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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패선-171화 (171/325)

< 제 53장. 다가오는 암운(暗雲). -03 >

송찬승이 얼굴 가득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아닌 말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무공수련을 한 이가 장하삼이어서였다.

더구나 가장 연장자가 장하삼이기도 했고.

그리고 송찬승은 장하삼이 무공수련에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아이들을 챙기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더 염려했다.

“괜찮아. 저녁 먹고 충분히 쉬었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관절을 생각하셔야죠.”

“···아직은 멀쩡하거든? 서른여섯 살이 늙은 건 아냐.”

“그래도 이십대와는 비교할 수 없죠. 삼십대도 완전히 꺾였잖아요.”

“······.”

명치를 때리는 듯한 한 마디에 장하삼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형님도 관리 하셔야 해요. 뱃살이 많이 들어가기는 했는데, 그래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장가도 가셔야죠.”

송찬승이 품평을 하듯 장하삼을 중심에 두고 한 바퀴를 돌았다.

특히 송찬승의 시선은 유독 오랫동안 장하삼의 배에 머물렀다.

배불뚝이처럼 툭 튀어 나와 있던 배가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후덕한 인상이었다.

장가를 가려면 좀 더 빼야 했다.

“장가는 무슨.”

“우리 아버지가 남자는 능력이랬어요. 나이가 지천명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나이 어린 신부들로 삼처사첩을 들일 수 있다고요. 그런데 형님은 아직 불혹도 안 되셨잖아요.”

“나이도 어린 게.”

삼처사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송찬승의 모습에 장하삼이 코웃음 쳤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인 녀석이 삼처사첩을 운운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알 건 다 알죠. 으흐흐흐! 참고로 제 목표는 다섯 명입니다. 최소 다섯 명!”

“뭐?”

부끄러움도 없는지 당당히 한 손을 쫙 펼치며 하는 소리에 장하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것 같아서였다.

“영웅에게 삼처사첩은 흠이 아니니까요.”

“그건 영웅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저도 영웅이 될 거예요. 재능도 충분하고 말이죠.”

“인정하기 싫은데, 부정할 수가 없네.”

장하삼이 입맛을 다셨다.

그를 좌절감에 빠지게 만드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송찬승이어서였다.

문일지십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일지육 내지 문일지칠까지는 되는 재능 넘치는 아이가 송찬승이었다.

그는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소화하기도 벅찬데 말이다.

“천재는 외로운 법이라지만 다행히 터를 잘 잡은 것 같아요. 여기에는 워낙에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서. 호법님들도 그렇고, 장로님들도 고수시고. 장문인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겸손해진다고나 할까요?”

“재능만 믿다가 훅 가는 수재들도 많다.”

“으잉? 은근슬쩍 수재로 내리시네요? 저 정도면 천재 아니에요?”

“천재는 대사형이시지.”

“으, 그건 인정.”

송찬승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속가제자들 중에서는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그였지만 그럼에도 양일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수준차이라고나 할까.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데 이룩한 경지는 감히 비벼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사문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이기도 하지.”

“그렇죠. 익히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공의 수준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슬슬 졸리지 않아?”

“아뇨. 형님이랑 대화해서 그런지 너무너무 말똥해요. 그리고 저도 검 가지고 나왔어요.”

송찬승이 씨익 웃으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뽑았다.

늦은 시간까지 수련에 매진하는 장하삼의 모습을 보자 사실 그도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지금은 재능의 힘으로 앞서나가고 있었지만 매일 간격이 좁혀진다면 언젠가는 따라잡힐지 몰랐다.

‘자극도 되고 말이지.’

별 볼일 없는 재능을 가지고도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그보다 많은 재능을 가진 자신이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노력하는 게 맞았다.

“밤에 잠 안 자면 키 안 큰다. 남자에게 키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지?”

“전 아버지가 커서 잘 클 거예요. 그리고 지금 시간이 새벽도 아니고 늦은 밤도 아닌데요.”

“그러다가 키 안 크면 내 탓하려고 그러지?”

“설마요. 저 그렇게 좀생이 같은 성격 아니에요. 그리고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덜 외롭고 좋지 않아요?”

“뭐, 그렇긴 하지.”

장하삼이 부정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수련보다는 확실히 같이 하는 게 더 자극이 되고 좋았다.

더욱이 그 상대가 재능 넘치는 송찬승이라면.

“저는 얼른 고수가 되고 싶어요. 그래야 곤륜산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두 번 다시는 곤륜산이 불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엄청 무기력했었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사방이 불타던 그때를 떠올리며 장하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그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전쟁에서 왜 화공을 그렇게 사용하는지도 말이다.

당해보니 화공만큼 무서운 전술이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강해져야 해요.”

“삼처사첩을 위해서가 아니라?”

“흐흐! 그것도 이유 중에 하나지만 역시 우선순위는 곤륜산이죠. 제 2의 집이나 마찬가지에요.”

“근데 아예 잃기만 한 것은 아니야. 산불로 인해서 우리들의 결속력이 단단해진 건 사실이니까.”

“다들 눈이 돌아가기는 했죠. 사형제들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고.”

한동안 산적들을 움직인 배후를 찾는다고 수많은 이들이 청해성을 들쑤시고 다녔다.

주로 청해성에서 활동한 산적들이기에 배후 역시 마찬가지로 청해성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더구나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들의 자식이 죽었을 뻔했기에 더더욱 악착같이 흔적들을 찾아다녔다.

