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77화 (177/325)

< 제 55장. 역린(逆鱗). -02 >

사왕성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그의 마음을 흔드는 말이기는 했다.

천하평정, 천하제일이라는 말은 말이다.

“지금의 무료함은 중원에 입성하는 순간 사라질 것입니다.”

“겸사겸사 패선도 죽이고 말이지.”

“패선은 성주님의 앞길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소림무제, 무당권제보다도 더 말이지요.”

“소림과 무당이라.”

사왕성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대막을 평정한 이후 중원의 정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난 만큼 천하제패의 웅심을 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장년인이 가솔들을 모조리 이끌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사왕성주의 투명한 두 눈이 장년인에게로 향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명석하기로 소문난 명문세가의 수장이 바로 장년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섣불리 장년인을 믿지 않았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누구보다 중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가 저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성주님께서는 결정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일단 들어보지. 자네가 세운 계획을.”

사왕성주가 못 이기는 척 넘어가듯이 말했다.

그러자 장년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은월단주가 패배한 것이 역시 제대로 먹힌 것 같아서였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인물이니까. 다만 내게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은 것이겠지.’

장년인이 내심 웃었다.

사왕성주가 그를 아는 것처럼 그 역시 사왕성주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떤 야망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장년인은 순진하게 웃으며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모든 게 사왕성에게 이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곤륜산에 비가 내렸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곤륜산을 적시듯이 약하게 내리는 비였는데 벽우진은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형.”

“사부님.”

벽우진이 처소에서 나오자 청민과 서진후, 그리고 호법들과 제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들 역시 벽우진과 똑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가자.”

“예.”

청민의 대답에 벽우진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오늘 있을 위령제를 알고 있다는 듯이 때맞춰 비를 뿌리는 하늘의 모습에 벽우진은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발걸음은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벽우진을 위시로 곤륜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먼저 모여 있던 유가족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봤다.

그런 유가족들의 두 눈과 얼굴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대부분은 슬픔이었지만 몇몇은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벽우진을 노려봤다.

벽우진 때문에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 이···!”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유가족들이 벽우진을 노려봤다.

하지만 차마 그 울분을 토해내지는 못했다.

그들 역시 알고는 있었다.

무림인이 된 순간 죽음은 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 죽음이 자신의 자식, 혹은 형제에게 올 줄은 몰랐기에 다들 원통한 얼굴로 눈물만 쏟아냈다.

스윽.

그런 유가족들을 향해 벽우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벽우진이라고 왜 그들의 마음을 모를까.

아니, 유가족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벽우진 역시 비통했다.

속가제자들 역시 곤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으흐흐흑!”

“아이고! 아이고, 하삼아!”

깊게 허리 숙여 사과는 벽우진의 모습에 결국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몇몇 중년여인들은 비가 오고 있음에도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벽우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시작하셔야 합니다, 사형.”

좀처럼 허리를 피지 못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 역시 해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서였다.

유가족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 당연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죽은 아이들의 혼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청민은 벽우진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예.”

걸음마다 올올히 달라붙는 것 같은 유가족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벽우진이 천천히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죽은 속가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위패들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청민과 서진후, 그리고 당필교가 밤새 만든 것들이었다.

스윽.

벽우진은 그 위패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였다.

못나고 부족한 자신으로 인해 죽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기리며 넋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벽우진은 다짐했다.

반드시 복수해주겠다고 말이다.

‘마지막 사과는 사왕성을 다 쓸어버린 후 하마.’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벽우진이 한 명 한 명의 위패에 향을 올리자 청민과 서진후도 뒤이어 향을 피웠다.

곤륜파의 장로로서 예를 다한 것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흐흐흐흑!”

그런 세 사람의 귓가로 빗소리와 함께 유가족들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속가제자들 역시 고개를 숙이고서 눈물을 흘렸다.

함께 한 시간이 적지 않기에 죽은 이들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송찬승과 기혜승은 주저앉은 채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잘 풀릴 듯하면서 풀리지 않는구나.”

“그러게요. 이제는 그만 고생해도 될 것 같은데.”

곤륜파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발해서 어젯밤에 도착한 당민호가 안쓰러운 눈으로 벽우진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작아 보이는 벽우진을 말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곤륜파는 처음이에요.”

당소윤이 무거운 얼굴로 곤륜산을 둘러봤다.

민둥산처럼 되어버린 주변의 모습 때문인지 곤륜파의 전경은 더욱더 음침해 보였다.

한낮인데도 비가 내려서 밤처럼 어두웠고 말이다.

