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87화 (187/325)

< 제 59장. 드디어 재회. -01 >

잔잔한 먼지구름과 함께 수십 개의 깃발이 펄럭였다.

하지만 그 중 벽우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선두의 거대한 깃발이었다.

핏빛 사자가 포효하는 문양을 수놓은 깃발이었는데 곳곳에 짙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마치 핏자국이 마른 것처럼 말이다.

“수좌라 이건가. 확실히 기세가 다른데.”

“정련되어 있는 투지도 그렇고 움직임도 잘 훈련된 병사 같습니다.”

벽우진의 시선이 깃발에 쏠려 있을 때 당민호와 제갈현은 오열을 맞추고서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혈사자군단(血獅子軍團)을 훑고 있었다.

지금껏 상대한 독전단과 음양환희대, 흑풍귀살대도 상당한 전력이었지만 눈앞의 혈사자군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전체적으로 내뿜는 존재감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무인이라기보다는 확실히 병사 같은 느낌입니다.”

“아미타불.”

선두의 혈사자와 함께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일정한 속도로 진군해 오는 혈사자군단의 모습에 남궁진과 법무도 얼굴을 굳혔다.

지금까지 쉬운 싸움은 없었지만 오늘의 전투는 유독 힘겨울 것 같아서였다.

특히 수적으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기에 다들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제 두 개 남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세 개지.”

“아, 사왕성주.”

벽우진의 뒤쪽에 자리 잡은 진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백의 말에 사왕성주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

제아무리 대막의 절대자라 불리는 사왕성주라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팡팡!

오히려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부딪치며 투지를 빛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호법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준비하자고.”

“예.”

당민호의 말에 제갈현이 대답했다.

그러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천당가와 남궁세가가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독전단과 음양환희대와 격돌했을 때처럼 똑같은 진영을 구축했던 것이다.

‘중군의 활약이 중요하다.’

제갈현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제된 투기만 봐도 혈사자군단이 얼마나 잘 훈련된 전사들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개개인의 무장 역시 독전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문에 공동파와 이번에 합류한 개방도들의 지원이 아주 중요했다.

푸르릉! 푸릉!

제갈현이 혈사자군단을 면밀히 살피고 있을 때 선두에서 병력을 이끌던 혈사자가 말을 몰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진군을 멈추고서 홀로 벽우진을 향해 다가왔던 것이다.

그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저벅저벅.

그렇기에 벽우진은 늘 그렇듯이 뒷짐을 지고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데 그 모습에 혈사자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휘적휘적 걸어오는 모양새가 마치 자신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같아서였다.

‘패선이라 이건가.’

혈사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과연 본산이 공격당했다고 곧장 대막으로 달려온 위인다워서였다.

턱.

거기까지 생각한 혈사자는 말에서 내렸다.

마상전투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였지만 상대는 육사자 넷을 도륙한 고수였다.

심지어 독사자와 염사자가 협공했음에도 어쩌지 못한 강자였기에 혈사자는 애마를 돌려보냈다.

이기더라도 애마를 잃는다면 손해라고 생각해서였다.

“혼자 왔다는 것은 할 말이 있어서겠지?”

“맞다.”

“그런데 내 손에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봐?”

“싸우더라도 비겁하게 기습을 가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리 패선이라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명문대파의 장문인이지 않나.”

담담한 얼굴로 말을 잇는 혈사자의 모습에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게 일부러 이리 말하는 것을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복수하러 온 내가 그런 것에 연연할 거라 생각했나? 만약 그렇다면 너무 순진한 성격인데.”

“싸워도 상관없다. 적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나를 상대로 말이지?”

벽우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그 서늘한 시선에도 혈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직접 대면해 보니 벽우진이 얼마나 강한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왕성주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싸움과 전쟁은 다른 법이지.”

“의외인데. 난 당연히 혼자 덤벼들 줄 알았는데.”

“무모함과 자만을 아는 성격이라. 물론 이렇게 대하는 상대는 당신이 두 번째지만.”

혈사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서렸다.

아직 진짜 할 말은 꺼내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성주님을 제외하고는 당신이 처음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비아냥거리는 벽우진의 말에도 혈사자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괴팍하다는 성격은 이미 대막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였다.

그리고 벽우진 정도의 실력자면 이렇게 막나가도 괜찮았다.

“제안?”

“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떤가?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굳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또한 사마륭 역시 당신에게 건네주겠다. 사마세가의 일족들 전부 다.”

“허허허허.”

벽우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사왕성의 이인자라 할 있는 혈사자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혈사자는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이 진중한 얼굴로 벽우진을 직시했다.

“어차피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사마륭 아닌가? 여기까지 온 이유도 사마륭 때문이고.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싸울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맞아. 내가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사마륭과 사마세가 때문이지. 그 놈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벌어졌으니까. 근데 그렇게 하면 네가 얻는 게 없을 텐데?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려면 내 목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후계자 자리는 솔직히 필요 없다. 지금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 후계자나 마찬가지니까. 당신 덕분에 경쟁자들이 대부분 정리되기도 했고. 내가 원하는 건 후계자 자리가 아니라 왕좌다.”

