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83화 (183/325)

< 제 57장. 초전박살. -03 >

염사자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말만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표정은 냉랭했다.

“내게 그런 건 필요 없다. 알고 싶은 건 네 머리에 있는 것들이지.”

“다 말할게요. 저 다 말할 수 있어요. 그 외에 모든 것들도 시키시면 다 할게요. 그러니까···.”

“시끄럽다.”

벽우진은 손가락을 튕긴 후 몸을 돌렸다.

지풍으로 마혈과 아혈을 점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전투는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민호와 소림무제, 제왕검의 활약으로 제갈세가나 공동파가 나설 일이 없었던 것이다.

“거참 이해는 가는데 너무 살벌하네.”

“금쪽같은 속가제자들이지 않았습니까. 재건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받아들인 속가제자들이니까요. 아무래도 정이 깊었을 수밖에 없지요.”

“그건 그런데, 패선도 참 살벌해. 세상에 저 많은 검들을 조종하다니.”

개왕이 기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중원에서는 나름 방귀 깨나 끼고 다니는 고수이지만 좀 전의 광경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벽우진이 보여주는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검선께서도 인정하신 분이니까요.”

“이번 일을 무사히 마무리 지으면 무당산에 가봐야겠어. 어쩌면 이번에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늦기 전에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갈현의 시선이 항복하는 독전단과 음양환희대를 일별하고서 하늘로 향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아직 청명한 빛을 발하는 별 하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검은색 천막 안으로 벽우진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청민과 서진후가 뒤따랐다.

곤륜파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세 사람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오셨습니까?”

“둘 상태는?”

“출혈이 좀 있기는 합니다만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독은?”

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제갈현을 일별한 벽우진이 우측에 결박된 채로 서 있는 독사자를 쳐다봤다.

점혈당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족쇄는 물론이고 양팔에 쇠고랑을 찬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사자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당 어르신께서 직접 확인하셨습니다. 지니고 있는 독 역시 모조리 회수했고요.”

“피나 침 자체가 독인 건 알고 있지?”

“그래서 입마개도 채워놓은 상태입니다.”

제갈현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벽우진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찍 왔네?”

“너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여기에서 고문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제갈가주가 할 거야, 아니면 남궁가주가 할 거야?”

“나.”

“네가?”

천막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온 당민호가 두 눈을 끔뻑였다.

당연히 자신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응. 기술은 없지만 어차피 알아내고자 하는 정보만 발설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리고 현역이 아닌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독 중에는 고문에 유용한 것들도 많아. 꼭 다 죽이는 데에만 쓰이지는 않아.”

현역이 아니라는 말에 당민호가 발끈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고문이라는 게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아. 독도 잘 쓰면 약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맡겨. 이쪽은 아무래도 내가 전문이니까.”

“근데 괜찮나?”

“저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갈현이 벽우진의 시선에 반문했다.

왜 자신에게 묻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명문세가이지 않나. 이런 걸 보기에는 불편할 텐데.”

“괜찮습니다. 전쟁이라는 게 애초에 잔혹하기 그지없는 행위이니까요. 더구나 명분은 저희에게 있지 않습니까. 정당성 또한 마찬가지고요.”

“뭐, 가주가 손을 더럽힐 일은 없으니까.”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자신이 더 묻는 것도 이상했기에 벽우진은 제갈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후에 발을 뗐다.

“진짜 네가 하려고?”

“응.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가능성도 있고.”

벽우진은 입마개를 하고 있어 눈과 코만 보이는 독사자가 아닌 염사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염사자의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역시나 예상대로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서였다.

툭.

“말해.”

지풍으로 아혈을 풀어준 벽우진이 염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염사자는 그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둘이서만 대화하면 안 될까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아, 아니에요! 바로 말할게요!”

싸늘한 벽우진의 말에 염사자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나 기대를 했었지만 역시나 통하지 않는 듯하자 염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인내심은 길지 않아.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왜 저희가 곤륜파를 공격했는지 궁금한 것이죠?”

“맞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가 없거든. 그렇다고 사왕성이 북해빙궁과 동맹관계인 것도 아니고. 만약 같은 편이었다면 북해빙궁이 본 파에 오기 전에 합류했겠지.”

“사마륭이 사왕성에 찾아왔어요.”

염사자가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를 툭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거운 침묵이 천막을 짓눌렀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알게 되자 다들 표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특히 제갈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사마세가였구먼.”

“가문을 정리하고 사왕성을 찾아와서는 성주님께 자기 딸을 바쳤어요. 그 결과가 은월단이고요.”

“까다로운 녀석들이었지.”

벽우진이 이를 갈았다.

교활하게도 낮에 사당 방문객들의 기척을 이용해 곤륜산 내부에 숨어들었기에 벽우진으로서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음살존의 경우 자만심으로 인해 기척을 일찍 잡아낼 수 있었지만 은월단은 달랐다.

악착같이 땅속으로 숨어서 기척을 죽였기에 벽우진으로서도 감지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지둔술을 기가 막히게 펼쳤다며?”

“···그거에 제대로 당했지.”

벽우진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정이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방심이었다.

