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76화 (176/325)

< 제 55장. 역린(逆鱗). -01 >

모두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시기를 생각해 보면 산불을 지른 것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곤륜파와 사왕성은 아무런 접점이 없어서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곤륜파와 사왕성은 접점이 없습니다. 산하 부대라고 할 수 있는 은월단 역시 마찬가지고요.”

“무릇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인데.”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현재의 은원뿐만 아니라 과거 곤륜파가 맺었던 은원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것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없었다.

“저도 없습니다.”

“저 역시 딱히 사왕성이나 은월단과 관계된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벽우진의 시선에 청민과 서진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과거를 곱씹어 봐도 대막과는 연관된 일이 없어서였다.

“근데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벽우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문제로 말이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곤륜파가 공격을 당했고, 속가제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벽우진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어디인지는 알아냈으니까요.”

설향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두 번이나 뚫렸다는 생각에 그녀 역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그것도 천년마교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지.’

한 번은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실력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능력부족이었고.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라 미리 알게 되었으니까.’

설향은 그 어느 때보다 조직망이 촘촘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그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설향은 아예 잃기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아린은 다른 모양인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능하겠소? 다른 곳도 아니고 대막인데.”

“대막이라고 해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조금 시일이 걸릴 뿐 알아낼 수 있습니다.”

“부탁드리겠소이다.”

“아닙니다. 부탁이 아니더라도 저희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적은 정말 처음이거든요. 본문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저희는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설향의 노안에 단호한 기세가 서렸다.

망신도 이런 대망신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일에 전력투구할 작정이었다.

사왕성주는 물론이고 그 밑에 있는 예하 부대들까지 전부 다 말이다.

“심문은 어찌 되었소?”

“살인귀들이지만 나름 살수 수업을 받았다고 입을 쉬이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아는 게 적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차피 칼에 불과하니.”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월단이 대막에서 대단하다고 하나 그래봤자 우두머리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 만큼 알고 있는 게 많지는 않을 터였다.

“장문인께서 생포하신 은월단주는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은월단주는 사왕성주의 여섯 제자 중 한 명인 월사자(月獅子)이거든요. 비록 말석에 불과하기는 하지만요.”

“하긴 무공이 제법이긴 했소이다.”

두 자루의 단검으로 이기어검을 펼치던 은월단주를 떠올리며 벽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이내 장하삼도 자연스레 떠오르자 벽우진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제대로 피어보기도 전에 죽은 속가제자들이 너무나 안쓰러워서였다.

동시에 사왕성에 대한 분노가 무시무시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해서 은월단주를 중점적으로 파볼 생각입니다.”

“죽여도 상관없소. 어차피 사왕성에 갈 터이니.”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벽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민과 서진후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남으라는 지시를 내려도 반드시 따라가겠다는 듯이 말이다.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꼭 해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사왕성은 일개 세력이 아닙니다. 사왕성주의 제자들인 육사자(六獅子)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비견될 정도의 고수들입니다. 하물며 사왕성주는 육사자보다 강하고요.”

설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소 구파일방 중 여섯 문파의 전력이 합쳐져 있다는 걸 에둘러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벽우진이나 청민, 서진후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 봤자 무인일 뿐이오.”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대막은 그들의 영역입니다. 중원과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참을 생각은 없소이다.”

벽우진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먼저 공격한 것도 아니고 이유 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세력에서 밀리니 참아야 한다?

벽우진은 그럴 수 없었다.

“제 말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복수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곤륜파의 위신을 생각하서라도 말이지요.”

“신중하게라.”

“우선 저희가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지요. 사왕성 이후도 생각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벽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왕성보다 먼저 복수해야 하는 곳이 있음을 깜빡했던 것이다.

“그리고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일단은 심증과 의심뿐이지만요.”

“알아낸 것이라.”

“어쩌면 그 가문이 사왕성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설향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들을 느끼며 설향은 천천히 알아낸 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풍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사막을 가로지르며 두 명의 사내가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특색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익숙하다는 듯이 살펴보며 두 인영은 마을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마치 요새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지.”

모래폭풍으로 인해 피풍의를 입고 있던 두 명 중 한 명이 머리를 덮고 있는 부분을 내리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끼이익!

