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0장. 혈채의 무게. -01 >
서진후의 두 눈에서 형형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독하게 차가운 살의가 날카롭게 폭사되었던 것이다.
“피, 피해라!”
거대한 푸른색 검강이 대지로 향하자 천성대원들이 소리쳤다.
닿는 순간 아작 나는 걸 넘어 갈가리 찢겨질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쩌어어억!
휘둘러지는 낌새를 본 것과 동시에 천성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검역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멀쩡하게 피해낸 이는 소수였다.
대부분은 서진후의 참격을 피해내지 못하고 양분되었다.
“파고들어!”
“틈을 노려라!”
하지만 천성대원들도 만만치 않았다.
한순간에 동료 십여 명이 썰려 나갔음에도 천성대원들은 재차 달려들었다.
복수심을 가진 건 천성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동료들이 죽었음에도 천성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검을 회수하는 틈을 노리고서 서진후에게 달려들었다.
푸푸푸푹!
그러나 접근에 성공한 천성대원은 없었다.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뿌리는 청민에 달려들던 천성대원들은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채 절명했다.
강해진 건 제자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절치부심하고 노력한 건 청민과 서진후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사로잡지 못하고!”
“존명!”
단 둘 만으로 천성대를 압도하는 모습에 사마륭이 노성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강해진 것은 알고 있었으나 천성대 역시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쪽은 사마세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벽우진이 오고 있을 것이기에 서둘러 둘을 사로잡아야 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도망치지 계속 덤벼!”
익숙하게 합격진을 펼치는 천성대를 향해 청민과 서진후가 포효했다.
죽은 속가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평소와 달리 광인처럼 날뛰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씩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너무 걸리는데···.’
좀처럼 사로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 둘의 모습에 사마륭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경우 청민과 서진후가 곱게 보내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벽우진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피해야 다시 복구하면 되는 일이고.
“지독한 놈들.”
사마륭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더 이상 명문세가라고 할 수 없는 사마세가였기에 현재의 천성대는 온갖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석궁은 물론이고 독이 묻은 비수나 암기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던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활용할 정도로 변질된 천성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강해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런데 청민과 서진후는 그런 천성대를 상대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감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크하하하!”
오히려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모습에 사마륭은 이가 갈렸다.
“가주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더 이상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버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두 노인의 모습에 심복과 아들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시간이 일 각을 훌쩍 지나가 있어서였다.
일 각은 짧은 시간이지만 벽우진 정도의 고수라면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사마륭 역시 그걸 알기에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물러난다. 북을 치도록.”
“존명.”
사마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를 살리지 못해 아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했다.
지금도 사실 아슬아슬하단 걸 알기에 사마륭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둥둥둥!
이윽고 전장에 묵직한 북소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에 흉신악살처럼 청민과 서진후에게 달려들던 천성대가 썰물 빠지듯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청민과 서진후를 견제하면서도 발 빠르게 사마륭에게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역시 약삭빠르다니까.”
“근데 어쩌나. 이미 늦었는데.”
툭.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서진후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사마륭과 사마세가 너머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아무리 패선이라도 이 짧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는 건 불가능해.”
천성대가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중에는 사마륭도 있었다.
누구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오랜만이지? 나만큼이나 너도 날 보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아는데.”
“···벽우진.”
“이야~! 많이 컸어? 내 앞에서 내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할 정도로. 대막에서는 좀 잘 나가나봐? 아니면 사왕성이 그렇게 든든한가?”
처음 봤을 때처럼 뒷짐을 진 상태로 벽우진이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런 벽우진의 태도에도 사마륭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얼굴 가득 식은땀을 흘렸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두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아서였다.
툭. 투툭.
그때 벽우진의 뒤에 두둥실 떠올라 있던 세 개의 목궤가 바닥에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목궤까지 챙겨왔던 것이다.
그것도 허공섭물을 펼친 채로 말이다.
꿀꺽!
그 광경에 사마륭의 주위에 모여 있던 천성대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공괴물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벽우진은 혈사자에 이어 철사자까지 상대한 후였다.
그런데도 벽우진의 안색은 전혀 싸운 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 틈에 소름이···.’
사마륭의 심복이자 수신호위라 할 수 있는 백융은 팔뚝에 돋아난 소름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벽우진을 보는 것뿐인데도 팔뚝은 물론이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더불어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이게 바로 절대고수의 존재감인가.’
그 역시 과거 곤륜산에서 벽우진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압박감을 느끼지 못했다.
기도를 갈무리하고 있었기에 딱히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벌써 왔을 줄이야.”
