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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72화 (172/325)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1 >

장년인이 살벌한 안광을 뿌리며 말했다.

누구보다 복수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눈이 멀지는 않았다.

지극히 냉정한 상태에서 복수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고.

“약속한 시간까지 오지 않는다면 바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리 할 거다. 안타깝게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패선을 상대할 수 없으니까. 은월단주가 패선을 생포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은월단주가 강한 건 알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은월단주의 용도는 이게 다가 아니다. 다른 용도가 하나 더 있지.”

장년인이 눈을 번뜩였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정작 벽우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리고 패선은 잡지 못하겠지만 다른 이들은 다르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이득이다.”

“아!”

“만약 제자들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은월단주 역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벽우진은 분명히 강했다.

괜히 다른 문파들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벽우진 역시 인간이었다.

감정이 있는 순간 틈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런 상태라면 은월단주에게도 승산이 있겠군요.”

“노련한 암살자이니 기다려 보자고. 어쩌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르니. 그리고 실패해도 상관없고. 우리의 흔적은 은월단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장년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번이 실패한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고 포기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개인적으로 이왕이면 좀 더 버텼으면 좋겠어. 그래야 두고두고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느꼈던 고통과 굴욕감, 치욕을 그 놈도 고스란히 느껴봐야지.”

“맞습니다.”

부복한 인영이 두 눈을 부릅떴다.

벽우진으로 인해 그나 가솔들이 겪은 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특히 그들을 더욱더 힘들게 만든 것은 세인들의 시선이었다.

똑같은 정파이건만 마치 악당을 보는 듯이 쳐다보는 세인들의 모습에 그는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이건 서막에 불과해. 그러니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군. 다시 한 번 사문이 고꾸라지는 것을 말이야. 후후후후!”

장년인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광기(狂氣)가 가득한 눈으로 곤륜파가 자리 잡은 곳을 올려다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앙천광소에도 불구하고 주변은 너무나 고요했다.

벌떡!

늦은 시간임에도 등불을 켜 놓고 업무를 보던 벽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황급히 창문을 활짝 열어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방팔방에서 정제된 살기를 품은 이들이 곤륜파로 달려오고 있음을 느껴서였다.

“모두 일어나라-!”

그것을 느낀 것과 동시에 몸을 날린 벽우진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대부분이 자고 있을 것이기에 일단은 깨우려는 것이었다.

쿠르르릉!

공력이 가득 실린 벽우진의 사자후에 고루거각들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숙소에서 잠자고 있던 모든 인원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벽우진의 외침에 헐레벌떡 뛰어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다들 병장기를 챙긴 상태라는 것이었다.

“장문인!”

“대호법님도 느끼신 모양이군요.”

“숫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일급살수들 이상입니다.”

설백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기감에 느껴지는 숫자가 상당했던 것이다.

더구나 현재 곤륜파에는 일반 양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일단은 한 곳으로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설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우진의 사자후에 사람들이 발 빠르게 반응했다고 하지만 집결하는 속도보다 살수들이 이동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또한 벽우진이 토해낸 사자후 역시 살수들도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 봐야지요.”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설백이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호법들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기에 이동하면서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파파팟!

이윽고 설백을 포함해서 여덟 명의 호법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들이 포위하듯 달려들고 있기에 호법들 역시 그에 맞춰 움직인 것이다.

“사형!”

“넌 이곳을 지키고 있어. 난 싹 다 때려잡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한 명 정도는 이곳에서 사람들을 통솔하고 지켜야했다.

그걸 청민에게 맡긴 벽우진은 몸을 날렸다.

일단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면서 벽우진이 미간을 좁혔다.

우두머리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전황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지만 알고 있는 것 역시 가장 많을 터였다.

어쩌면 지금껏 찾아내지 못한 배후일 수도 있고.

‘살수문파와는 부딪친 적이 없는데 말이지. 게다가 기운이 상당히 이질적이야.’

미간의 골이 점점 더 깊어졌다.

가까워질수록 침입자들의 기운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낯선 기운들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운들에 벽우진은 의문만 깊어갔다.

“일단 잡아놓고 알아봐야겠군.”

점점 더 깊어지는 의문에 벽우진이 이내 생각을 끊었다.

더 고민해 본다고 한들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스스슥!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벽우진의 신형이 사라졌다.

가일층 속도를 높이자 잔상도 남지 않은 것이었다.

“얼른 나와!”

“서둘러야 해!”

“빨리빨리!”

멀리서 들려오는 비상종소리에 장하삼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산적들의 산불 이후 그를 비롯한 속가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공격이 올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의외로 놀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3층은?”

