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9장. 드디어 재회. -03 >
벽우진의 시선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향했다.
진군하는 철갑기마대와 달리 사마륭을 위시로 한 사마세가의 병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심성이 극도로 높아졌는지, 아니면 혼전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사마륭은 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 도망치겠다, 이거지?”
그 모습에 벽우진이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사마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있어서였다.
“끄으윽!”
“지독한 새끼! 마지막까지 내 앞길을 이렇게나 가로 막다니!”
벽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꼬치구이처럼 전신에 십여 개의 창이 박힌 채로 주저앉아 있는 혈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력을 폭발해 내공은 회복했을지 모르나 육신은 이미 진즉에 망가진 상태이기에 철사자와 철갑기마대의 협공에 결국 쓰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신음을 흘리는 것과 달리 혈사자의 안광은 여전히 부리부리했다.
마치 부상만 없었다면 철사자를 오체분시 했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병신. 난 너와 달라.”
“후후후!”
철사자의 비아냥거림에도 혈사자는 웃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에게는 보였던 것이다.
자기보다 더 비참할 철사자의 죽음이 말이다.
서걱.
철사자의 두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그토록 그의 앞길을 막고 방해하던 혈사자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베어내서였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육사자 중 최후의 생존자는 그라는 소리였다.
“크아아아!”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철사자가 포효했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엄청난 희열과 정복감에 몸을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는 일렀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주군의 복수를 해야 한다!”
혈사자의 목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전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중원무림과 대치하던 혈사자군단이 방향을 틀어 철사자와 철기대에로 향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싸우던 무인들은 물론이고 전선을 지휘하던 제갈현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멈춰라!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다!”
하지만 철사자와 철기대는 놀라지 않았다.
혈사자를 노린 순간부터 상황이 이리 될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진영을 유지했다.
더불어 철사자가 웅혼한 공력을 담아 소리쳤다.
“닥쳐라!”
“기회주의자 따위에게 들을 말 없다!”
“목이나 내밀어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 나는 불필요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다 같은 대막의 전사들이 아닌가!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중원에서 온 놈들이다!”
철사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혈사자의 휘하에 속해 있던 이들이었지만 크게 보면 모두 다 대막의 전사들이었다.
앞으로 그가 다스려야 할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철사자는 굳이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주군의 복수를!”
하지만 분노한 혈사자군단에게 철사자의 회유책은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말을 한들 이미 눈이 돌아간 혈사자군단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듣고 싶지 않았고.
혈사자가 죽었다고 해서 철사자의 아래로 들어가려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끄응!”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리는 혈사자군단의 모습에 철사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모자랄 판국에 지극히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혈사자군단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누가 봐도 이미 대세는 기울었는데 말이다.
“멍청한 것들.”
악귀처럼 달려오는 혈사자군단을 응시하며 철사자가 혀를 찼다.
결국 싸워야 함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혈사자군단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처리하겠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예.”
시체가 되어버린 부대주들을 대신해 백인대장들이 절도 있게 대답한 후 말을 몰았다.
혈사자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철기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원무림의 세력들을 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파전이 되었지만 결국 가장 큰 적은 중원무림의 세력이었다.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군.”
“······.”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철기대를 일별한 철사자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일생의 대적이라 할 수 있는 혈사자의 목을 직접 베었기에 한껏 고양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은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사마륭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리 악연이라지만 날 너무 무시하는 거 같은데.”
대답은커녕 시선도 주지 않는 벽우진의 모습에 철사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얼굴로 창을 휘둘렀던 것이다.
“무시할 만 하니까.”
“뭐라고!”
보지도 않고 옆으로 반 보만 살짝 움직여서 창강을 피해내는 벽우진의 모습에 철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패선이 대단한 고수라고 하나 혈사자와 격전을 치른 뒤였다.
그것도 지형지물이 바뀔 정도로 격렬하게 말이다.
한데 시간을 벌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을 무시하자 철사자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이왕이면 같이 내려오지 그랬어. 그러면 내가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아, 전력에 큰 도움이 안 되서 그런가? 아니면 대외적인 시선 때문에?”
“스스로 시간을 단축하는구나!”
벽우진의 말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철사자도 자기 할 말만 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철사자가 자신을 쉽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혈사자와의 전투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텐데.”
“네놈을 상대할 여력은 충분하다!”
“그래? 그럼 나는 보내주고 다른 사람이랑 붙어 보는 건 어때? 소림무제랑 제왕검도 이곳에 와 있는데.”
“너 말고는 관심 없다!”
부웅! 부우웅!
묵직한 파공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철마 위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움직임이 굉장했다.
말과 일심동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거리가 너무 멀어. 따라잡지 못할 거리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저 놈에게 유리한 장소라는 거지. 게다가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놓는 법이고.’
은밀하게 대막으로 넘어가 복수를 준비한 사마륭이었다.
