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6장. 복수의 서막. -01 >
투둑. 투두둑.
활짝 열린 창문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적막에 빗소리가 더더욱 크게 들렸던 것이다.
“괜찮냐?”
“나름? 아이들이 사과를 받아줘서 그런가.”
벽우진이 담담한 신색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당민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벽우진의 속에서 어마어마한 분노가 들끓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위령제를 해서 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것일 수도 있지.”
“그럴 지도.”
벽우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알아낸 것은 좀 있어? 소문의 진위라든가.”
“아직은. 근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가 싶기도 해.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한들 죽은 아이들이 되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혈채는 똑같이 피로 갚아야 하는 법이지.”
“근데 목 장문인은 무슨 일로 온 거야? 가깝기는 해도 이렇게 막 올 정도는 아닌데.”
“위로의 말도 전할 겸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벽우진의 시선에 목진자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벽우진의 얼굴에 살짝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나와?”
“예. 사왕성이 단순히 곤륜파만 노리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야욕을 부리기에 더없이 좋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는 상황이니까.”
“또 북해빙궁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법도 없기에 이번에는 먼저 대처를 하려고 합니다.”
목진자가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북해빙궁 때처럼 본산을 포기하는 일을 그는 또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목진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벽우진을 마주했다.
“대처라.”
“함께 막는 것입니다. 사왕성의 동태를 함께 살피면서요.”
“저지선을 만들자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곤륜과 공동뿐만 아니라 섬서성의 화산과 종남파도 함께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나를 빼면 섭섭하지.”
당민호가 끼어들었다.
공동파보다는 사천당가가 곤륜파와 훨씬 더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 만큼 당민호는 본가가 빠지는 걸 좌시할 수 없었다.
“안 뺀다. 사천당가와 곤륜은 여전히 동맹 관계이니까.”
“거기에 저희도 끼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목진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해빙궁과 오독문을 밀어내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곳이 바로 곤륜파와 사천당가였다.
거리로 따지자면 화산파와 종남파가 훨씬 더 가까웠지만 현재 지닌바 힘은 곤륜이 위였다.
규모로 보자면 빈약하지만 대신 곤륜파에는 벽우진이라는 절대고수가 있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제갈세가주의 말대로 할 생각이니까.”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공동파를 노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해. 단순히 중원의 패권을 노린 거였으면 곤륜산까지 오지 않았겠지.”
“그래도 또 모르는 것이니까요. 미리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진자는 전대 장문인과 달랐다.
명문대파라는 자부심은 갖되 자만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 어떤 곳도 본산을 노리지 못할 것이라는 안일함으로 인해 사문이 반파된 것을 직접 봤었기에 목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더구나 지금의 강호정세는 더없이 혼란했기에 더더욱 귀를 열고 멀리 봐야 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감사합니다.”
“일파의 수장으로서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북해빙궁 사건으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요.”
당민호의 칭찬에 목진자가 겸허하게 웃었다.
하늘 위의 하늘이 있음을 봤기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폭풍우가 칠 때는 잠시 피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 말이다.
“화산과 종남에는 직접 갈 건가?”
“예.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장문인이 찾아왔는데 문전박대는 하지 않겠지요. 허허허.”
“문전박대는 무슨. 화산이나 종남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을 텐데. 다만 종남파가 좀 걸리긴 하군.”
형산파 장문인을 부채질하던 종남파의 장문인을 떠올리며 벽우진이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악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선인도 아닌 게 종남파의 장문인이었다.
“어색한 사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만나 봐야지요. 종남이나 화산도 어려운 시기이지 않습니까.”
“내가 서신을 보내놓으마. 그럼 얘기하기가 편할 거다.”
“나도 보내마.”
“감사합니다.”
벽우진에 이어 당민호도 나서주자 목진자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종남파가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벽우진과 당민호가 미리 언질을 해놓는다면 설득이 수월해질 터였다.
이해득실이 빠른 곽자량이니만큼 이 제안이 종남파에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 테니까.
“사왕성에 대해서 아는 게 혹시 있나? 따로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대외 활동이 많은 속가제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딱히 중한 정보라고 할 것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교류가 많지 않다 보니 대체적으로 알려진 사실들만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상인이나 상단을 통해 알아보는 게 나을 거다. 무인들 간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상인들은 다르니까.”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띠는 목진자를 돕듯이 당민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인들보다는 상인들이 더 자주 대막을 오고 갈 것이 분명해서였다.
사막에도 사람은 살았고, 그 말은 상권 역시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애초에 사왕성의 시작이 거대 마적단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청하상단에 얘기해 두었다.”
“개방에는 내가 물어보마. 대막에 거지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지만, 그래도 명색이 개방인데 주워들은 것들이 꽤 되겠지.”
“이미 전서응으로 보내 놨다.”
“확실히 많이 적응했어. 장문인 자리에.”
“그래도 부족해.”
