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2장.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01 >
벽우진이 망연자실한 눈으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곤륜산을 올려다봤다.
한겨울이라 푸르름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울창하고 광활한 수림을 가지고 있던 산이 바로 곤륜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반 가까이가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땅바닥에는 검은 재가 가득했고 말이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이들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하나같이 나라라도 잃은 얼굴이었다.
특히 심소혜는 벌써부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재만 남아 있는 부분을 보자 가축들이 어찌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심소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래. 아직은 몰라. 직접 보기 전까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돼.”
“그치?”
“그럼.”
심소천이 막내동생을 달랬다.
하지만 사실 그는 회의적이었다.
이만한 산불이 났는데 가축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더더구나 곤륜파를 노리고서 지른 산불이라고 하지 않던가.
‘약초밭도 날아갔겠지.’
갖은 정성으로 키웠던 약초밭 역시 전부 다 타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심소천은 미리 마음을 가다듬었다.
직접 봤을 때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
“일단 가자.”
“예, 사부님.”
반쯤 벌거숭이산이 되어버린 곤륜산의 모습에 벽우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맺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그것을 알기에 무리해서까지 달려온 것이었고.
저벅저벅.
하지만 걸어가는 내내 벽우진을 비롯해서 진구와 제자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재만 남은 산길을 오르자 하기 싫어도 자꾸만 불길한 상상을 하게 되어서였다.
게다가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방향은 알지만 모든 게 죄다 타버리니 헷갈렸던 것이다.
“제발. 제발!”
“모두 무사하실 거야. 걱정하지 마.”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자. 호법님들도 계시잖아. 큰일은 없을 거야.”
아이들이 초조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보지 못했다.
곤륜산에 오르면서 벽우진의 표정이 서서히 안정감을 되찾고 있음을 말이다.
“아!”
“장로님!”
“대호법님!”
헐레벌떡 달려가던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변은 잿더미가 가득했지만 산문은 그들이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였다.
물론 곳곳에 그을음이 남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산문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너희들도 고생했구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흐윽!”
남자애들은 얼굴 가득 안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애들은 눈가를 적셨다.
멀쩡할 거라고, 건재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가닥 불안감이 있었는데 그게 말끔히 사라지자 감정이 복받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자아이들을 청민과 설백은 가만히 안아주었다.
“하, 할아버지!”
“허허허! 할애비 안 죽었다. 적어도 손주들 시집장가 갈 때까지는 절대 안 죽을 거니까 걱정 말거라.”
오죽 하면 서예지조차 울면서 서진후의 품에 안겼다.
그것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다.
서진후는 그런 손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손녀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진짜 죽을 뻔했으니까···.’
지옥의 초열지옥이라는 곳이 이렇지 않을까 싶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산불이 곤륜파를 덮쳤었다.
그조차도 보는 순간 압도되어 잠시 동안은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그 산불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서진후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 빠져나갈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었다.
‘청민 사형이 아니었다면···.’
겁에 질린 그와 달리 청민은 너무나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리고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만약 그런 청민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모두가 무사히 살아남지는 못했을 터였다.
또한 벽우진의 선견지명이 없었어도 힘들었을 것이다.
“사형.”
“고생했다. 진짜 고생했어.”
“아닙니다. 미연에 알아내고 막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터는 지켜냈지만, 곤륜산은···.”
제자들과 인사를 끝낸 청민이 얼굴 가득 죄송스러운 기색을 띠며 다가왔다.
그에게 맡기고 갔는데 사문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 자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벽우진은 웃으며 청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무는 다시 심으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지. 오히려 난 네가 대견스럽다. 사람도 지키고 본 파의 터도 지켜냈으니까.”
“벌써 다 아시는 겁니까?”
“말했지 않느냐. 내가 곤륜산이고, 곤륜산이 나라고.”
“허허허.”
평소에는 허세로 가득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듬직하게 다가왔다.
또한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 벽우진은 마치 사망자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부상 정도는?”
“탈진 정도입니다. 몸살을 앓은 이들이 있기는 한데 지금은 다들 괜찮습니다.”
“애들이 놀랐겠어. 어린 애들인데···.”
벽우진의 두 눈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아이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이제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 호법님 덕분에 지금은 평소와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수련보다는 곤륜산을 청소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서두르는 게 좋지. 그래야 다시 나무를 심을 수 있으니.”
타다 만 나무들은 물론이고 숯처럼 바짝 타버린 거목들을 바라보며 벽우진이 입맛을 다셨다.
