨에 박혀 있던 검이 갑자기 꿈틀거리자 근육이 뒤틀리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던 것이다.
푸푸푹!
그러는 사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철검들이 사마륭의 육신을 꿰뚫었다.
사마륭에 의해 죽었던 속가제자들의 검이 원흉의 몸에 하나둘 박혔던 것이다.
“끄아아악!”
무려 서른두 자루의 검이 빼곡하게 몸에 박히자 사마륭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사마륭의 비명에도 무상검에 타고 있던 벽우진의 두 눈은 싸늘했다.
아무리 사마륭이 고통스러워한들 은월단의 손에 죽어간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어서였다.
나이도 나이지만 무공을 제대로 익힌 사마륭과 달리 죽은 속가제자들은 입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 만큼 감히 사마륭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죽음 역시 너에게는 허락되지 않아. 네가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거든. 아직 너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흐으으!”
서늘한 말과 함께 벽우진이 지풍을 뿌렸다.
지혈을 해서 더 이상의 출혈이 일어나지 않게 막았던 것이다.
“드디어 잡았네요.”
“돌아가자.”
“저희가 들겠습니다.”
“죽지 않게 잘 들어. 점혈을 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청민과 서진후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륭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려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곤륜산에 도착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자.”
“예.”
무상검을 납검한 벽우진이 뒷짐을 진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한창 금속음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이동했던 것이다.
천막으로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속속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새로운 이가 보였다.
놀랍게도 종남파의 곽자량이 친근한 미소를 머금고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뭐야, 저 녀석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벽우진과 눈이 마주하기 무섭게 여유롭게 앉아 있던 곽자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을 했다.
하지만 깍듯한 그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리고 그건 몇몇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곽자량이 왜 지금의 시점에 합류했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별로 반갑지 않은데?”
“허허허. 마음은 더 일찍 합류하고 싶었습니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게 합류한 만큼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겠습니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어조로 곽자량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에게 동조해주는 이들은 몇 없었다.
몇 번의 전투로 인해 피해가 발생한 만큼 분명 곽자량과 종남파의 합류가 힘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다 된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리는 것처럼 보였기에 누구 하나 크게 반겨주지 않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보급 문제로 걱정이 많았었는데, 곽 장문인 덕분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안 그래도 보급이 가장 시급할 것 같아서 말이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전투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오. 본 파의 핵심 전력을 전부 데려왔으니.”
제갈현을 향해 곽자량이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곽자량이 데리고 온 인원이 250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종남파가 앞장서면 되겠네. 사왕성을 공격할 때.”
“예?”
“왜? 종남파만 믿으라며? 그럼 당연히 선봉은 종남파가 맡겠다는 거 아닌가?”
“어, 그건···.”
갑자기 훅 틀어오는 당민호의 말에 곽자량이 움찔거렸다.
자신과 종남파만 믿으라며 가슴을 탕탕 치던 것과 달리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럴 자신은 없고?”
“태상가주님과 벽 장문인이 계신데 제가 어찌 선봉을 맡겠습니까. 후배인 제가 그럴 수는 없지요.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곽자량이 뻔뻔하게 웃으며 당민호와 벽우진, 법무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배분까지 들먹이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 모습에 당민호가 코웃음을 쳤다.
“양보해주겠다면?”
“하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나서는 건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기선제압 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아쉽게도 저는 그 정도 무게감을 지니지는 못해서요. 저는 다음번에 앞장서겠습니다.”
“흥.”
말만이라도 자신이 나서겠다고는 말하지 않는 곽자량의 모습에 당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곽자량은 당당했다.
찰나의 쪽팔림을 감당하면 안위와 실속을 둘 다 챙길 수 있었는데 그걸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대화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고.
“맡겨서 뭐해. 제대로 하지도 못할 텐데.”
“허허허! 제가 좀 많이 부족하기는 하죠.”
벽우진의 말을 곽자량이 냉큼 받았다.
누가 뭐래도 이 자리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은 사람은 벽우진이었다.
또한 가장 큰 명분도 벽우진이 가지고 있었고.
“회의 시작하지.”
“예. 일단 사왕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새로 합류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두 번 들어서 나쁠 것도 없고 말이지.”
“그렇긴 합니다만, 지겨워하시는 분들도 계시네요.”
“흐아암.”
제갈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당민호와 개왕을 쳐다봤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둘 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우린 보고서를 질리도록 봤다고.”
“허허. 난 젊었을 적에 직접 가본 적이 있었지. 그때는 사왕성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지만. 근데 구조는 그대로인 것 같더라고.”
“다시 해.”
“예.”
머쓱한 두 사람의 대답에 벽우진이 정색하며 말했다.
귀찮은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가 벽우진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사마륭을 생포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뿌리를 제대로 뽑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기에 벽우진은 사왕성도 확실하게 끝맺을 작정이었다.
“그럼 사왕성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城)이라는 명칭과 달리 사왕성은 성벽이 없습니다. 방벽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중원과 비교하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사왕성 역시 요새라기보다는 거대한 마을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상주하는 인원이 상당하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대막에서 가장 큰 도시인만큼 상주하는 인원뿐만 아니라 유동인구 역시 제일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사왕성주의 휘하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사왕성에는 수십 개의 부족들이 모여 있고, 그 부족들 중에는 사왕성주에 호의적인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사왕성주는 대막의 절대자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가 노려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왕성주만? 그게 가능하나? 아무리 그래도 같은 대막인들인데.”
법무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라도 중원무림이 쳐들어 왔는데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서였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합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산다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요. 중원만 하더라도 정사마가 함께 있지 않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도 벌어지고요.”
“그건 그러네만.”
“게다가 대막은 부족중심입니다. 세가보다도 더 끈끈하게 묶여 있지요. 또한 모든 부족이 사왕성주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요. 가까운 예로 육사자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긴.”
법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육사자를 보면 사형제간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원수라면 모를까.
“육사자의 부족들도 감안해야 할 것 같은데. 사왕성주와 사이가 나쁘다고 하지만, 일단 우리가 원수인 것은 분명하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봤는데 최소한 두 부족 정도는 제외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남궁진도 대화에 참여했다.
다른 부족들은 모르겠지만 육사자를 배출해낸 부족들은 복수심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다.
< 제 60장. 혈채의 무게.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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