그런 녀석이 아무 준비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의 거리도 도망칠 시간을 다 계산해서 정했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제갈세가만큼은 아니지만 사마세가 역시 기문진법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생각이냐!”
쩌저적! 쩌적!
무지막지한 강격이 연이어 대지를 갈랐다.
태산조차 쪼개버릴 것 같은 위력의 참격이 연거푸 펼쳐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네놈이 인질로서의 효용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아압!”
호쾌하게 참격을 날리던 철사자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벽우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던 것이다.
‘단숨에 두 쪽을 내주마!’
철사자의 두 눈에는 자신감이 짙게 서려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패선이라도 혈사자와의 혈전을 치렀기에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쩌어엉!
충돌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검과 창이 격돌한 것이다.
그런데 공격당한 것은 벽우진인데 되레 철사자가 튕겨졌다.
벽우진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에 반에 철사자가 타고 있던 철마는 뒷걸음질쳤던 것이다.
“거참 드럽게 말 많네. 그냥 창이나 휘두르면 될 것을.”
쩌억!
철마의 네 다리에서 피가 솟구치며 주저앉았다.
벽우진의 무형강기가 부지불식간에 쓸고 지나간 결과였다.
푸히히힝!
뒤늦게 오는 고통에 철마가 발광을 하며 울부짖었지만 철사자는 애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바랐던 대로 벽우진이 그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보여서였다.
키이이잉!
다시 한 번 날아드는 무형강기에 철사자 역시 진기를 일으켰다.
똑같이 무형강기로 벽우진의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태연한 얼굴의 벽우진과 달리 철사자의 안면은 시간이 갈수록 굳어져가고 있었다.
“차합!”
그 차이를 느낀 철사자가 기합성을 토해내며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창격으로 벽우진의 무형강기를 분쇄하며 쇄도할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든 틈으로 철사자는 계속 접근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간격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직도 이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지?’
철사자의 두 눈에 질린 기색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당연히 지쳐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혈사자와 혈투를 벌인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그걸 써야 하나.’
좀처럼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벽우진에게 접근하며 철사자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 역시도 무형강기를 극도로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에게서 터져 나오는 중압감은 점차 묵직해지고 있었다.
공력의 양도 양이지만 밀도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 철사자가 애병을 던졌다.
쑤아아앙!
마치 작살을 던지듯 힘차게 던진 창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철사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쌍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제자들이 하나의 무구에 고집하는 것과 달리 그는 다양한 병장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것도 하나같이 높은 수준으로 말이다.
따아앙!
회전력이 가미된 창이 벽우진의 느릿한 일검에 무기력하게 허공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회전하는 창이 훨씬 더 강력해 보였음에도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도 철사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쌍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쑤아아앙!
동시에 날린 참격이 십(十)자 형태로 벼락같이 뻗어나갔다.
그런데 철사자의 공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허공으로 무기력하게 치솟았던 창이 어느새 궤적을 돌려 벽우진의 정수리를 노리고서 떨어져 내렸다.
서릿발 같은 창강을 줄기줄기 내뿜으면서 말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철사자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지금 이 순간 승부수를 띄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콰콰콰쾅!
두 줄기의 거대한 검강과 낙뢰처럼 떨어지던 창이 벽우진과 충돌했다.
정확하게는 벽우진의 전신에서 솟구친 호신강기와 부딪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흑사자는 들고 있던 쌍검도 던졌다.
창에 이어 두 자루 검도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조종하는 것이었다.
쿠르르릉!
이기어창, 이기어검에 이어 철사자는 쌍권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오로지 벽우진의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흐아아압!”
세 자루의 병기와 두 주먹으로 강환(罡環)까지 펼치자 철사자의 얼굴 가득 실핏줄이 튀어나왔다
극한에 가까운 내공 운용에 뇌가 터질 듯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철사자는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가 아니고서는 벽우진을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콰콰콰쾅!
창과 검이 허공과 대지를 구분하지 않고 찢어발겼다.
거기에 강환의 폭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넘어 아예 때려 부숴버리는 공격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이다!’
끊임없이 강환을 쏟아붓던 철사자가 해쓱해진 얼굴로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화룡점정을 찍기 위한 마지막 작업을 위해서였다.
스윽.
이윽고 품속에 들어갔던 철사자의 손이 밖으로 나왔다.
칙칙한 빛이 감도는 두 개의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을 들고서 말이다.
“끝이다.”
음흉한 얼굴로 철사자가 두 개의 구슬을 힘껏 던졌다.
벽우진이 서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에 정확히 던졌던 것이다.
꾸아아앙!
구슬 두 개가 먼지구름 속으로 파고들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리자 싸우던 혈사자군단과 철기대가 순간적으로 전투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폭발의 충격과 규모가 엄청났던 것이다.
< 제 59장. 드디어 재회.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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