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4(7권 끝) >
“어리석고 멍청한 놈이군.”
지 딴에는 절묘한 순간에 은신술을 펼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벽우진이 보기에는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밖에 안 보였다.
이미 두 번이나 간파를 당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벽우진의 입장에서는 도망치지 않아서 더 좋았지만.
터엉!
기괴한 소리로 벽우진의 청각을 교란시키던 단검 중 하나가 벽우진의 목을 노리고서 쇄도했다.
1차적으로 청각을, 2차적으로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서 집중력을 떨어뜨린 후 공격하는 방식인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고작 이 정도 기음(奇音)으로는 벽우진을 흔들 수 없었다.
스르륵!
그 순간 벽우진의 등 뒤로 은월단주가 안개처럼 나타났다.
조금의 징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는 하늘하늘 거리는 열 개의 은사가 매달려 있었다.
“다 보인다니까.”
하지만 은월단주가 등 뒤를 선점했음에도 벽우진은 놀라지 않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닿는 순간 강철조차 소리 없이 베어버리는 은사를 향해 왼손을 내질렀던 것이다.
‘걸렸다!’
그 모습에 은월단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기를 주입하지 않아도 강철쯤은 우습게 절단 내는 은사인데 지금은 그의 공력을 잔뜩 머금은 상태였다.
즉 호신강기도 두부처럼 갈라버릴 수 있는 상태란 얘기였다.
그렇기에 은월단주는 어쩌면 승부가 쉽게 갈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스스스···.
은사가 뭉개지다 못해 끊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별다른 초식도 없이 그저 단순히 아귀힘으로 특수한 재료와 특별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특제 은사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에 은월단주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너무나 큰 실수가 되었다.
덥석!
멍 때리고 있는 은월단주의 목을 벽우진이 오른손으로 단숨에 붙잡았던 것이다.
“크윽!”
목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악력에 은월단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아직 멀쩡한 왼손의 은사를 움직였다.
거리가 지척인 만큼 단숨에 벽우진의 몸뚱이를 절단 내려는 것이었다.
푹!
그러나 이번 역시도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위에서 내리꽂히는 철검이 정확히 그의 견정혈을 꿰뚫어서였다.
두 자루 단검을 조종할 여유가 없는 그와 달리 벽우진은 보지 않고도 이기어검을 펼치는 모습에 은월단주는 고통도 잊은 채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공력이 끊긴 은사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늘어졌다.
우득!
하지만 벽우진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나머지 오른팔의 어깨도 아귀힘으로 박살을 내버렸던 것이다.
“흐으···!”
맨 정신인 상태에서 뼈가 바스라지는 걸 올올히 느끼게 된 은월단주가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드는 고통에, 보이지 않아도 어떻게 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고통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면 안 되지. 네놈들 따위에 우리 하삼이가 죽었는데.”
푸푹!
이번에는 은월단주가 사용하던 단검이 두 허벅지에 박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맨살에 칼이 박혔음에도 불구하고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부르르르!
하지만 고통만은 확실하게 전달되었는지 은월단주가 사시나무처럼 전신을 떨었다.
두 눈에서는 흰자위만 보였고.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내가 질문하는 말에만 대답하면 돼. 그 외는 허락하지 않는다.”
“크큭!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적어도 죽지는 못하게 할 수 있지.”
투두두둑.
어느 순간 벗겨진 복면에서 은월단주의 이빨이 옥수수 알갱이 떨어지듯 우수수 뽑혀져 나왔다.
어떤 이빨이 독단인지 알 수 없기에 모조리 뽑아버린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벽우진은 혀와 혀 밑까지 살폈다.
고문기술자에게 어깨 너머로 배운 걸 모두 다 활용했던 것이다.
“누가 시켰느냐?”
“······.”
모든 준비를 끝마친 벽우진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은월단주를 노려봤다.
지금껏 참아왔던 진노(瞋怒)를 이제야 터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분노가 담긴 안광을 마주하고도 은월단주는 웃었다.
“꼴에 살수라 이거지?”
“흐흐흐!”
벽우진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은월단주가 재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어떤 고문을 하더라도 소용없을 거라는 웃음이었다.
“아직 견딜 만 한가 보군.”
“나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화풀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꾸드드득!
은월단주의 왼쪽 발목이 서서히 돌아갔다.
바깥쪽 방향으로 완전히 한 바퀴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발목에 이어 무릎까지 돌아가자 은월단주가 오한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을 떨었다.
“읍읍!”
그야말로 뒤를 생각하지 않고서 막 다루는 벽우진의 손길에 은월단주가 잇몸을 악물었다.
한데 그게 또 다른 고통을 선사했다.
이빨이 강제로 뽑힌 상태였기에 상처투성이인 잇몸을 악물자 고통이 배가되었던 것이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때로는 시체들이 알려주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네놈들에게 이를 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거든.”
