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8장. 피해자는 우리들이라니까? -02 >
“입이 걸걸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입만 걸까. 손은 더 매섭지.”
“글쎄.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흑사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도발했다.
미리 전달받은 용모파기대로 벽우진의 외모는 이십대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젊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도 역시 상당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대단치 않았다.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해볼 만한 정도라고나 할까.
‘더구나 함께 하는 이들은 고작 열여덟 명뿐이지.’
흑사자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너무나 기꺼웠던 것이다.
더불어 일파의 수장으로서 벽우진이 실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는 중이라고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자부심과 자만심은 엄연히 다른 법인데 말이지.’
흑사자가 조소를 머금으며 벽우진을 쳐다봤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비웃는 기색이 완연했다.
“다들 너와 같은 생각을 하지. 나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후우우웅!
벽우진의 기세가 달라졌다.
말 그대로 한순간에 돌변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뒷짐을 지고 있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이 들려 있었다.
“공격해라!”
그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흑사자가 본능적으로 소리치며 자신의 쌍검을 뽑았다.
벽우진의 손에 검이 들린 순간 이상하게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시에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흑풍귀살대는 충실히 따랐다.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이 날개를 펼치는 새처럼 좌우로 크게 벌어지며 순식간에 벽우진 일행을 포위해갔던 것이다.
“흥.”
하지만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에도 벽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흑풍귀살대라는 부대명처럼 하나같이 동일한 검은색 피풍의를 입고 있어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애들 장난처럼 비춰질 뿐이었다.
쑤아아앙!
칠백 명이 넘는 인원들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삽시간에 진형을 구축해서 덮쳐왔지만 벽우진은 여유로웠다.
흑풍귀살대가 아무리 빠른 몸놀림을 보여준다고 한들 그의 검보다는 느렸다.
이윽고 벽우진의 무상검에서 솟구친 무지막지한 크기의 검강이 마치 무를 썰 듯이 흑풍귀살대를 쓸어버렸다.
“크아악!”
“컥!”
병장기건 호신강기건 가리지 않고 그대로 썰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강에 선두에서 달려들던 흑풍귀살대원들이 양분되며 허물어졌다.
말도 안 되는 위력에 반항은 해보지도 못한 채 절명했던 것이다.
“이 놈!”
그 모습에 흑사자가 격분했다.
평생 동안 모으고 키운 수하들이 허망하게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자 눈이 돌아갔던 것이다.
그에게는 수하이면서도 형제나 마찬가지인 이들이 바로 흑풍귀살대원들이었기에 흑사자가 살광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쌍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벽우진 못지않게 거대한 검강이 솟구치며 무상검을 연달아 때렸다.
하지만 벽우진은 그 모습에 오히려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 수하들은 소중하고 남의 제자들은 버러지라는 거냐? 어이가 없군.”
“닥쳐라!”
“아니면 월사자와 은월단이 죽인 것이니 너는 상관없다는 건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빠른 검격에도 벽우진은 비아냥거렸다.
분노하고 화를 내야 하는 건 흑사자 쪽이 아닌 그였다.
가만히 있던 그를 공격하고 속가제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건 사왕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마냥 격노하는 흑사자의 모습에 벽우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끄럽다!”
“하긴. 네놈들에게는 후계자 자리가 중요하지 다른 것들은 관심 없겠지. 누가 죽던지 말이야. 근데 그거 아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걸.”
“큭!”
흑사자가 뒤로 거칠게 밀려났다.
벽우진이 날린 참격을 버티지 못하고 땅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미끄러졌던 것이다.
동시에 흑사자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모습에 놀란 것이었다.
“대주님!”
그때 흑사자의 양쪽에서 두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두 명의 백인대장이 그가 밀린 틈을 타 벽우진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이윽고 창과 낭아봉이 맹렬한 기세를 토해내며 벽우진의 머리와 단전을 노렸다.
“어딜 감히!”
그러나 두 백인대장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벽우진에게 공격이 닿기 직전 한 자루의 검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두 사람의 공격을 끌어당겼던 것이다.
꽈앙!
굉음과 함께 두 명의 백인대장이 튕겨져 날아갔다.
세 개의 기운이 부딪치자 자연스레 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두 백인대장의 위기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폭발의 반동으로 날아가는 두 명을 향해 설백이 부리부리한 안광을 토해내며 뒤쫓았다.
“운이 좋았군.”
“거만 떨지 마라!”
-저희가 보조하겠습니다!
속절없이 튕겨져 나갔던 흑사자가 이를 드러내며 재차 달려들었다.
그런 그위 뒤로 3중대와 4중대의 백인대장이 합류했다.
독사자와 염사자의 협공에도 벽우진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합공이었다.
흑사자 역시 받아들인 부분이기도 하고.
쌔애애액!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축된 삼재진의 진형에서 네 개의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선두의 흑사자를 위시로 두 명의 백인대장 역시 전력을 다해 도강을 펼치며 벽우진에게 휘둘렀다.
그런데 흑사자보다 백인대장들의 도강이 먼저 벽우진에게 쇄도했다.
확실한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두 사람의 공격이 보다 빠르게 벽우진에게 닿았다.
카아앙!
두 백인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공격을 벽우진이 무상검을 이용해 막아냈던 것이다.
그 말은 즉 현재 벽우진은 왼손 말고는 흑사자의 쌍검을 막아낼 방도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겼다!’
‘패선을 잡았다!’