안타깝게도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르신들이 계속 찾고 있으니 곧 흔적을 찾아내겠지. 이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으니까.”

“실패했으니 당연히 다시 시도하지 않겠어요?”

“내 말이.”

“그럼 역시 저희들이 할 일은 하나뿐이네요.”

“대련할까?”

대화하는 사이 체력을 충분히 회복한 장하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송찬승 역시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제가 또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죠.”

“으이그.”

넉살 좋게 대답하는 송찬승의 모습에 장하삼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소청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던 것이다.

“전력을 다하셔도 되요. 근력은 제가 좀 딸리지만 대신 전 몸이 날렵하니까요!”

“내공도 네가 많지.”

“으히히! 그건 차마 말 못했는데.”

“하지만 내 연륜을 무시하면 안 되지!”

말과 함께 검이 빠르게 송찬승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철검이기는 하지만 날이 없는 무딘 상태이기에 몸에 닿아도 베이지는 않았다.

모습만 철검일 뿐 실제로는 몽둥이나 다름없었다.

“어어! 이건 반칙이에요!”

“연습도 실전 같이 하라는 말 잊었어? 상대가 정중하게 초식명까지 외치면서 들어올 거라 생각하면 안 되지!”

“으헉!”

기습과도 같은 공격으로 승기를 잡은 장하삼이 폭풍처럼 몰아붙였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송찬승을 이길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송찬승도 만만치 않았다.

수세에 몰렸음에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반격할 틈을 노렸다.

“흐읍!”

“비겁해요! 어린 아이에게 너무 전력으로 하는 거 아니에요?”

“잘만 피하면서. 말도 다 하고!”

“이크!”

투덜거리던 송찬승이 땅을 박찼다.

이번 공격은 진짜 위험했었기에 몸을 날린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줄어들었다.

장하삼이 진지하게 대련에 임하는 것처럼 송찬승도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따다다당!

경쾌한 충돌음과 함께 두 사람의 뜨거운 땀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대련하는 소리에 잠을 안 자고 있던 속가제자들도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손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빛나는 초승달 아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이의 체격이 상당히 작았다.

옷차림만 보면 살수처럼 보이는데 체구는 어린아이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왜소했던 것이다.

“아쉽군.”

흑의복면인과 나란히 서 있던 장년인이 두 눈에서 시퍼런 귀광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산불이 크게 났다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피해가 적은 것 같아서였다.

“모조리 불타버렸어야 했는데. 쯧! 역시 머저리들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장년인이 혀를 찼다.

불을 피우는 그 쉬운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산적들을 탓한 것이었다.

“확실히 원한이 크긴 한 모양이야.”

“그야 이를 말입니까. 본가를 망하게 만든 원흉인데.”

“이야기는 들었어. 제대로 퇴출당했다고.”

부르르르!

퇴출이라는 말에 장년인이 몸을 떨었다.

과거 굴욕을 당하던 때가 떠올라서였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막대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워워. 진정하라고. 듣자하니 패선이 대단한 고수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재수 없는 놈이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입니다. 소림무제도 어쩌지 못했던 북해빙궁주를 단독으로 쓰러뜨린 고수이니.”

“중원제일인에 제일 근접하다고?”

“예.”

장년인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바로 그 무위 때문에 자신이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잊지 않았다.’

벽우진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가문들과 문파들을 그는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뼈에 새기듯 머리에 톡톡히 기억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원에서 제일 강할 뿐이지.”

“가능하시겠습니까?”

“내가 질 것 같나?”

중원인들과는 다른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흑의복면인이 히죽 웃었다.

물론 복면을 하고 있기에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가의 주름이 그가 웃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패선을 만만히 봐선 안 됩니다. 그 놈을 얕잡아 보았다가 당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당해본 자의 경험담인가?”

“···예.”

장년인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모습에 흑의복면인은 오히려 웃었다.

“우린 방심하지 않아. 암살자에게 실패는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리고 정면대결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다르지. 어둠이 내린 순간부터는 우리들의 세상이니까.”

스스스스···.

두 사람이 서 있는 공터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찾아온 건 바람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모인 것인지 주변의 나무 위에는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색 야행복에 복면을 한 모습으로 말이다.

“단주님의 실력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곤륜파에는 고수들이 많습니다. 소수정예라고 할까요. 특히 패선과 호법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알고 있어. 조사는 충분히 했으니까. 그러니 너는 마음 편히 기다리기만 하면 돼. 네가 원하는 대로 패선을 생포해 올 테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따 보자고.”

작달막한 체구의 흑의복면인이 사라졌다.

갑자기 땅으로 꺼진 듯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눈을 빛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들 역시 소리 없이 사라진 뒤였다.

스슥!

“주군.”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모두가 떠나고 장년인이 홀로 남아 서 있을 때 그의 앞으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흑의무복을 입은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장년인의 앞에 나타나 부복했던 것이다.

“걱정되느냐?”

“패선은 강합니다. 아무리 은월단주가 성주의 제자라고 하지만 패선을 잡아오기는 힘들 겁니다.”

“맞아. 패선은 강하지. 하지만 암습을 당한 경험은 없을 거야. 그 놈 성격상 암살자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도 못할 거고. 그 방심을 노린다면 은월단주에게도 승산은 있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지 않느냐.”

< 제 53장. 다가오는 암운(暗雲).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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