이윽고 안내하는 이를 따라 대전에 도착한 장년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대전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거의 헐벗다시피 한 옷차림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왔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보면 장인과 사위라고 할 수 있었으나 두 사람에게서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하관계처럼 보였다.

“늦은 건 알고 있는 모양이야?”

“모래폭풍이 좀 거셌습니다.”

“하긴. 아직 쉽지 않기는 하겠지. 대막의 사나이가 아니니까.”

장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묘하게 조롱하는 듯한 억양에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지금 그는 을의 처지였기에 한없이 스스로를 낮춰야만 했다.

“자네가 오기 전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지.”

“···은월단이 전멸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은월단주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십 할의 승산을 장담할 수는 없다고.”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 내 제자의 면전 앞에서.”

“패선에 대해 대막에서 가장 잘 알기에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장년인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그게 지금 내 탓이라는 건가?”

“···아닙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충분한 계획이었다는 말이었습니다.”

“확실히 지자로 유명한 가문 출신이라 그런가. 혓바닥이 유려하기 그지없군.”

“누구보다 성공을 바란 건 저였습니다.”

장년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절대 계획이 실패하길 기원하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공하길 바랐다면 모를까.

“그건 알지. 자네와 패선과의 원한관계를 내 어찌 모를까. 복수를 위해 나에게 딸까지 바친 사람인데.”

“······.”

장년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부채질을 하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복수를 이루어야 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놀랍군. 은월단주가 비록 육사자 중에 말석이라고 해도 만만한 무인이 아닌데.”

“···그 정도로 패선은 강합니다. 세력은 보잘 것 없지만.”

“보고 받아보니 그래 보여. 그래서 호기심도 좀 생기고. 다치지 않고 은월단주를 제압했다는 건 적어도 첫째나 둘째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니까.”

“두 분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장년인이 눈을 빛냈다.

이제야 미끼가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글쎄. 어떻게 할까나?”

태사의의 손잡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로 남자가 히죽 웃었다.

얼굴 가득 장난기가 가득했다.

“은월단주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대신 더 이상 쓸모는 없겠지. 숨만 붙어 있는 건 살아 있는 게 아냐. 싸우지 못하는 자는 대막의 전사라 할 수 없지.”

“패선이 이곳을 노릴 겁니다.”

“그렇겠지. 알려진 성격 상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먼저 쳐야 합니다. 성주님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지요.”

장년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자존심을 건들면서 말이다.

“방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보다 과연 여기까지 올까?”

“옵니다. 혼자서라도 올 겁니다.”

“호오. 혼자서라.”

남자가 눈을 반짝였다.

장년인의 말마따나 혼자서 사왕성을 쳐들어오는 광경을 떠올리자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일단 기개와 배짱은 합격이었다.

정말 혼자서만 이곳에 온다면.

“제자인 월사자가 붙잡혔습니다. 그런데도 성주님께서 가만히 계신다면 위명에 흠이 갈 것입니다.”

“패선을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남자가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장년인은 당당했다.

굳이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어서였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패선을 죽이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능력은 부족하지. 많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기본 실력이 턱없이 부족해.”

“맞습니다.”

장년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하게 무공적인 부분만 본다면 그는 실패하고 사로잡힌 은월단주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은월단주의 손짓 한 번에 그의 목이 날아갈 정도로 둘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전쟁은 꼭 순수한 힘의 대결로만 결판나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날 찾아온 것이고. 딸까지 바쳐가면서 말이지.”

움찔!

부채질을 하던 여인이 몸을 떨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부채질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부친과 똑같았다.

“성주님에게도 결코 해가 되지 않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해. 대막은 더 이상 재미가 없어. 또한 변화도 없지. 제자들이 내 권좌를 노리기는 하지만 제대로 날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어.”

“패선은 충분한 상대가 되어줄 겁니다. 북해빙궁주를 혼자서 쓰러뜨린 무인이니까요. 패선을 잡으면 중원제일인은 물론이고 북해마저 평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자네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

“중원으로 가시지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중원무림이 그토록 좋아하는 명분 역시 저는 만들 수 있습니다.”

장년인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정도로 이미 계획은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사왕성주만 움직인다면 말이다.

“평정이라.”

< 제 55장. 역린(逆鱗).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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