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69화 (169/325)

< 제 53장. 다가오는 암운(暗雲). -01 >

언덕이 통째로 검게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며 벽우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눈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곤륜산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물론 곤륜산 전체로 보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벽우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타는 건 순식간이지만 회복 되는 데에는 적어도 수십 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르륵.

한쪽 무릎을 굽히고서 바닥에 앉은 벽우진이 잿가루로 뒤덮인 흙을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표면만 검게 변했을 뿐 아래는 평범한 흙과 똑같았다.

거대한 화마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흙은 멀쩡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활도(活道)를 깨우쳤다면 어땠을까.”

벽우진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인간으로서 닿기 힘든 경지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그 역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거대한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벽우진은 새삼 깨닫고 있었다.

“적어도 시간은 단축했을 텐데.”

얼굴 가득 아쉬운 기색으로 중얼거리며 벽우진이 언덕을 올라갔다.

그러자 언덕 아래로 민둥산처럼 헐벗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벽우진은 활도에 관한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땅을 뒤집는 게 먼저였다.

쿠르르릉!

원래는 숯처럼 변한 나무들을 나른 후에 땅을 뒤집어서 고르게 만들어주어야 했지만 벽우진은 그 모든 걸 한 번에 했다.

검으로 땅을 깊게 헤집고 허공섭물로 숯덩이로 화한 나무를 집어넣었던 것이다.

크르르릉!

그뿐만 아니라 왼손으로는 뒤집은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장강을 일으켜 순식간에 평탄화 작업을 마쳤던 것이다.

“오늘 내로 이 구역은 끝내놓자.”

다른 사람이라면 시도는커녕 생각도 하지 못할 방법이었지만 벽우진은 가능했다.

내공도 많을뿐더러 딱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사용했기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이 곤륜산인 것도 한 몫 했고.

우우우웅!

“너희들은 또 왜?”

우웅! 우웅!

벽우진이 쉴 새 없이 양손을 놀리며 작업을 하는데 한동안 잠잠했던 일월쌍환이 진동했다.

괜히 짝이 아니라는 듯이 동시에 몸을 떨어댔던 것이다.

“잘 지내다가 왜 그래?”

우우웅!

투정을 부리듯 잘게 떠는 일월쌍환의 모습에 벽우진이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백옥처럼 매끈한 양팔과 함께 각기 다른 빛깔의 일월쌍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도 좀 사용해달라고?”

웅!

각각 청색과 홍색으로 이루어진 일월쌍환이 크게 진동했다.

마치 이제야 자신들의 뜻을 알아차렸냐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반응에도 벽우진은 일월쌍환에 공력을 주입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소매를 내렸다.

웅웅웅웅!

그와 동시에 일월쌍환이 거칠게 반항했다.

잘 알아듣고도 왜 이러냐고 따지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벽우진은 단호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니까? 너희들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래도 참아. 너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일러.”

웅웅!

일월쌍환이 거칠게 반응했다.

도대체 언제가 그 때이냐고 따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상검에 질투하지 말고. 사실 무상검을 이런 일에 쓰는 것도 미안한데. 나름 장문령부인데 땅 가는 일에 쓰고 있잖아.”

우우우웅!

“그래도 안 돼. 참아. 그냥 구경이나 해.”

떼를 쓰듯 조르는 일월쌍환을 어르고 달래며 벽우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땅거죽을 뒤집어버리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홀로 일당백, 일당천의 작업량을 소화했던 것이다.

“여기 끝내고 목장에나 가봐야겠다. 오늘 소랑 말들이 온다고 했으니.”

벽우진이 속도를 가일층 끌어 올렸다.

오늘 목표치를 채우고 빨리 목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특히 경계를 위해서 똘똘한 강아지들도 데리고 오기로 했기에 벽우진은 살짝 기대하는 얼굴로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

콰르르릉.

그러자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메워지기를 반복했다.

똑똑똑.

“들어오시죠.”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다.

뜻밖에도 하오문주인 설향이 직접 곤륜산을 올랐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

“그렇구려. 잘 지내셨소이까?”

“저야 늘 똑같지요. 그보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먼저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설향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보필하듯 서 있던 양선 역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청해성 지부장인 그녀 역시 산적들의 움직임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해서였다.

“사과할 것 없소이다. 막말로 마음먹고 숨어드는 이들을 어찌 찾아낸단 말이오? 곤륜산이 작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원의 다른 곳들처럼 산 주변에 마을이 많은 것도 아닌데.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비밀리에 움직이는데 하오문이라고 해서 별 수 있겠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설향이 눈치를 살폈다.

엄밀히 따지면 그녀의 잘못은 없었다.

하오문이 중원제일을 논하는 정보조직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모든 문파, 사람들의 움직임을 죄다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건 개방도 마찬가지였다.

‘약초꾼들이나 사냥꾼들을 보이는 족족 죽이기도 했고.’

설향도 변명할 거리는 많았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적들은 의외로 철두철미하게 이번 산불을 계획했다.

철저히 세 명 내지 네 명씩 소수로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던 것이다.

