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2장.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02 >
값비싼 야명주가 빛을 발하는 동혈 안에는 사지가 결박되어 있는 산적들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서로를 마주볼 수 있도록 동혈 내부에 나란히 매달아 두었던 것이다.
거기다 두 다리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의 간격으로 조여져 있는 족쇄가 말이다.
“족쇄에 철구(鐵球)까지 달아놨네? 저렇게 할 필요까지 있어? 철이 아까울 것 같은데.”
“점혈해 놓은 상태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저절로 해혈이 되는 특이체질도 있다고 비 호법님께 들었습니다.”
“부럽다. 나도 그런 체질이었으면 좋겠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가지시지 않았습니까.”
쓸데없는 것에 욕심을 내는 벽우진의 모습에 청민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벽우진은 진심이었다.
“히, 히에엑!”
“패, 패선이다!”
“헙!”
두 사람의 대화에 삶을 포기한 듯 늘어져 있던 산적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벽우진을 알아본 산적이 내지른 비명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라서였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장문인.”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어. 뒤쪽에 있는 아이가 고문기술자야?”
“처음 뵙겠습니다, 장문인.”
중년이 한참 전에 지났음에도 아이라고 말하는 벽우진의 모습에 고문기술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약관으로 보이는 벽우진이 그리 말하니 더욱더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하지만 벽우진의 실제 나이를 알기에 고문기술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평범하게 생겼네.”
“고문기술자라고 해서 인상이 다 흉신악살인 것은 아닙니다.”
“맞아. 나만 하더라도 경장이나 무복을 입으면 절대 도사로 안 볼 걸.”
“하하하.”
고문기술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맞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부정하기에도 애매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아낸 거는 좀 있어?”
“대부분이 청해성에서 산적질을 하던 놈들입니다. 정확하게는 호법님들에게 당한 산채의 잔당입니다.”
“복수라 이건가? 그 정도로 결속력과 동료애가 깊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저희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알아봤는데, 목적은 복수가 맞습니다. 다만 미심쩍은 점이 있습니다.”
담담히 말을 이었던 설아린이 한 호흡을 쉬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산적들을 둘러봤다.
흠칫!
설아린과 시선이 마주친 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설아린이 예쁘장한 미모와는 다르게 악독한 성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오늘까지 그녀의 손에 절명한 이가 열이 훌쩍 넘었다.
“미심쩍은 점?”
“무려 오백 명이 넘는 인원이 이번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그것도 기름 항아리를 하나씩 들고서요.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이들이 말이지요. 물론 아무리 돈이 없어도 기름을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백 명이 넘는 인원을 한 번에 모을 수 있었을까요?”
“배후가 있다?”
“처음에는 의심이었지만 지금은 칠 할 정도 확신합니다.”
벽우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한두 명도 아니고 백 명 이상이 모여서 도모한 일이었다.
더구나 금전적인 부분도 의심스러웠다.
같은 소속도 아니고 각기 다른 산채의 잔당들이 갹출을 해서 복수를 한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가능성은 희박했다.
“확실히 수상하긴 하군.”
“며칠의 시간을 더 주시면 확실하게 알아내겠습니다.”
“근데 하오문이 이렇게까지 나설 필요가 있나?”
“···사실 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의문이 짙게 서린 벽우진의 눈빛에 설아린이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누가 봐도 그녀는 벽우진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왜? 우리 정보라도 팔았어?”
“···어떻게 아셨어요?”
설아린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설마 하니 벽우진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못 팔 이유가 없잖아? 우리 관계가 사천당가처럼 혈맹인 것도 아니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인데. 더구나 하오문은 정보를 파는 게 주업인데 의리를 생각해서 우리 정보를 팔지 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미안해 할 것 없어.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사간 정보이니까. 다만 형평성은 맞춰 주었으면 해. 우리도 값을 치를 테니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는 식으로.”
“안 그래도 역추적 중입니다. 다방면으로요.”
설아린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쉽게 풀리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아직 벽우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부디 그 정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돈이 아깝지 않게 말이야.”
“저희들의 실수이니 만큼 무상으로···.”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본 파와 하오문의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좋아.”
“으음!”
명확하게 선을 긋는 벽우진의 모습에 설아린은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하오문을 밀어내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더 이상은 신뢰하기 힘들다는 건가. 칫!’
설아린이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나 설향이 생각하기에 아직은 멀어질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좀 더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었지.
그런데 벽우진이 거리를 두려는 듯하자 설아린은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사부님께 서신을 보내야 하나?’
설아린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벽우진은 그녀가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동굴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혈흔만 있고 주인이 없는 족쇄들을 지그시 살펴봤던 것이다.
“이렇게 보니 진짜 고문실 같네.”