하지만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축 처진 분위기였다.

“이럴 수밖에 없지.”

“근데 사왕성이라니. 진짜 생뚱맞기는 하네요.”

“의외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북해빙궁과 오독문도 쳐들어오는 마당에.”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러네요.”

북해빙궁과 오독문은 아예 징조도 없이 갑자기 중원을 침공해 왔었다.

그로 인해 피해도 엄청났었고.

두 세력 역시 딱히 은원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중원을 공격했었다.

그걸 생각하면 사왕성의 공격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시기적으로 더없이 좋은 상황이기도 하고. 사왕성이 욕심을 낼만 하지.”

“어부지리를 노리기에 딱 좋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당소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세외세력이 중원무림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시기를 이용하는 것 또한 능력이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시기가 와도 멀뚱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존재. 칼날 위를 걸어가는 존재. 그게 바로 무인이다. 그런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 무림인 것이고.”

“여기 계셨군요.”

“목진자. 아니, 목 장문인이라고 불러야겠군.”

두 조손의 곁으로 목진자가 다가왔다.

어제 비슷한 시간에 곤륜파에 도착했는데 의외로 목진자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서려 있지 않았다.

장문인인데도 수행원 하나 없이 홀로 곤륜파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그래도 쓰나. 이제는 일파의 장문인인데. 내 생일 때도 찾아와 주었고.”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사문을 위해서라도.”

“허허허허.”

넉살 좋게 대답하는 목진자의 모습에 당민호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지금의 목진자는 얼마 전의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완숙해진 느낌이랄까.

물론 무공도 더 깊어진 상태였다.

“그보다 진짜 놀랐습니다. 뜬금없이 사왕성이 움직일 줄은.”

“어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진이도 사왕성이 움직인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더라도.”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그 놈이라면 앞뒤가 맞기는 하지. 이유도 충분하고.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당민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했다.

또 다른 오해와 은원을 만들 수도 있었고 말이다.

‘가뜩이나 적이 많은 녀석인데.’

빠르게 이름이 알려진 만큼 벽우진은 적대하는 곳 역시 많았다.

산적과 수적들은 물론이고 북해빙궁 역시 언제 다시 침공해 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거기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천년마교 역시 신경 써야 했다.

‘물론 적이라면 본가 역시 만만치 않지만.’

당민호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사실 사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어서였다.

오히려 자잘한 적들까지 생각하면 사천당가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천당가가 굳건한 것은 곤륜파와 달리 지지기반이 굳건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지금이 더욱 중요했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치 못한 적의 기습을 미리 알 수는 없으니까요. 아직 정보 조직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니.”

“그런데 너는 어쩐 일이야?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사왕성이 있는 대막과는 본 파가 더 가깝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왕성이 곤륜파만으로 만족할 것 같지도 않고요. 또 제갈세가주가 했던 말이 있어 소식을 듣자마자 왔습니다.”

목진자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가뜩이나 북해빙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여기에 사왕성까지 쳐들어온다면 공동파로서는 답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황도 살필 겸 부리나케 달려왔다.

“점수 좀 따려고 왔구먼.”

“하하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진짜 걱정이 되기도 했고···.”

“꼭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그런 부분도 있다는 뜻이겠지?”

“그건 부정할 수 없지요.”

목진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시선을 돌렸다.

정확하게는 제단을 향해 쉼 없이 고개를 숙이는 벽우진에게로 말이다.

“우진이답지 않아.”

“제가 보기에도요.”

“살기가 더 짙어지면 안 되는데 말이지.”

목진자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통탄이 가득한 위령제이지만 목진자는 느낄 수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살벌한 진노를 말이다.

아마도 벽우진은 속가제자들의 넋을 기리면서 속으로는 다짐을 하고 있을 터였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이지.’

벽우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벽우진은 받은 것 이상으로 늘 돌려주었으니까.

그게 은혜이든 원한이든.

때문에 위령제 이후의 움직임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화입마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래. 원래 심마는 고수에게 더 자주 찾아오니까. 더구나 지금처럼 심적으로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으음!”

당소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심마에 빠진 벽우진이 날뛸 것을 생각하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것이다.

“잘 이겨내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패선이시지 않습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러기에는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행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위험하기도 해. 청민이나 진후가 잘못된다면···.”

당민호가 말끝을 흐렸다.

만약 둘이 잘못된다면 진짜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건 좀 위험하겠네요.”

“우리도 가지.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만 할 수 있나.”

“예.”

당민호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당소윤과 목진자가 뒤따랐다.

< 제 55장. 역린(逆鱗).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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