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2 >
송찬승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활짝 열린 옆방으로 몸을 날려 창밖을 통해 뛰어내린다고 한들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쪽은 기혜정을 업고 있는 자신이었다.
체력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 하나를 업고서 아무렇지 않게 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혜정이를 버릴 수도 없고 말이지.’
송찬승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명문대파의 속가제자로서 사형제를 버리는 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었다.
그렇기에 송찬승은 기혜정의 두 다리를 자기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같이 죽더라도 절대 기혜정을 버리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툭툭.
그때 장하삼이 다시 한 번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서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전음만 사용할 수 있었더라도···!’
송찬승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화를 할 수 없으니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어서였다.
투욱.
그런데 갑자기 장하삼이 송찬승을 손으로 밀었다.
더 이상 손가락으로 찌르기 않고 아예 활짝 열린 방문을 향해 밀어버렸던 것이다.
“어?”
갑작스런 장하삼의 행동에 송찬승이 당황한 얼굴로 깽깽이걸음을 했다.
장하삼의 힘에 의해 강제로 밀려났던 것이다.
쾅!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송찬승과 기혜승을 밀어 넣은 장하삼은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방문을 닫아버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고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형님!”
그것을 알아차린 송찬승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야 그는 장하삼의 의도를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가!”
그때 방문 너머로 장하삼의 짧은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애초부터 그는 송찬승과 기혜정만 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손을 찔렀던 것이고.
“크윽!”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송찬승은 이를 악물고 창문을 향해 뛰어내렸다.
장하삼이 목숨을 걸고서 만든 기회를 이대로 져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만약 혼자였다면 그 역시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등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기혜정이 있었다.
‘장로님을, 장문인을 모셔올게요! 그때까지 꼭···!’
쿠웅!
단숨에 창문을 부수고 바닥에 착지한 송찬승이 대연무장을 향해 전력질주 했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없다는 듯이 송찬승은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렸다.
쥐꼬리만 한 내공을 모조리 쥐어짜면서 말이다.
“굉장한 우애로군. 사제들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사형이라니.”
“역시 중원 사람이 아니군.”
“맞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네놈은 죽을 텐데.”
복면으로 인해 눈 주위만 볼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특이하단 사실은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었다.
눈동자 색깔이 다르기도 했고.
그렇기에 어눌한 말에도 장하삼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건 모르는 거지.”
“망해도 명문대파라는 건가. 기개가 제법이야. 근데 왜 우리가 둘이나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모양이야.”
“설마?”
“맞아. 네 사형제들은 아주 잠깐 더 살 수 있을 뿐이다.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라는 거지.”
유난히 작은 체구의 흑의복면인들이 소매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런데 검의 형태가 특이했다.
괜히 이민족이 아니라는 듯이 큰 각도로 휘어져 있는 단검의 모습에 장하삼은 검병을 움켜잡았다.
죽는다는 말이 너무나 섬뜩하게 다가와서였다.
‘하지만 검 끝 위에 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지.’
장하삼의 신색이 차분해졌다.
죽음을 각오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명문대파인 곤륜파의 제자니까.’
장하삼이 땅을 박찼다.
선수필승이라는 말대로 먼저 공격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검은 소청검의 검로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었다.
“애송이의 발악이라.”
부지불식간에 펼친 공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장하삼의 검극은 흑의복면인들에게 닿지 못했다.
오히려 아무런 파공성도 들리지 않았건만 장하삼의 팔다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흑의복면인의 검이 장하삼의 사지를 갈라버렸던 것이다.
“끄윽!”
그러나 사지에서 피분수가 치솟음에도 장하삼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려면 자신이 악착같이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그 노력조차 무의미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모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오. 꽤 버티네? 막 검을 잡은 놈이라 울고 불면서 짤 줄 알았는데.”
“하압!”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장하삼의 기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포기했기에 더욱더 집요했다.
어차피 죽을 거 이왕이면 한 명이라도 같이 데려가겠다는 심보로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애 처음으로 살기를 뿌리면서 검을 휘둘렀지만 흑의복면인에게는 닿지 않았다.
서걱. 슥.
오히려 장하삼의 전신에 상처만 들어났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말이다.
‘좀 더, 좀 더 시간을 끌어줘야···!’
장하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과도한 출혈로 창백해져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하삼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멈추는 순간 암살자가 목을 베고 송찬승과 기혜정에게 달려갈 것 같아서였다.
‘다른 한 명이···, 어디 있지?’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장하삼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투지가 대단하군. 하지만 투지만 있어서는 이 무림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덥석!
이죽거린 흑의복면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장하삼의 오금을 쳐서 무릎을 꿇린 후 멱살을 잡았다.
“으으!”
혼미해져가는 정신에도 장하삼은 검을 휘둘렀다.
팔다리가 짧은 흑의복면인이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간격이 좁혀져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채앵!