“다 내려왔어요!”

“4층은?”

“제가 마지막이에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소리치던 장하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 다 빠져 나온 것 같아서였다.

“형님! 우리도 얼른 가요!”

더 이상 건물에서 아이들이 빠져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한 송찬승이 소리쳤다.

다른 아이들부터 보낸다고 이제껏 남아 있었기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그때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앙!”

“먼저 가!”

“으으!”

“괜찮으니까 먼저 가! 아이 데리고 바로 뒤따를 테니까!”

2층의 가장 안쪽 방에서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 장하삼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서 울고 있는 아이를 직접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송찬승은 머뭇거렸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특히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에잇! 가자!”

잠시 머뭇거리던 송찬승이 이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대장부가 겁이 난다고 해서 동료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산불 때와 달리 지금 경내에는 벽우진도 있었고 말이다.

스르륵.

송찬승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작은 그림자가 입구에 일렁였다.

그러더니 이내 작은 체구의 흑의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귀신처럼 솟아났던 것이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그 거리에서 수하들을 감지했을 줄이야.’

모습을 드러낸 은월단주의 두 눈에 은은한 감탄이 서렸다.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하니 이렇게 빨리 자신들을 감지할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똑같은 인간인 것은 다르지 않지. 한 손으로는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고.’

복면 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이번 작전에 은신과 잠입에 특화된 은월단 전부가 투입되었다.

그런 만큼 제아무리 패선이라고 해도 완벽히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슬슬 제대로 흔들어 볼까.’

흑의복면인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타다다닷!

전력으로 계단을 올라간 장하삼이 황급히 2층 복도 끝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울고 있는 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혜정아.”

“사, 삼촌?”

“많이 놀랐지? 이리 와.”

이제 일곱 살에 불과한 기혜정과 눈을 마주하며 장하삼이 빙긋 웃었다.

놀란 기혜정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무, 무슨 일이에요?”

“일단 나하고 같이 내려가자. 가면서 설명해줄게.”

“어, 언니들은 다 어디 갔어요?”

“언니들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어서 가자.”

“형님!”

장하삼이 기혜정을 어르고 달랠 때 송찬승도 도착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으로 장하삼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찬승 오빠!”

“역시 너였구나. 난 딱 너일 거 같더라. 평소에도 잠만 들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귀가 어둡더니.”

“시간 없어. 얼른 가자.”

달래는 장하삼과 달리 송찬승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기혜정을 덥석 업었다.

기혜정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어서였다.

“으응.”

“빨라도 놀라지 마. 서둘러야 하니까.”

“가자.”

송찬승이 기혜정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장하삼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갑자기 나타난 두 개의 검은 인영만 아니라면.

“뭐, 뭐야?!”

“히끅!”

난데없이 바닥에서 솟아나는 두 개의 인영에 먼저 복도로 나갔던 송찬승 역시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송찬승과 기혜정이 대경실색한 반응에도 작은 체구의 흑의복면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세 사람을 주시하기만 했다.

‘어느 틈에···.’

앞뒤로 포위당한 형세에 장하삼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쪽이라도 뚫려 있으면 두 아이를 보낼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주르륵.

빠르게 전후를 살피는 장하삼의 이마 위로 굵직한 땀방울이 흘러나왔다.

극도로 긴장하자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하삼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질식할 듯한 긴장감에 땀을 닦을 여유조차 없는 것이었다.

스윽. 슥.

길목을 막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두 흑의복면인의 모습에 송찬승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최대한 장하삼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송찬승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대찬 성격의 그였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 역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더구나 누가 봐도 암살자의 복장이었기에 송찬승의 두 눈은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는 기혜정을 위해서 최대한 티를 내고 있지 않는 것뿐.

툭.

그런데 그때 옆구리에서 묘한 감촉이 파고들었다.

분명 기혜정은 양손으로 그의 등짝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또 다른 손이 느껴졌던 것이다.

스윽.

두 눈만 드러나 있는 흑의복면인을 계속 주시하면 송찬승은 가까스로 눈알을 굴려 옆구리 쪽을 확인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손짓에 재빨리 보고서 시선을 다시 원상복귀 했다.

‘방향이···. 아!’

그 흔한 살기 하나 뿌리지 않고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으나 송찬승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이들이 철저하게 훈련된 암살자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겨우겨우 장하삼의 손짓을 확인한 송찬승이 눈을 빛냈다.

수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뒤늦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나가면 금방 뒤를 붙잡힐 거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공격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움직인다면 최소한 다리 정도는 끊어놓겠지.’

< 제 54장. 은월단(隱月團).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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