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6장. 복수의 서막. -03 >
투구를 쓰고 있는 철사자가 눈을 빛냈다.
어쩌면 이번 전쟁으로 인해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얻을지도 몰랐다.
후계자 자리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을 보낼 수도 있었기에 철사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군. 기분이 더러울 정도로 말이지.’
제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후계자 자리를 두고 싸우게 만든 사왕성주를 떠올리며 철사자가 입맛을 다셨다.
재수 없을 정도로 비열한 인물이지만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또한 실력 역시 두 말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나 이게 자충수가 될 것이오. 사부의 목을 조르는.’
지금은 이렇게 휘둘리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제들 역시 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왕좌를 노리는 것처럼 다른 육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내대장부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른 자리도 아니고 사왕성의 차대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염사자(艶獅子)를 잊은 건 아니겠지? 사매를 잊으면 곤란해.”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뭐, 사매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대단한 역량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말해 다른 사형제들과 비교하면 좀 부족하지. 월사자와 마찬가지로.”
장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맞장구를 쳐도 문제고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되었기에 아예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난감할 때는 차라리 말을 아끼는 게 나았다.
“그걸 가주도 아니까 나한테 온 것 아닌가? 내가 유력 후보 중 하나이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형이 더 나을 텐데. 안정적이고. 또한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지만 세력기반이 가장 탄탄하기도 하고.”
철사자가 떠보듯이 물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자신보다는 혈사자(血獅子)가 유리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괜히 사왕성의 중진들이 혈사자의 세력에 가세한 게 아니었다.
성주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했지만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게 혈사자였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의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낄 겁니다.”
“호오.”
“하지만 철사자께서는 다르지요.”
“확실히 말을 잘해. 그리고 난 기회주의자를 좋아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가주를 믿을 수 없다는 점도 알고 있었으면 좋겠군.”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걸 성주님은 물론이고 철사자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장년인이 머리를 숙였다.
대막으로 향했을 때부터, 사왕성을 찾았을 때부터 그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것을 장년인은 다시 한 번 철사자에게 밝혔다.
“패선과 곤륜파의 멸망말인가?”
“그렇습니다. 전 그 두 가지에 제 전부를 걸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가문을 걸었지요.”
“성주님과는 그 이후의 일도 의논한 것으로 아는데.”
“원하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철사자의 두 눈이 번쩍였다.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하는지 그는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오늘 우리가 나눌 대화가 참 많을 것 같군.”
“밤은 충분히 깁니다.”
“하하하하!”
철사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장년인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휘이이잉!
감숙성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금창(金昌) 인근의 초원에 도착한 벽우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대막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었다.
나무들이 있기는 하지만 수림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공기도 다르군.”
“당연하지. 곤륜산과 비교하면 쓰나. 기련산이라면 모를까 금창은 대막의 모래바람이 날아오는 지역이야.”
주변을 살피는 벽우진의 곁으로 당민호가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두 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자자! 서둘러! 잠은 천막에서 자야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해지기 전에 다 끝내자고!”
벽우진과 당민호의 뒤로 수많은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원을 나눠서 한 무리는 천막을, 다른 무리는 사냥을, 그리고 또 몇 십 명은 주변으로 흩어져 수색 작업을 했다.
은월단이 전멸했다고 하나 그 부족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확실하게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숙영지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지형지물을 확인하는 건 필수였다.
“꽤 많이 모였지?”
“응. 생각했던 것보다.”
“하지만 가장 큰 전력은 바로 본가인 것을 잊으면 안 돼.”
“그거야 잘 알고 있지.”
오랜만에 콧대를 세우며 거들먹거리는 당민호의 모습에 벽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많은 곳들이 모였지만 그 중에서 사천당가와 비교할 곳은 없었다.
독황이라 불리는 당민호가 직접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소가주인 당주혁이 사천당가 최정예 부대라 불리는 흑의대(黑衣隊) 전원을 이끌고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거면 됐어. 곤륜파의 곁에, 아니 네 옆에 나와 본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오늘따라 든든하네.”
“나야 늘 든든했지. 네가 몰랐을 뿐.”
“그런가.”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는 이곳을 향해 서서히 오고 있을 육사자들을 떠올렸다.
대막을 호령하는 맹수들을 말이다.
“근데 소림무제가 직접 올 줄은 몰랐어.”
“소림무제만 왔어? 제왕검도 왔는데.”
“진짜 다들 세외무림에 칼을 갈고 있긴 했나 봐. 사왕성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알리기 무섭게 이리 발 빠르게 모인 것을 보면.”
“그 정도로 크게 데였다는 말이기도 하지.”
“겸사겸사 네 눈치도 보고 말이지?”
벽우진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당민호는 진지했다.
“아닐 거 같아?”
“빚을 지워두려는 것이겠지. 북해빙궁도 남아 있고, 가장 큰 숙적이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한 마교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야.”
“여기 계셨군요.”
두 사람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목소리보다 먼저 지독한 악취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개왕이 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걷는 것도 불편한 사람이 왜 굳이 여기까지 왔어? 장로나 보내지.”
