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8장. 피해자는 우리들이라니까? -01 >
지혈은 했으나 핏자국까지는 닦아내지 못한 독사자가 벽우진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다들 헛웃음을 흘렸다.
생포된 주제에 너무나 당당해서였다.
심지어 반대편에 있던 염사자 역시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독사자를 쳐다봤다.
“그 당당함이 어떻게 나온 건지 궁금한데.”
“날 죽이면 너는 물론이고 곤륜파 전부가 죽을 것이다. 다른 놈들 역시 마찬가지고.”
독사자가 형형한 안광을 뿌리며 말했다.
벽우진을 시작으로 당민호와 제갈현을 차례대로 쳐다봤던 것이다.
“살려줘도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은데?”
사로잡혔음에도 기가 전혀 죽지 않은 독사자를 응시하며 벽우진이 피식 웃었다.
풀어준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약속하지. 지금이라도 날 풀어준다면 복수하지 않겠다. 원한다면 각서라도 쓰겠다.”
“네놈을 어떻게 믿고.”
“우리 부족이 네놈들을 가만 두지···.”
부지불식간에 이마를 꿰뚫은 지풍에 독사자가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벽우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다하기 전에 절명했던 것이다.
“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 자식 혼자만의 생각···.”
퍼석!
독사자에 이어 염사자의 미간에도 구멍이 뚫렸다.
원하는 정보는 거의 다 알아냈기에 미련 없이 죽인 것이었다.
잠시 후 염사자의 두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오라면 오라고 해. 오는 족족 죄다 쓸어버릴 테니까. 한 놈도 남김없이. 오는 건 지들 마음이지만 돌아가는 건 내 허락이 있어야 해.”
“맞습니다.”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청민과 서진후가 맞장구를 치며 따라 나섰다.
“저 녀석 일부러 저런 거야. 자기가 다 책임지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이상 다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당민호가 입을 다셨다.
굳이 벽우진이 모든 걸 다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한다고 한들 사왕성이 곤륜파만 공격할 리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당민호는 후회하지 않았다.
‘무릇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이번 선택으로 사왕성과는 적대관계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문경 역시 마찬가지였고.
곤륜파는 동맹을 맺은 곳이기도 했지만 크게 보면 중원무림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문파였다.
그런 문파가 세외무림에 공격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갓 물리친 지금 시점에서 더더욱 말이다.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지금만큼만 해, 지금만큼만. 지금 하는 것으로도 충분해.”
“그래도 알아낸 것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개방에서 노력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세밀한 정보를 얻기란 힘드니까요.”
“일단 세 마리의 새끼 사자들부터 잡을 준비를 하자고. 어째서 그 놈들이 이곳으로 오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에 맞춰 준비해 보자.”
“예.”
제갈현이 눈을 빛냈다.
의문이 풀렸으니 이제는 제대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첫 번째 대결에서 대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여전히 수적으로 불리한 상태였다.
때문에 철저한 준비는 필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수층은 우리가 더 두텁다는 것 정도인가.’
제갈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염사자가 말해준 내용들을 하나둘 곱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아무리 공포심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고 하나 염사자의 소속은 사왕성이었고, 일부러 거짓 정보를 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도 백지상태인 것보다는 나으니까.’
제갈현이 당민호와 함께 천막을 나서며 개왕을 떠올렸다.
확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개방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얕은 구릉에 수백 명의 인원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둠이 사위에 내려앉아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검은색 피풍의를 입은 채로 수많은 장정들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그 중 중앙에 자리 잡은 한 명이 바짝 익은 양고기의 뒷다리를 뜯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앞에 앉은 수하에게 향해 있었다.
“두 놈이 다 붙잡혔다고?”
“예. 반항다운 반항을 하지 못한 채 붙잡혔답니다. 독전단과 음양환희대는 반 이상이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쯧쯧! 병신 같은 것들.”
어둠과 동화되려는 듯이 새카만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있던 흑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존심도 버리고 힘을 합쳤음에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생포되었다고 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월사자야 숨는 것 밖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놈이었기에 붙잡혔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친위대를 이끌고 정면으로 격돌했음에도 패배했다고 하자 흑사자는 헛웃음만 나왔다.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집결해 있는 숫자도 상당하지만 고수층도 의외로 탄탄합니다.”
중원무림을 너무 경시하는 것 같은 흑사자의 모습에 흑풍귀살대(黑風鬼殺隊)에서 참모 역할을 맡고 있는 부대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인 흑사자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방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숫자가 얼마나 되는데?”
처음에 흑풍귀살대가 오십 명 남짓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부대주였기에 흑사자도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수많은 혈로를 함께 견디고 가로 질렀던 전우이자 동료였기에 마냥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전단과 음양환희대와의 전투로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백 명 남짓입니다.”
“우리보다 적은데?”
“독사자와 염사자 역시 그리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 호되게 당했지요.”