산적 출신인 만큼 산에 익숙하기도 했고 말이다.

“나 역시 본산을 노릴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고.”

벽우진의 얼굴에 쓴웃음이 서렸다.

정확히 자신이 없을 때 본산을 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더구나 정면대결이 아닌 산불을 계획했다는 점에서 벽우진은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저희 역시 그랬습니다. 곤륜산 자체를 노릴 줄은.”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되오. 그보다 알아낸 것은 있소?”

“주도자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입을 열기는 했으나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습니다.”

“경청하겠소.”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확실히 고문기술자는 다른 것 같아서였다.

“배후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로 지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접선했던 이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야행복 차림에 복면을 하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답니다.”

“거짓말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전문가가 직접 알아낸 것이니까요.”

“으음.”

더욱더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상황에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설향과 양선은 안절부절 못했다.

시원스럽게 뭐라고 알아내서 보고를 하면 당당하기라도 할 텐데 그러질 못해서였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주도면밀하구려.”

“보통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제 예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배후는 이 상황마저도 상정해 두었을 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연결고리를 끊을 생각으로 복면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조직일 가능성고 있고.”

“예.”

한두 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숫자를 동원한 작전이었다.

거기다 기름까지 생각하면 한두 푼이 아니었다.

물론 부호라면 혼자서 이만한 인원을 운용하는 게 가능하지만 그랬다면 미세한 흔적이라도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골치가 아프군. 저 쪽은 여기 상황을 낱낱이 알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

“···죄송합니다.”

“문주가 미안해 할 것은 없소. 이 모든 것 또한 본 파의 업보이니.”

벽우진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천하의 하오문조차 꼬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그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하오문이 일부러 정보를 숨겼을 가능성.

‘아니. 이건 희박해. 하오문이 숨길 이유가 없어.’

무릇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하오문과는 원한이 쌓일 만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하오문 쪽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하면 모를까.

게다가 곤륜파의 정보를 팔았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했고.

‘하오문이 안 된다면···.’

벽우진이 눈을 빛냈다.

하오문의 정보력은 중원제일을 논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하오문 못지않은 정보력을 지닌 곳이 무림에는 하나 더 있었다.

“일단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더욱 쥐어짜면 쓸 만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부탁드리오.”

“나머지는 어찌할까요?”

“전혀 모르는 게 확실하오?”

“예. 현재 붙잡혀 있는 인원들은요.”

설향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문내에서 최고 실력자가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밤에 제가 직접 처리하겠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잡것들은 저희가 처리해도···.”

“곤륜을 노렸으니 내가 끊는 게 맞소이다.”

“알겠습니다.”

설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굳이 선을 넘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단은 조금은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문주도 이만 쉬시구려. 올라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텐데.”

“예.”

설향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 그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아.”

설향을 대신해 양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벽우진은 그저 손을 들기만 했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그 모습에 둘은 아쉬운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사천당가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한데.’

등을 돌리며 설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갈현이 따로 벽우진을 찾아간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제갈세가에서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하자 설향은 아쉬웠다.

‘일단은 물러나야 하나.’

설향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무림에서 곤륜파의 영향력은 더욱더 커질 터였다.

이미 구대문파 복귀에 대한 이야기가 사방에서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고.

게다가 앞으로의 강호정세를 생각하면 곤륜파와의 관계 개선은 무조건 이루어져야 했다.

‘아직 마교가 남아 있으니까.’

설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약육강식과 강자존을 절대법칙으로 삼는 마교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그걸 직접 겪었기에 그녀는 마교의 마인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들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때문에 그녀와 하오문에는 든든한 그늘이 필요했다.

‘적어도 곤륜파는, 아니 패선은 대화가 통하니까.’

찾아보면 곤륜파보다 더 크고 강대한 전력을 갖춘 곳은 꽤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독대가 가능한 곳은 없었다.

또한 하오문주로서 대우해 주는 곳도 없었고.

그렇기에 설향과 하오문에게 있어 곤륜파와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했다.

“제가 이따가 넌지시 물어볼까요? 내일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요.”

“그게 좋겠구나. 아무래도 얼굴을 자주 보는 게 좋겠지.”

“바로는 조금 그러니 반 시진 후에 사람을 보낼게요.”

“더불어 다시 한 번 조사하는 것도 잊지 말고. 사람이 한 일이니만큼 분명히 흔적은 있어. 우리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일 뿐. 특히 정보를 판 녀석을 중심으로 깊게 파봐.”

“알겠어요.”

양선이 눈을 빛냈다.

이번 일로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은 설향만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도 아니고 청해성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양선 역시 이를 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야. 우리 조직 내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불어 태만했던 정신도 붙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할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내 집 단속이 최우선이야. 바깥일은 내부단속부터 확실하게 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곤륜파를 봐. 곤륜산이 불타기는 했지만 사망자는 없어.”

“예.”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놀랐던 양선이었다.

그렇기에 설향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흘려듣지 않으며 양선이 발걸음을 옮겼다.

< 제 53장. 다가오는 암운(暗雲).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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