벽우진이 그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는 완벽할지 모르나 일파의 장문인으로서는 요즘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서였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잖아? 산불 때도 그렇고, 오늘 위령제도 그렇고.”
“맞아. 그것 때문에 버티고 있다.”
“수장이라는 자리는 절대 쉽지도, 가볍지도 않은 자리야.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것도 많고. 그리고 너무 감정적으로 움직여도 안 되고.”
“솔직히 말해. 싸움닭처럼 여기저기서 날뛰지 말라고.”
위령제 때문인지 평소답지 않게 순화해서 말하는 당민호를 향해 벽우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당민호가 헛기침을 했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수 있나.”
“언제부터 내 체면을 생각했다고.”
“예전이야 별호도 없는 강호초출이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그렇지요.”
목진자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지금의 벽우진은 똑같은 사람이지만 위상은 그야말로 천지차이였다.
그런 만큼 당연히 위신에 신경 써야 했다.
“목 장문인도 다 아는데 뭘.”
“근데 진짜 쳐들어 갈 거는 아니지?”
“왜? 그럼 안 되나?”
당민호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그가 아는 벽우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신중하게 생각해. 사왕성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해. 그냥 쳐들어가서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좀 더 상황을 정확히 알아낸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을 테니까 긴장하지 마라. 우리 애들 복수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생각 없으니까.”
“또 말 서운하게 하네. 우리가 남이냐? 곤륜이 공격당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어? 강호에서 은원관계에 철저하기로 따지자면 첫 손에 꼽히는 곳이 본가인데!”
당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곤륜파가 공격을 당했다.
그것도 곤륜파가 먼저 공격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왜 네가 흥분해. 정작 피해자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일단은 알아보고 있으니 보다 정확해지면 결정을 내릴 거야. 우리도 나름 준비가 필요하고.”
“나도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저도 화산과 종남에 다녀올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선뜻 나서주는 두 사람의 모습에 벽우진이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부가 벽우진을 만나는 사이 당소윤은 서예지를 찾았다.
처음에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잦은 대련으로 남매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이 친해졌던 것이다.
채앵! 챙!
익숙하게 본산제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연무장 중 한 곳으로 걸어가던 당소윤의 귓가에 금속음이 들려왔다.
위령제를 치르느라 피곤할 텐데도 쉬지 않고 수련을 하는 모습에 당소윤은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 모여 있네.”
골목을 지나 연무장에 도착하자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서 둘씩 대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당소윤의 눈에 처음 보는 아이가 들어왔다.
“소윤 언니.”
“여전하네. 오늘 같은 날에도 수련을 하고.”
“하루도 빼먹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길 바라지 않을 것도 같고.”
당소윤의 곁으로 얼굴이 촉촉이 젖은 서예지가 다가왔다.
이슬비로 인해 땀방울인지 빗방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맞아. 예를 다했으면 되었어. 그리고 진짜 바라는 건 따로 있을 거고. 근데 다들 대단하네. 위령제 치르느라 많이 지쳤을 텐데.”
“더 열심히 해야죠. 우리가 약해서 속가제자들이 죽은 것이니까요.”
“마음먹고 달려드는 암살자들을 모조리 막는 건 불가능해.”
자책하는 서예지를 바라보며 당소윤이 고개를 저었다.
작심하고 달려드는 살수들만큼 까다로운 상대도 없어서였다.
그나마 벽우진이 빠르게 알아차리고 대처했기에 이만한 선에서 끝났지 만약 은월단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피해는 몇 배나 더 컸을 터였다.
“하지만 피해는 줄일 수 있었겠죠.”
대답을 못하는 당소윤을 일별한 서예지가 심소천과 대련하는 심소혜를 쳐다봤다.
늘 방긋방긋 웃던 심소혜가 지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차가운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린 심소혜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저 아이가 청민 장로님의 제자인가 보네.”
“예. 새로이 막내로 들어왔어요.”
“똘똘하게 생겼다. 몸도 다부지고.”
“그래서 사숙의 기대가 커요. 저희도 마찬가지고요.”
배혁문을 보는 서예지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익히는 게 조금 늦기는 하지만 대신 부지런했고,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잘 따라오는 편이었다.
오히려 심소혜나 심소천이 남다른 것이지.
“그래 보여. 그래서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 나도 나름 열심히 수련했는데 너희들이랑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소윤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처음에는 운 좋게 벽우진의 눈에 들어서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비천단이라는 행운까지 받았기에 당연히 빠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이고 오만이었다.
‘질투에 눈이 멀었었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운으로 따지자면 그녀가 오히려 더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대세가의 한 곳인 사천당가에서 태어났으니까.
기본적인 환경 자체가 비교불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환경은 생각지도 못하고 곤륜파의 제자들을 부러워했었다.
“다들 늦게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사문에 보탬이 되고 싶기도 하고.”
< 제 56장. 복수의 서막.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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