“네 얼굴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말이지. 진짜 사무치게 보고 싶었거든. 네놈이 말이지.”
벽우진이 정색하듯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뜨거운 바람으로 가득한 주위에 일순 서리가 내린 듯했다.
일변한 벽우진의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기운이 주변을 잠식했던 것이다.
스슥!
그와 동시에 백융과 천성대원들이 사마륭과 사마척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고자 벽우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벽우진. 이왕이면 사지가 결박된 상태로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막나가네? 하긴. 어차피 적인데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 근데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책임도 져야 하는 건 알고 있지?”
“······.”
사마륭의 안색이 더욱 해쓱해졌다.
그저 대화만 하는 것뿐인데도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륭은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 쉽게 가자고. 어차피 서로에게 볼 일이 있잖아? 혹시 알아? 지금이라면 날 잡을 수 있을지? 그리고 어차피 네가 갈 곳이라고 해봤자 사왕성이잖아?”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갈 줄 아나?”
“도발이라니. 난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도망치는데 성공하면 사왕성주한테 쪼르르 달려갈 거잖아. 내가 네 제자들을 싹 다 조져버렸다고. 지금 당장 복수해야 한다고 말이지.”
사마륭은 말을 아꼈다.
대신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생각보다 빠른 등장이었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죽기 전까지는 모든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사마륭은 벽우진을 주시하면서 주위를 재빠르게 훑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시간을 버는 동안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백융과 천성대의 조장이 마치 입을 맞춘 듯이 연이어 전음을 보내왔다.
벽우진을 막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희생하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 둘의 말에 사마륭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두 사람의 말이 맞았으나 그렇다고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서였다.
덜컹.
“전음으로 희생하니 마니 떠드는 거 같은데, 고민할 필요 없어. 이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는 녀석은 없으니까.”
바닥에 놓인 세 개의 목궤가 동시에 열렸다.
그리고 서른두 자루의 철검이 떠올랐다.
길이가 각기 다르지만 너무나 잘 손질된 철검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공격해라!”
그것을 본 백융이 소리쳤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어서였다.
파바바밧!
그리고 그건 천성대도 마찬가지였다.
서른두 자루의 철검이 하늘 높이 떠오르자 천성대는 곧바로 벽우진을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든 사마륭과 사마척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얼굴에 하나같이 결연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눈물겹네.”
자기들을 희생해서라도 두 사람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기색이 완연한 그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실소를 흘렸다.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 것 같아서였다.
벽우진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쌔애애액!
그걸 증명하겠다는 듯이 일제히 떠오른 서른두 자루의 검들이 맹렬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졌던 것이다.
“마, 막아야···!”
“커헉!”
별다른 기운 하나 서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철검이었지만 그걸 제대로 막아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최절정고수인 백융조차도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펼쳤음에도 단번에 가슴을 꿰뚫렸다.
“쿨럭!”
순식간에 호신강기를 꿰뚫고서 가슴을 관통한 공격에 백융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기운도 서리지 않은 평범한 철검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줄은 몰라서였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죽은 자가 없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이들은 많았지만 놀랍게도 즉사한 이는 없었다.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울지언정 죽은 이는 전무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백융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네놈들은 쉽게 죽을 자격이 없다. 더욱이 내 앞에서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천성대 전원을 무력화시킨 벽우진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백융과 천성대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사마륭과 사마척은 어느새 수십 장 이상 도망친 상태였다.
그러나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죽어라 말을 타고 있는 사마륭을 보는 벽우진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다급함도 서려 있지 않았다.
대신 피를 잔뜩 머금은 서른두 자루의 검들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피, 피하십시오!”
그것을 본 백융이 대경하며 소리쳤다.
핏물을 쏟으면서도 내공을 담아 간절하게 소리쳤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목소리는 사마륭에게 닿지 못했다.
이미 거리가 상당히 벌어지기도 했고, 상처로 인해 내공의 운용이 원활하지 못했기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해서였다.
푸푸푹!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던 사마륭이 꼴사납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철검에 꿰뚫린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광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았다.
“으윽!”
한편 낙마한 사마륭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한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더구나 자신을 위해 수하들 전부가 희생했기에 더욱더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툭.
그런데 그때 그의 시선에 낯선 발이 들어왔다.
검신을 밟고 있는 두 발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동공에 박혀들었던 것이다.
“어딜 그렇게 가시나. 아직 우리는 나눠야 할 말들이 많잖아? 아니면 이번에는 아들을 희생시킬 건가?”
“커컥!”
< 제 60장. 혈채의 무게.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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