하지만 힘이 실리지 않은 검격은 흑의복면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저 막기만 했는데도 장하삼의 검은 튕겨져 날아갔다.
“살고 싶지?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나한테 살려달라고 구걸해봐. 패선을 욕하면서. 그럼 살려주지. 이건 약속할 수 있어. 여기엔 나 밖에 없으니까.”
흑의복면인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보이지는 않으나 웃고 있는 것이었다.
“퉷!”
“이 자식이!”
그러나 대답은 침이었다.
두 팔을 늘어뜨린 채로 장하삼이 흑의복면인을 향해 침을 뱉었던 것이다.
푸푸푹!
그와 동시에 흑의복면인의 단검이 장하삼의 몸 곳곳에 쑤셔 박혔다.
“헉헉헉!”
한편 송찬승은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렸다.
자신의 경신술이 암살자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송찬승은 모든 힘을 두 다리에 쏟은 채 달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두 귀는 활짝 열어두었다.
채채챙! 챙!
그러자 곳곳에서 금속성이 들려왔다.
다른 곳에서도 격전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적어도 혜정이만은···!’
송찬승의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남은 장하삼이 너무나 걱정되었지만 우선은 기혜정이 먼저였다.
안전한 곳에 기혜정을 데려다놓은 후 송찬승은 다시 장하삼이 있는 숙소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쉬이익.
송찬승이 갑자기 앞으로 넘어지듯이 몸을 던졌다.
두 팔로는 기혜정의 양다리를 감싸 안은 상태였기에 턱부터 땅에 닿아 그대로 살갗이 벗겨졌지만 송찬승은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눈앞에 박혀 있는 암기가 그의 뒤통수를 꿰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윽!”
가까스로 등 뒤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피한 송찬승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든 장로들이나 호법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송찬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뛰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찬승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야만 했다.
스르륵.
마치 귀신처럼 그의 앞으로 왜소한 체구의 흑의복면인이 나타났던 것이다.
“오, 오빠?”
“젠장!”
아무 말 없이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서서히 다가오는 흑의복면인의 모습에 송찬승이 뒷걸음질쳤다.
그러면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나 궁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쳐서 그런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극악해서 그런지 좀처럼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혜정이라도 살려야 하는데···.’
이미 장하삼이 자신들을 위해 희생했다.
사지가 분명한 곳에 스스로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송찬승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희생해서 기혜정을 살릴 수 있다면 송찬승은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일단 시선을 끌어야 해.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도록.’
송찬승은 다시 한 번 전음을 펼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만약 전음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기혜정에게 많은 것들을 말해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울분의 시간은 짧았다.
송찬승은 두 팔을 풀어 기혜정을 내려놓았다.
“오빠?”
갑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송찬승의 행동에 기혜정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송찬승은 몽둥이나 마찬가지인 검을 뽑아들었다.
어떻게든 흑의복면인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스윽.
그리고 그 순간 흑의복면인이 움직였다.
마치 빙판길에서 썰매를 타는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쇄도하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다.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달처럼 굽어진 단검이 목을 노리고서 쇄도하는 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자신의 반사신경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움직임에 송찬승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생애가 머릿속에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것이다.
우뚝!
그런데 갑자기 흑의복면인이 멈췄다.
마치 마혈이라도 점혈당한 것처럼 정확히 그의 목 앞에 단검을 세운 채 얼어붙었던 것이다.
“애썼다.”
“자, 장문인?”
“이대로 쭉 달려가거라. 더 이상의 암살자 놈들은 없으니.”
주르륵!
송찬승의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죽음을 떠올린 순간 마치 기적처럼 벽우진이 등장해서였다.
그리고 그 심정은 기혜정도 마찬가지인 듯 울먹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자, 장 형님이···.”
“알고 있다.”
퍼어엉!
뒷목이 붙잡혀 있던 흑의복면인의 몸뚱이가 터져 나갔다.
무지막지한 벽우진의 내공을 견디지 못하고 몸 전체가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하지만 송찬승이나 기혜정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벽우진의 신형이 한 줄기 벼락처럼 날아가고 있어서였다.
우르르릉!
피웅덩이에 서 있던 흑의복면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됨을 느껴서였다.
그것도 암살자인 자신이 순간적으로 굳을 정도의 살기가 말이다.
“패, 패선인가?”
이 세상에서 독존(獨尊)한다는 듯이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기척에 흑의복면인이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느끼는 즉시 하늘 같이 여기는 성주를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목표물인 벽우진이 저렇게 흥분했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만큼 틈도 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기도 했고.
‘괜히 시간을 끈 게 아니란 말이지.’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수백 번도 더 있었다.
하지만 은월단은 그러지 않았다.
벽우진은 물론이고 장로들, 호법들의 심리를 뒤흔들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혈족이나 마찬가지인 제자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본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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