곤륜산 내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만이 장하삼을 비롯해서 속가제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래서 벽우진은 그 일 이후 단 한시도 방심하지 않았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망각했지. 내가 책임져야 할 이들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은월단이 영악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책임은 벽우진에게 있었다.

안일한 마음가짐이 결국 또 다시 곤륜산에 혈사가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야.’

죽어간 속가제자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벽우진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모습에 염사자가 움찔거렸다.

“혀, 현재 철사자와 함께 이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근데 이상하지 않아? 은월단이 대막을 주름 잡는 살귀들이고 월사자가 육사자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고작 그 정도 전력 가지고 널 노린 게 말이야.”

당민호가 미간을 좁혔다.

비록 헛똑똑이지만 그래도 한때 명석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 사마륭이었다.

제갈세가를 제외한다면 지자로서 꽤나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벽우진을 직접 겪어보기까지 한 이가 사마륭인데 고작 은월단만 데리고 곤륜산에 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끼라고 생각해요. 저희들을 비롯해서 성주님을 이끌어내기 위한. 저도 이제 와서 알게 되었지만요.”

염사자가 이를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마륭의 음모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은월단을 지원받았을 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부터 말이다.

‘혼자서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 수상했어.’

사로잡힌 월사자와 전멸한 은월단과 달리 사마륭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 딴에는 월사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했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모든 게 계획된 것 같았다.

애초부터 사마륭은 월사자만으로는 버겁다는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희박한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월사자가 벽우진을 사로잡아 오면 좋은 일이었고.

“미끼라.”

“딸을 바칠 정도로 악에 바쳤다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세외무림을 끌어 들이는 건.”

의외로 담담한 벽우진과 달리 당민호와 제갈현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두 사람 다 가문을 이끌었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큰 배신감을 느낀 것이었다.

더구나 벽우진이 못되게 괴롭힌 것도 아니었다.

시작은 사마륭이 했었다.

‘그런데 그걸 잊고 자신이 당한 것만 생각한 것이겠지.’

제갈현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방법이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되었고 지나쳐도 너무 많이 지나쳤다.

“육사자를 다 잡으면 사왕성주가 움직이겠군.”

“혼자서 살아남아 대막으로 돌아가겠죠. 월사자 때처럼.”

“여전히 영악하군. 혈사자가 아니라 철사자에게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세력적으로 완성되어 있고, 사왕성 내에서도 지지기반이 가장 탄탄한 만큼 혈사자에게 간다고 한들 중용받기는 힘들 테니까요.”

염사자가 비위를 맞추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둘 토해냈다.

한 번에 모든 걸 말하면 쓸모가 다했다고 죽일 게 분명하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치면서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그 머리를 좋은 일에 사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벽우진과 염사자의 대화를 듣던 당민호가 혀를 찼다.

생각할수록 똑똑한 머리를 중원무림을 위해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겨서였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먼 곳으로 가버린 뒤였다.

“벽 장문인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어도 좋은 일에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개인과 가문의 이득을 위해 사용했겠지요.”

“그럴 테지.”

당민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본 사마륭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흑사자에 대해서 말해 봐. 네가 알고 있는 것 전부 다. 철사자와 혈사자에 대해서도.”

“예. 다 말할게요. 침상 위에서의 잠자리 취향까지 전부 다요!”

염사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와 눈동자에는 교태가 가득했다.

어떻게든 벽우진에게서 점수를 따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세 사자들의 정보는 벽우진을 비롯해서 제갈현의 뇌리에 차곡차곡 남았다.

“읍읍읍!”

물론 모두가 그녀의 배신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점혈당한 독사자가 표독한 눈빛을 사정없이 뿌리며 발광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지만 미약한 신음 정도는 낼 수 있었기에 염사자를 노려보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저 놈 입마개 풀어줘 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염사자가 말하는 내내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는 독사자의 모습에 벽우진이 눈짓했다.

그러자 지금껏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청민이 나섰다.

“아서라. 저 놈은 침도 독이야. 우진이라면 모를까 넌 아직 위험해.”

“다루기 진짜 까다롭네요.”

“독인들의 특징이지. 몸 자체가 살인병기나 마찬가지니까.”

당민호가 히죽 웃으며 입마개를 풀고서 물러났다.

입마개야 그가 풀어줄 수 있지만 점혈은 벽우진이 했기에 해혈도 벽우지만이 할 수 있었다.

“지껄여 봐.”

당민호가 적당한 거리로 물러나자 벽우진이 지풍을 날려 아혈만 해혈했다.

그러나 바로 입을 열지는 못했다.

몇 시진 동안 점혈당해 있었기에 완전히 풀리는데 시간이 제법 필요했던 것이다.

“미친년. 그렇게 꼬리를 살랑거리면서라도 살고 싶은 것이냐.”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런다고 한들 저 놈이 살려줄까?”

“글쎄. 사형보다는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

독사자의 매서운 눈빛에도 염사자는 오히려 당차게 대답했다.

살 수만 있다면 그깟 자존심쯤은 얼마든지 던져버릴 수 있었다.

“모자란 년!”

“둘이 싸우라고 내가 아혈을 풀어준 게 아닌데 말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날 풀어라.”

< 제 57장. 초전박살.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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