“그래도 방주인데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원래 역마살이 있어서 저는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겸사겸사 후개도 찾아야 하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에 오지 말아야지. 전황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에이. 사왕성주가 오는 것도 아닌데요.”
개왕이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의족이 달려 있는 왼발로 땅을 탕탕 내려찍었다.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되어서 본래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듣자하니 육사자, 아니 이제는 오사자인가. 그 놈들 무공이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비등할 정도라는데.”
“소문은 그렇지요. 그리고 소문은 가끔 과장되기 마련이고요.”
“과소평가되는 경우도 있지. 그러니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아.”
“제가 또 도망치는데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흐흐흐!”
개왕이 히죽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당민호는 알았다.
최악의 순간이 오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개왕이 남아 있을 것임을 말이다.
거지들의 왕이지만 명예를 아는 사람이 바로 개왕이었다.
“방심하면 안 돼. 이미 한 번 방심해서 크게 다쳤잖아?”
“물론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움직임을 확인하는 상태이고요.”
“현재 네 개의 무리로 나눠져서 온다고?”
“예. 그 중에 독사자(毒獅子)와 염사자가 가장 먼저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놈들 역시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걸 알고 있겠지?”
당민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보고 받기로는 이곳에서 불과 하루거리 정도에 있다고 들어서였다.
나머지 세 무리 역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서 뒤따르고 있었다.
마치 독사자와 염사자의 움직임을 지켜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알 겁니다. 모르기에는 저희 쪽 인원도 적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대막과 접경지역이지 않습니까. 정찰조가 이 근방에 있을 겁니다. 하루 정도의 거리이니까요.”
“이렇게 대놓고 불을 피우는데 모르면 말이 안 되기는 하지.”
“그렇습니다.”
“개방의 피해가 제법 컸겠어.”
당민호가 안쓰러운 얼굴로 개왕을 쳐다봤다.
이런 정보를 쉽게 얻을 리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어서였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고 하지만 피해가 아예 없을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작은 희생으로 큰 피해를 막을 수 있기에 다들 각오하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야.”
“그거면 충분합니다.”
“회의용 천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세 사람에게 무인 한 명이 다가왔다.
수뇌부가 사용할 천막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러 온 것이다.
이윽고 벽우진을 위시로 당민호와 개왕이 무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대막의 열풍과는 다르게 서늘함이 느껴지는 바람에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던 인영이 피풍의를 풀었다.
그러자 거의 벗다시피 한 옷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가죽으로 꼭 가려야 할 곳만 가린 특이한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보고 받은 것보다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지원군이 왔을 수도 있지. 여기는 저치들 안방이나 마찬가지니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여기는 대막과도 그렇게 안 멀어.”
여인의 옆으로 창백한 안색의 비쩍 마른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털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민머리를 반짝이며 피풍의를 벗었던 것이다.
“지원군은 필요 없다. 내 손으로 죄다 녹여버릴 테니까.”
“정찰조의 말을 들으니 사천당가의 무인들도 와 있다고 하던데? 오독문을 밀어내버렸던.”
“그래 봤자 중원의 독인들일 뿐이지. 대막에서 만들어진 독에는 속수무책일 거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아?”
“흥.”
남자라면 절로 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육감적인 여체였지만 신기하게도 중년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없이 싸늘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뭐, 사형의 실력이야 나는 잘 알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사천당가보다 사형의 독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독황을 맡고 패선은 나에게 넘기는 게 어때? 상성을 생각했을 때 내가 상대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듣자하니 겉으로 보기에는 이십대로 보인다던데. 그때의 남자들은 여자에 환장한다는 거 사형도 알잖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후계자 자리도 차지하고?”
중년인, 달리 독사자라 불리는 그가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도 염사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에이. 약속한 게 있는데. 일단은 경쟁자들부터 함께 처리하기로 얘기했잖아? 그런데 후계자 자리가 뭐가 중요해.”
“그럼 내가 패선을 잡아도 상관없겠군.”
“물론이지. 다만 상성적으로 사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거야.”
“글쎄. 왜 상성이 나쁘다고 하는지 난 모르겠는데. 오히려 유리하면 유리했지.”
독사자가 검게 변색된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독공이 더 위력적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당연히 독에 대비하고 있지 않겠어? 더구나 독황이라 불리던 전대고수까지 있다는데.”
“만독지체도 내 독에 걸리면 한 줌 독수가 된다. 제아무리 대단한 피독주라도 시간만 벌어줄 뿐이지.”
“그렇다면 원래 얘기했던 대로 함께 상대하는 수밖에.”
“이제 얼굴도 슬슬 보이는군.”
독사자가 먼 곳을 응시했다.
저 멀리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중원의 무림인들이 진형을 구축하고 있는 게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디 보자. 그 유명한 패선이 어디 있을까나?”
“저 자 같은데.”
“어머? 내 취향인데?”
< 제 56장. 복수의 서막.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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