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74화 (174/325)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3 >

툭.

속가제자들이 사용하는 숙소건물의 2층 창문으로 벽우진이 들어왔다.

진짜 신선처럼 표홀한 움직임으로 착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신선과도 같은 외관과는 달리 벽우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두 눈은 물론이고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었던 것이다.

“으음!”

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마치 아지랑이처럼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광경에 은월단원이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받았던 것이다.

“···하삼아.”

바짝 얼어 있는 은월단원과 달리 벽우진은 그쪽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대신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피웅덩이에 엎어져 있는 장하삼에게 다가갔다.

으드득.

떨리는 손으로 장하삼의 몸을 돌린 벽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걸레짝처럼 갈가리 찢기고 꿰뚫린 장하삼의 육신을 보자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장하삼의 얼굴을 보자 벽우진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삼아···.”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버티고 싸우려고 했던 기개가, 각오가 장하삼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고 있는 장하삼의 모습에 벽우진은 온몸이 떨려왔다.

극한의 분노에 몸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차마 장하삼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까드드득!

보지 않아도 벽우진은 알 수 있었다.

송찬승과 기혜정을 위해 장하삼이 희생했음을.

더불어 어떻게든 적들을 붙잡아두려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피가 모조리 빠져 나간 듯 너무나 가벼운 장하삼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벽우진이 사과했다.

이 모든 게 그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는 차마 장하삼의 눈을 감겨주지 못했다.

“네 눈은 모든 걸 끝낸 다음에 감겨주마. 그러니 똑똑히 봐다오.”

장하삼이 보기 편하게 벽에 기대어 앉게 만든 벽우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게 은월단원에게는 마치 거인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이 아닌, 인외(人外)의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동시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으으윽!”

은월단원의 몸이 서서히 굽어지기 시작했다.

기하급수적으로 강렬해지는 기도에 버텨내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가 다가 아니었다.

퍼펑! 펑!

은월단도의 육신 곳곳에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기세의 강약을 조절해 은월단원의 몸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한데 그 위치가 절묘했다.

하나같이 그가 장하삼을 찌르고 찢었던 위치였다.

“끄으읍!”

전신에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고통에 은월단원이 신음을 흘렸다.

그 어떤 고통에도 소리를 내지 않도록 훈련받은 그였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사지육신 곳곳이 터져 나갈 뿐만 아니라 기괴하게 꺾이기까지 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통에 신음하는 은월단원을 보는 벽우진의 두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살기가 불꽃처럼 이글이글 끓고 있음에도 두 눈만큼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던 것이다.

“고작 이 정도에 힘들어하면 안 되지. 감히 대 곤륜의 제자를 능멸했는데 이것도 못 참으면 쓰나.”

“끄아아악!”

분근착골(分筋錯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에 은월단원이 결국 비명을 내질렀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척추까지 비틀어 버리는 무형지기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처절한 비명에도 벽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해서였다.

번쩍!

그런데 그때 벽우진의 발밑에서 한줄기 빛이 솟구쳤다.

수하가 고문과도 같은 수법에 당하고 있음에도 냉정하게 최적의 순간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던 은월단주가 드디어 암습을 가한 것이다.

온 정신이 수하를 괴롭히는데 쏟고 있는 그 틈을 타서 말이다.

터엉!

일격필살의 수법으로, 그것도 발밑이라는 예상하기 힘든 위치에서 기습을 가했건만 결과는 실패였다.

투명한 벽우진의 호신강기를 은월단주는 끝내 뚫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습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은월단주가 체구만큼이나 작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하니 자신의 일격이 고작 호신강기에 허무하게 막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놀란 것과 달리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수백, 수천 번의 살행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경험이 후속 공격을 펼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우우웅!

오로지 예리함만 담은, 극한의 날카로움으로 버려낸 검강이 희미한 빛을 뿌리며 벽우진의 호신강기를 파고들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말이다.

터어엉!

하지만 이어지는 공격 역시 호신강기에 막히고 말았다.

방금 전과 똑같이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튕겨졌던 것이다.

“큭!”

그 모습에 은월단주의 두 눈이 황당함이 떠올랐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네놈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흥!”

얇고 투명한 호신강기 안에 서서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은월단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야말로 말로 안 되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은신술에 한해서는 성주조차도 그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뭐, 믿든 말든 상관없지만. 어차피 뒈질 거니까.”

뒷짐을 진 상태로 벽우진이 이죽거렸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매서운 파공성이 복도를 갈랐다.

한 자루 철검이 맹렬한 기세를 토해내며 은월단주에게 쇄도했던 것이다.

‘무슨!’

현재 2층에는 그와 벽우진 뿐이었다.

그런데 철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며 홀로 날아오자 은월단주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양손의 단검을 교차했다.

콰아앙!