“호오.”

벽우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야 혈사자가 그리는 큰 그림을 알 수 있어서였다.

“당신과 함께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막의 왕좌를 차지하는 게.”

“사마륭과 사마세가를 줄 테니 도와 달라?”

“그렇다.”

벽우진은 왜 혈사자가 혼자 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더불어 혈사자가 알려진 것보다 더 주도면밀하고 영악한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알려진 게 다가 아니라는 건가.’

벽우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몰라서였다.

“그쪽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산적으로 생각한다면, 맞아. 굳이 서로 피를 볼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비록 사마륭에게 이용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사왕성 역시 노리는 바가 있었을 테니까 본 파를 공격했겠지. 예를 들면 사마세가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중원을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

혈사자가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정확히 사왕성주의 속내를 꿰뚫어봐서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딸을 바쳤다고 해도 사왕성주 쯤 되는 인물이 아무 이유 없이 병력을 보낼 리가 없지. 더구나 차대 성주 자리를 걸고서 말이야. 안 그런가?”

“거절인가?”

“네놈들의 손을 잡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승천을 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 게 분명하거든. 난 그 꼴은 못 본다. 만약 우리 애들을 되살려낼 수 있다면, 원래대로 돌려낼 수 있다면 받아들이지.”

“협상 결렬이로군.”

혈사자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애초부터 벽우진은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번 말로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끓어오르는 혈사자의 기도에도 벽우진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 놈도 야망, 저 놈도 야망인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이도 적지 않은 놈들이 뭘 그렇게 욕심이 많나 싶어서였다.

정작 그가 바라는 것은 소소하게 곤륜파를 재건하는 것뿐인데.

지금껏 벽우진은 단 한 번도 그 이상의 야망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 하나 있군. 원한을 달래주는 것.’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벽우진의 눈동자는 시종일관 서늘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듯해 보였어도 그는 늘 죽어간 속가제자들을 생각했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전까지는 단 한 시도 잊지 않을 것이었다.

복수를 해도 마찬가지고.

“그게 살아가는 이유니까.”

파아앙!

대답과 함께 혈사자가 등에 메고 있던 거패도를 벼락 같이 뽑아들고서 휘둘렀다.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신력이 있는 모양인지 거패도를 휘두르는 자세가 호쾌하기 그지없었다.

쩌저저적!

심지어 내외공의 완벽한 일체를 이룬 모양인지 도신에 별다른 기운이 서리지 않은 듯해 보였는데도 벽우진이 서 있던 자리가 깊게 파였다.

무려 십 장이 넘는 도흔이 새겨졌던 것이다.

“하압!”

혈사자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기습과도 같은 공격이었으나 그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 일격으로 벽우진에게 일격을 먹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혈사자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고서 공력을 전부 일으켰다.

‘내가 가진 걸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거패도를 양손으로 쥔 혈사자가 형형한 안광을 토해냈다.

자신이 열세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초반부터 전심전력을 다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우르르릉!

막대한 진기가 단전에서 솟구쳐 빠르게 전신혈맥으로 뻗어나갔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주변에서 흙먼지가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공력에 대기마저 일그러졌던 것이다.

‘방심한 지금 결판을 내야 한다!’

두두두두!

미리 말해둔 대로 자신의 일격이 뿌려짐과 동시에 혈사자군단이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오로지 벽우진에게만 향해 있었다.

사왕성주라 생각하고 모든 진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콰아앙! 쾅!

이윽고 그가 평생 동안 고련한, 대막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기인 파천구도식(破天九刀式)이 펼쳐졌다.

하늘을 깨부순다는 이름처럼 혈사자의 거패도는 대지를 찢어발겼다.

그러나 벽우진을 짓뭉갤 듯이 뻗어나가는 참격들 중에 벽우진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흐읍!”

진짜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나가는 참격에 혈사자가 이를 악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나는 차이에 입맛이 썼다.

사왕성주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열등감과 패배감에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이었다.

‘좀 더 할 수 있다!’

세상에 강자는 즐비했다.

천재라 불리는 그였지만 그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늘 강자와 천재들이 이기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방심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하수가 고수를 이기는 것도 가능했다.

쑤아아앙!

눈부신 속도로 4연격이 펼쳐졌다.

동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시무시한 참격이 벽우진의 전방과 좌우, 그리고 머리 위를 노리고서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혈사자의 공격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우우우웅!

아직 네 개의 참격이 벽우진에게 닿지도 않았건만 혈사자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앞서 날린 참격은 말 그대로 견제용이었다.

벽우진이 움직일 공간을 제한하는.

진짜는 지금이었다.

‘움직일 공간을 봉쇄하고 때려잡는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경신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혈사자는 공간부터 없앨 생각이었다.

거패도의 도신을 따라 열댓 개의 영롱한 구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강의 끝이라고 불리는 도환(刀環)이 생성된 것이었다.

“가라!”

하나하나가 작은 언덕 정도는 가뿐하게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머금은 도환들이 벽우진을 향해 날아갔다.

막 4연격을 피해낸 벽우진에게 말이다.

< 제 59장. 드디어 재회.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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