둘은 내공을 가일층 끌어 올리며 몸을 밀어붙였다.
벽우진이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수하들이 만든 틈을 타고서 흑사자의 쌍검이 파고들었다.
정확히 심장과 미간을 노리고서 눈부신 쾌검을 선보였던 것이다.
‘피할 수 없다.’
섬광처럼 뿌려지는 두 줄기 검격에 흑사자가 눈을 빛냈다.
제아무리 패선이라도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합이 맞아떨어진 공격이었기에 피할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벽우진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고.
‘오만의 끝은 죽음뿐이지.’
흑사자는 확신에 찬 눈으로 벽우진을 직시했다.
곧 죽어갈 벽우진의 모습을 모조리 두 눈에 담겠다는 듯이 말이다.
퍼석.
근데 그때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돌이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흑사자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양옆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무슨?!”
옆에서 덮쳐오는 핏방울들과 짙은 혈향에 흑사자의 동공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놀라고 있을 새가 없었다.
백인대장이 가로막았던 수수한 철검이 느닷없이 그의 앞에 나타났기에 다급히 쌍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쩌어어엉!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과 함께 흑사자가 다시 한 번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막지 않았다면 벽우진의 심장과 머리를 꿰뚫었겠지만 그 역시 그에 준하는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때문에 그는 밀려남과 동시에 좌우부터 살폈다.
“······!”
그리고 흑사자는 볼 수 있었다.
육편만 남은 두 부하들의 모습을 말이다.
그마저도 머리가 남아 있었기에 알아봤지 만약 머리가 없었다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터였다.
“빠져나가는 데는 일가견이 있군. 이번에는 목을 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부들부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흑사자가 악귀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백인대장 둘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자 극도로 흥분한 것이다.
“죽여 버리겠다!”
눈이 벌게진 흑사자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폭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벽우진은 오히려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 악당은 너희들이야. 난 피해자라고.”
“닥쳐라!”
흑사자의 쌍검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극성에 이른 쾌검술이 벽우진을 난도질할 듯이 펼쳐졌던 것이다.
콰콰콰쾅!
이윽고 검강을 잔뜩 머금은 흑사자의 쌍검이 벽우진이 서 있던 공간을 사정없이 갈랐다.
말 그대로 찢어발기듯이 공간 자체를 수없이 갈라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대지가 수십,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다.
“흐으읍!”
쉬지 않고 울분을 토해내던 흑사자가 이내 공격을 멈추고서 숨을 골랐다.
짧은 시간에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금세 지친 것이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여전히 강렬한 안광을 뿌리며 벽우진이 서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분명 손맛이 있었어.’
심호흡을 하면서 빠르게 공력을 진정시키며 흑사자가 눈을 빛냈다.
호신강기를 때린 게 아닌 무언가를 베는 감촉이 분명히 있었기에 흑사자는 내심 기대했다.
치명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거라고 말이다.
‘근데 왜 반격을 안 한 거지?’
흑사자의 두 눈에 언뜻 의문이 떠올랐다.
단순히 내공만으로 백인대장 둘을 터트려죽일 정도의 강자가 벽우진이었다.
그렇기에 흥분하기는 했지만 전심전력을 다해서 공격한 것이고.
하지만 벽우진의 무경을 생각하면 반격이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휘이이잉.
흑사자가 의심을 갖는 사이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주변을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흑사자가 눈을 빛내며 벽우진이 서 있던 곳을 주시했다.
푹.
한데 그때 그의 아랫배에서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느닷없이 등 뒤에서부터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다.
동시에 핏물이 식도를 타고 역류했다.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거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이들도 있고, 곧 따라갈 놈도 세 놈이나 있으니까.”
“패, 패서언-!”
“부르짖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흑사자가 몸을 돌리며 울부짖었다.
뒤늦게 자신이 벤 감촉이 두 백인대장의 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피눈물을 흘리며 포효했던 것이다.
웅웅웅웅!
동시에 그의 쌍검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단전이 꿰뚫렸지만 그렇다고 평생 동안 쌓아온 공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밑 빠진 독의 물처럼 빠른 속도로 새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력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기에 흑사자가 몸을 쌍검을 역수로 쥐고서 뒤를 향해 찔렀다.
그러면서 단전의 공력을 폭발시켰다.
“같이 죽자!”
흑사자의 두 눈에 지독한 독기가 서린 순간 그의 육신이 폭발했다.
어차피 단전을 잃은 이상 사왕성의 후계자 자리는 물 건너 간 상태였다.
그러니 수하들의 원수도 갚을 겸 그는 동귀어진을 시도했다.
적어도 벽우진만큼은 데려가겠다는 뜻이었다.
“대, 대주님!”
그 모습에 부대주가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꽈아아앙!
흑사자의 몸이 빛에 휩싸이기 무섭게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한 사람의 폭렬공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부대주를 비롯한 흑풍귀살대는 놀라기보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허무하게 흑사자가 죽을 줄은 몰라서였다.
“대, 대주님···!”
“크윽!”
“단 한 놈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벽우진의 죽음은 흑풍귀살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흑사자뿐이었다.
흑사자가 있기에 그들이 있는 것인데 하나뿐인 주군이 죽자 흑풍귀살대에게서 끈적끈적한 살기가 폭사되며 주변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이놈들도 정신 못 차리네. 피해자는 우리들이라니까?”
< 제 58장. 피해자는 우리들이라니까?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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