꾸드득!
이번에는 오른쪽 발목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똑같이 무릎이 돌아가고 고관절까지 한계 이상으로 꺾이기 시작하자 은월단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독한 고통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너 말고도 물어볼 놈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르륵!”
은월단주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반신을 끝낸 벽우진이 본격적으로 내공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물론 은월단주를 회복시키기 위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벽우진의 내공은 은월단주의 기경팔맥은 물론이고 혈맥을 모조리 찢어버렸다.
덜덜덜!
대해(大海)와 같은 공력이 노도처럼 은월단주의 전신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강제로 모든 혈맥을 찢어발겼던 것이다.
그 고통에 은월단주는 몸부림치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더 이상 움찔거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죽은 척 하는 거 다 안다. 귀식대법으로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지, 지독한···.”
“네놈 따위가 그런 말을 하면 쓰나.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아이를 조롱하며 가지고 논 네놈들 따위가 말이지.”
“흐으으으···!”
벽우진의 시선이 여전히 두 눈을 뜬 채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장하삼에게로 향했다.
공허한 그의 두 눈을 보자 벽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얼마나 두려웠을지 감히 그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무나 미안했다.
이렇게 복수 밖에 할 수 없는 게.
“미안하구나···.”
은월단주에게 말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연 벽우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형지기로 장하삼을 조심스럽게 띄워 올렸다.
질질질.
반면에 은월단주는 짐짝 다루듯 다뤘다.
땅바닥에 기괴한 각도로 돌아간 두 발이 쓸리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끌고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이 놈의 새끼들!”
퍼퍼퍼펑!
서진후의 검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검강도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며 은월단원들을 모조리 터트려버렸다.
단순히 베어버리는 것에 끝나지 않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폭사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진후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주르륵.
목이 잘린 채로, 또는 머리가 꿰뚫린 채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속가제자들을 보자 그는 눈이 돌아갔다.
처음으로 받아들인 속가제자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모습을 보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아아아!”
그 울분을 서진후는 은월단원들에게 사정없이 내뿜었다.
과할 정도로 공력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단전이 찌릿함에도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한 그를 노리고서 모여 드는 은월단이 기껍다는 듯이 더욱더 거세게 검을 뿌렸다.
퍼펑! 퍼퍼퍼펑!
그런데 그때 사방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자신의 검이 닿기는커녕 향하지도 않았건만 나무 위, 바위 아래, 땅 속 등등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모습에 미치광이처럼 검을 휘두르던 서진후가 멈춰 섰다.
“진정해. 너무 흥분했어.”
“사형.”
“화풀이는 이만하면 됐잖아? 지금부터는 일을 해야지. 애들 복수는 제대로 해줘야 할 거 아냐?”
“···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보이지도 않는 적들을 폭사시킨 건 벽우진이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벽우진의 모습에 서진후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평정심은 벽우진의 뒤에 둥둥 떠 있는 장하삼의 모습을 보고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을 챙겨 와. 최대한 조심스럽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니까.”
“크흐흑!”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던 아이들의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에 서진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분노가 가시자 그 자리를 지독한 슬픔이 채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휘이익!
빠르게 눈가를 훔친 서진후가 몸을 날렸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기에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반면에 벽우진은 한손에 여전히 은월단주의 목을 움켜잡은 채로 아이들이 모여 있을 대연무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죽은 속가제자들을 조심스럽게 데리고서 말이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많은 인원이 착석해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피해는?”
“총 32명이 죽었습니다. 87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망한 아이들은 전부 속가제자입니다.”
부르르르!
청민의 보고에 서진후는 물론이고 호법들을 대표해서 참석한 설백과 진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듣자 분노가 치솟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설향과 설아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으나 두 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법님들 중에서 다치신 분들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두 분께서 다치시긴 했으나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행이야. 놈들의 은신술이 보통이 아니었는데.”
벽우진이 적들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은신술 만큼은 중원에서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곤륜산까지 들키지 않고 온 것일 테고.
스윽.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벽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설향에게로 향했다.
자신들이 속가제자들의 시신을 수습할 때 설향을 비롯한 하오문도들은 적들의 시체와 생포한 이들을 심문했기에 혹시라도 알아낸 게 있나 싶어서였다.
“일단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저희가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이유를 이번에 알아냈습니다.”
“중원의 세력이 아닌 것은 알겠소.”
“맞습니다. 은월단이라고 대막의 살인귀들입니다. 정확하게는 사왕성 소속이고요.”
“사왕성?”
벽우진은 물론이고 앉아 있던 모든 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소한 세력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다.
“대막을 지배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확하게는 대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이 단검은 사왕성의 은월단만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설향의 말에 설아린이 기괴할 정도로 휘어져 있는 단검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단검이 아닌 설향에게 향해 있었다.
“사왕성과 은월단이라. 그런데 왜?”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4(7권 끝)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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