“모두 다 알아내면 깔끔하게 정리할 겁니다.”
“그게 좋겠어. 굳이 본 파에 뇌옥이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직 치를 죗값도 남아있고요.”
벽우진이 몸을 돌렸다.
원하는 것을 다 들었으니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가자.”
“예, 사형.”
벽우진이 청민을 이끌고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직 둘러볼 곳들이 많았다.
제법 오랜 시간을 떠나 있었지만 옥청궁의 모습은 똑같았다.
산불이라는 큰 위기를 겪었음에도 자그마한 그을림 하나 없었다.
아무래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아예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냄새는 남아있군.”
겉은 멀쩡했지만 전각 곳곳에는 산불로 인한 탄내가 짙게 서려 있었다.
그 점이 벽우진은 씁쓸했다.
어째 자신의 대에서 유독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이 모든 걸 내다 보셨다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준비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면 이게 최선이었던 겁니까?”
벽우진이 집무실 안에 마련된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며 중얼거렸다.
그런 벽우진의 시선은 구름 한 점 없는 한겨울의 하늘로 향했다.
묘하게 차갑게 느껴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벽우진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만큼 완벽하게 대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다사다난한 거 아닙니까.”
시조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도 결국 그 계획대로 움직이는 건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인형이 아닌 이상, 더구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시조의 뜻이 완벽히 전해지는 건 불가능했다.
천기누설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고.
하지만 그런 이유들을 생각하더라도 벽우진은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문지화에 산불에. 이상하게 불이랑 연관이 깊네. 혹시 내 성격 때문인가?”
벽우진이 웬일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팔자가 사나운 자신이 장문인이 되어서 덩달아 곤륜파의 팔자 역시 사나워진 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털썩!
잠시 환기를 시키며 바깥공기를 쐬던 벽우진이 자신의 지정석에 널브러졌다.
거의 눕듯이 의자와 자신의 몸을 일체화시켰던 것이다.
“오늘도 확인해야 할 보고서들이 산처럼 쌓여 있구나.”
사천성에 가 있는 동안 차곡차곡 쌓인 게 분명한 종이의 산을 보며 벽우진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가 피로를 덜 느끼고 잠도 하루에 반 시진 정도만 자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일만 해서는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업무분담을 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게 다 그 놈들 때문이야.”
벽우진은 오늘도 아침부터 고문기술자들과 심층면담을 하고 있을 산적 놈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정신 나간 그놈들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 건 분명해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현재 곤륜파의 달라진 처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일하기 싫은 티를 대놓고 드러냈지만 그래도 할 일은 했다.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쌓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이런 업무조차 장문인이 해야 할 일 중 하나이기도 했고.
장문인은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하다 보니 늘기는 하네. 기분 좋은 소식도 있고.”
벽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예전이었다면 청민이나 서진후 단 셋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는데 이제는 달랐다.
속가제자가 된 가문에서, 가족들이 산적들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사방에 사람을 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배후에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두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더불어 후원금이라는 이름하에 생각지도 못한 거금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 정도의 재력이 되는 이는 몇 없기는 했지만 적은 금액이라도 도와주려 한다는 게 벽우진의 심금을 울렸다.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건가.”
그동안 모아 놓은 금액이 적지 않았기에, 따로 투자해 놓은 것도 있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은 없었다.
다만 애써 준비했던 게 다 불타버렸기에 아까울 뿐이었지.
특히 목장에 큰 정성을 들이던 심소혜가 떠올라 더욱 씁쓸했다.
울먹거리던 제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무거워졌던 것이다.
“최대한 빨리 다시 만들어 봐야지. 짐승들이 먹을 거야 구해오면 될 일이니.”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새카만 재 밖에 남은 게 없었다.
심지어 땅조차 다 타버렸기에 개간 작업이 필요했다.
속가제자들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불타버린 영역이 워낙에 넓기에 벽우진은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다른 문파에 비해 인력이 부족한 게 곤륜파 아니던가.
“그래도 해야지. 봄이 오기 전에.”
할 일이 많았기에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정하며 벽우진이 책상 위를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각 문파에서 보내온 서신들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심심한 위로가 담겨 있는 서신들이었다.
그것들을 보며 벽우진은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음.”
구파일방을 위시로 오대세가와 나름 군소방파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서찰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벽우진은 간략하게나마 답장을 써주었다.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왔는데 답장을 보내주지 않는 건 또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쓰면서 벽우진은 도장처럼 찍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붓으로 쓰면 되는 일이고, 실제로 오래 걸리는 작업도 아닌데 이상하게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차피 내가 쓴 서신을 모여서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지.”
똑똑똑.
벽우진이 조금씩 다르게 쓰던 서신을 아예 똑같이 쓸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제 52장.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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