“큭!”

굉음과 함께 은월단주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철검에는 무지막지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철검을 막아낸 은월단주는 곧바로 은신술을 펼쳤다.

호신강기와 이번 공격으로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분명히 이기어검이야. 그것도 최소 목어검(目御劍).’

사위에 짙게 내린 어둠에 녹아든 은월단주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피를 삼켰다.

강하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목어검을 아무렇지 않게 펼칠 정도의 고수일 줄은 몰랐기에 은월단주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만한 고수는 사왕성(沙王城)에서 거의 없었기에 은월단주는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다잡았다.

‘기습 때 확실하게 끝냈어야 했는데.’

평정심을 되찾은 은월단주가 이를 갈았다.

성주의 명대로 장년인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심장이나 머리가 아닌 단전을 노린 게 패착이었다.

이 정도 고수에게 어중간하게 달려든 것부터가 문제였다.

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늦었다.

‘기회는 또 온다. 정황 상 놈은 흔들릴 수밖에 없어.’

몸을 숨긴 은월단주의 귀로 멀리서 금속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말인 즉 아직 격전 중이라는 얘기였다.

‘호법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중원에서나 강한 것이지.’

은월단주는 수하들을 믿었다.

같은 부족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수하들의 실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암살자였다.

정면대결로는 호법들의 상대가 못 될지 모르나 지금은 밤이었고, 또한 난전 상태였다.

‘조급함은 곧 틈을 만드는 법이지.’

은월단주가 반개한 눈으로 벽우진을 노려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명이 더욱 거세질수록 벽우진의 평정심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평정심이 흔들리면 반드시 틈이 생겼다.

‘이번에야말로 단숨에 죽여주마.’

첫 일격은 위치도 위치였지만 방심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전심전력으로 벽우진을 죽일 생각이었다.

‘부탁보다는 죽이는 게 먼저다.’

은월단주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직접 겪어본 벽우진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향후 사왕성에 있어 크나큰 적이자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은월단주는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강해지기 전에 말이다.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데. 기다리면 네놈에게 유리할 것 같나?”

고요한 복도에 벽우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벽우진의 말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은은한 월광만이 간간히 복도를 비추기만 했다.

“인내심이 암살자들의 필수덕목이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인내심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지.”

쌔애애액!

벽우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장하삼의 철검이 반대쪽 복도 끝의 천장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한 줄기 벼락처럼 느닷없이 뻗어나갔던 것이다.

콰앙!

그런데 철검이 천장을 꿰뚫기 직전 하나의 인영이 솟구쳐 나왔다.

작달막한 체구의 은월단주가 검은 천을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은월단주의 두 눈에는 황당함과 경악이 서려 있었다.

극성으로 펼친 은신술을 벽우진이 꿰뚫어봤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놀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쌔애액!

천장을 박살낸 장하삼의 철검이 재차 그를 노리고 쇄도했던 것이다.

“큭!”

빛살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속도에 은월단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육안으로도 쫓아가기 힘든 속도였기에 진짜 경험과 본능적인 감각이 아니었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제기랄!’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벽우진은 오로지 두 눈만으로 철검을 조종하며 은월단주를 난타했다.

이기어검으로 철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은월단주를 공격했던 것이다.

츠츠츠츠!

그뿐만 아니라 철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십 줄기의 검기들은 그를 당혹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한 자루 검만 해도 상대하기 힘든데 검신에서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니 앞이 캄캄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벽우진이 은신술을 펼칠 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특유의 날렵한 움직임으로 벽우진의 공세를 회피하고는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가 지쳐서 쓰러질 게 뻔했다.

물론 이기어검을 펼치는 벽우진의 공력 소모 역시 극심하겠지만 대신 체력적으로는 멀쩡할 것이기에 은월단주는 지금 바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될 것 같아서였다.

휘리릭!

결정을 내린 순간 은월단주가 들고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을 허공에 던졌다.

괴상하게 휘어져 있는 단검을 날아오는 철검을 향해 내던졌던 것이다.

꽈아앙!

진기를 가득 머금은 두 자루 단검과 충돌한 철검이 순간 멈칫거렸다.

생각 외로 반동이 거셌던 것이다.

그리고 폭발과 함께 은월단주의 신형 역시 사라졌다.

굉음과 폭발이 일어난 순간을 이용해 몸을 숨겼던 것이다.

삐이이익!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철검을 막아섰던 두 자루의 단검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잡기로군.”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 달려 있는 고리에 인해서 나는 해괴한 소리가 이내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뿐만 아니라 한 자루는 철검을, 다른 한 자루의 단검은 벽우진을 노리며 쇄도했다.

놀랍게도 은월단주 역시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는 고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에도 벽우진의 입가에는 여전히 조소가 맺혀 있었다.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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