“고수층이 두텁다는 말이 이 뜻인가?”
“맞습니다.”
흑사자가 거칠게 양고기를 뜯었다.
하지만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흐음.”
사제들이라 할 수 있는 독사자나 염사자는 엄밀히 말해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각자 독특한 무경을 이루기는 했으나 딱 그뿐이었다.
일대일로는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전단과 음양환희대가 함께라면 말이 달라졌다.
“살아남은 이들이 전부 다 사로잡혔기에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으나 곤륜파를 위시로 한 다른 문파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투가 상당히 쉽게 결판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확인된 바에 의하면 소림무제와 제왕검이 함께 있고, 사천당가의 전대 가주인 독황도 같이 있다고 합니다.”
“독사자가 제대로 힘을 못 썼겠군. 장기인 독이 통하지 않았을 테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흑사자가 양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부대주가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건 따로 생각해둔 바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흑사자는 심유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궁리 끝에 두 가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힘을 합치는 것입니다.”
“기각.”
흑사자가 부연설명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기각했다.
“역시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말한 거지?”
“혹시나 해서요. 사람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바뀔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왕이면 피해를 적게 보는 게 좋으니까요.”
“그래도 합치는 건 싫다.”
흑사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부하들을 잃기 싫어도 혈사자나 철사자와 협공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세력을 합쳤다가 자신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출혈이 있더라도 자기 혼자서 패선을 상대하는 게 나았다.
“알겠습니다.”
“두 번째는?”
“주군께서···.”
부대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흑사자의 표정이 돌변해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에 부대주는 물론이고 주위에서 귀를 기울이던 백인대장들 역시 번개 같이 움직이며 주변을 경계했다.
이미 조별로 순찰을 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는군.”
“누가 말입니까?”
“패선.”
“암습인 겁니까?”
부대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패선 정도의 고수가 암살을 노린다면 상황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순 부대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암습을 노린다고 하기에는 패선이 뿌리는 기세가 너무나 강렬했다.
“그럴 리가. 이렇게 존재감을 풀풀 날리며 암습하는 살수가 있나?”
“···정면대결이군요.”
“후후후! 재미있군.”
자신의 기척을 숨기지 않고서 다가오는 패선의 패기에 흑사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이렇게 먼저 공격해 올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소수로 말이다.
“준비시키겠습니다.”
부대주가 말을 하면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수신호로 흑풍귀살대를 정렬시킨 것이었다.
이윽고 숙영지를 만들던 흑풍귀살대가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취하며 흑사자와 부대주 뒤로 모여 들었다.
저벅저벅.
흑풍귀살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이 멀리서 열아홉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반달의 은은한 월광을 받으며 벽우진을 비롯하여 곤륜파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부대주는 그 모습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멀지 않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보이는 것은 패선을 비롯해서 곤륜파의 인원들뿐이었지만 부대주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보이는 대로 믿는 이가 멍청한 것이었다.
수적으로 열세라고 하나 전쟁 중에 가지고 있는 전력을 사용하지 않을 사령관은 없었다.
더구나 상대측에게는 무림맹이 창설할 때마나 늘 총군사 자리를 꿰차는 제갈세가의 수장이 있었다.
‘그런데 소수정예로 온다고? 말이 안 되지.’
물론 뒤따르는 혈사자와 철사자의 병력이 있기에 어느 정도 전력을 보존시키려는 의도는 있을 터였다.
지금의 전투가 끝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자신들을 쓰러뜨린 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죽은 다음에는 이승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만하구나.’
부대주가 눈을 빛냈다.
곤륜의 패선이 독선적이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아서였다.
아니면 월사자와 독사자, 그리고 염사자를 잡았다는 사실에 도취된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그나 흑사자에게는 나쁠 것 없었다.
‘후계자의 자리는 주군의 것이다.’
기습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놀랐던 부대주였지만 지금은 흥분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패선을 잡는 이가 사왕성주의 후계자가 된다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기도 했다.
“배짱이 두둑하군. 고작 그 인원 가지고 날 찾아온 것을 보면.”
“흥. 떠볼 것 없다. 네놈들이 보고 있는 게 전부니까.”
“떠볼 생각 없었다. 더 있어도 상관없고.”
벽우진의 대답에 흑사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정말로 숨어 있는 병력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전 병력이 달려들어도 그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네깟 놈들이야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과분하지.”
“저 새끼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딴 개소리를!”
벽우진의 말에 흑풍귀살대에서 맹렬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러나 정작 벽우진은 눈 하나 껌뻑이지 않았다.
대신 청민과 서진후를 비롯한 호법들이 서릿발 같은 기도를 토해냈다.
열 명이서 흑풍귀살대 전원의 살기에도 밀리지 않은 살의를 뿜어냈던 것이다.
“개새끼는 네놈들이지. 똥을 쌀 곳과 싸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지 못하니까.”
< 제 58장. 피해자는 우리들이라니까?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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