다시 예전의 푸르른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천년마교가 쳐들어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일단 들어가자. 아이들부터 확인하게. 주변도 둘러보고.”
“제가 모시겠습니다. 따로 보고 드릴 것도 있고요.”
“좋아.”
벽우진은 감격의 해후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곳곳에서 잿가루를 덕지덕지 붙이고서 일을 하고 있는 속가제자들을 볼 수 있었다.
큰일을 겪었음에도 의외로 밝은 모습들에 벽우진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마주치는 속가제자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아주었다.
“자, 장문인!”
“고생했다. 참으로 잘 버텨주었어.”
“아, 아닙니다!”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으며 다독여주는 벽우진의 모습에 속가제자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잿더미로 변한 주변을 치우고 정리하느라 더러워진 그들의 손을 벽우진이 너무나 스스럼없이 맞잡아서였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곤륜파를 지켜줘서.”
“아니에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저희도 곤륜파의 제자인 걸요!”
“고맙다.”
언제 지쳤냐는 듯이 우렁차게 대답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벽우진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마냥 지켜주고 돌봐주어야 하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입문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아이들 역시 곤륜의 제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벽우진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말이다.
“가시죠.”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손을 붙잡고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벽우진을 이끌고서 청민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서였다.
“역시나 다 타버렸구나.”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흠.”
청민이 가장 먼저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약초밭이었다.
곤륜파의 새로운 특산품이 되어줄 거라 기대했던 품목이었지만 지금은 모조리 재로 화해 있었다.
건물은 지켜냈지만 끝내 약초밭만큼은 화마에 내어주었던 것이다.
“가축들도 다 죽었습니다. 일단은 모두 매장한 상태고요.”
“소혜가 슬퍼하겠어. 갖은 정성으로 키웠었는데···.”
“저도 그게 가장 걱정이 됩니다. 누구보다 먼저 목장을 살피던 게 소혜니까요.”
약초밭에 이어 목장 역시 모조리 재가 되었다는 말에 벽우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은 이내 사라졌다.
사람이 남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면, 특히 청민이 이번 일로 죽었다면 곤륜파의 재건은 못해도 30년은 늦춰질 터였다.
“그만한 산불이 났는데 약초밭과 목장이 멀쩡하길 바란다면 욕심이지. 안타깝기는 해도 어쩔 수 없어.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사람이 첫 번째, 그 다음을 건물을 택할 거야.”
“저도 그랬습니다. 전각들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사형의 선견지명 덕분에 둘 다 지킬 수 있었습니다.”
“동굴?”
“예. 필교가 아니었다면 아마 큰 피해가 났을 겁니다. 살아남은 제자들도 얼마 없었을 거고요. 저도 그때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 공사 중인 동굴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때? 낭비가 아니지?”
벽우진이 씨익 웃었다.
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벽우진이 밀어붙인 게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당장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정이 모두를 구해낼 수 있었다.
“예. 진짜 동굴이 아니었으면 피해가 엄청났을 겁니다.”
“거 봐. 쓸데없는 짓 아니라니까.”
“다만 알게 된 이들이 많아졌지만요.”
“괜찮아. 아직 공사가 다 끝난 게 아니니까. 그리고 알려진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었어.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속가제자들을 구한 걸로 하면 싼 값이니까.”
“그렇죠.”
청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가제자들과 배율석, 사천당가의 기술자들을 모두 지켜낸 것만으로도 동혈은 제 몫을 다했다.
만약 그 동혈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면, 식량과 지하수가 없었다면 청민은 무리한 선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불을 지른 놈들은? 설마 놓친 건 아니지?”
“어찌 놓치겠습니까, 그 놈들을. 저뿐만 아니라 호법들께서도 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습니다.”
“하긴. 제자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눈이 벌게질 수밖에 없으셨겠지. 잡아 놓은 놈들은 어디 있어?”
“꽤 많이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이 생포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심문은 하오문에서 했습니다.”
“하오문? 설아린?”
벽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사천성으로 출발하면서 설아린과 무룡대주, 부대주 역시 하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새 올라와 있는 것 같아서였다.
“소문주 일행과 고문기술자 한 명이 와 있는 상태입니다.”
“고문기술자라···.”
“이번 일로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습니다.”
“비밀리에 도모하려고 했는데 그걸 알아내는 게 더 신기하지. 더구나 마음먹고 저지른 일인데.”
벽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하오문이라도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가보시겠습니까?”
“말은 할 수 있어? 이빨 죄다 뽑은 거 아냐?”
“멀쩡한 놈은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은 놈도 없습니다. 확실히 전문가는 다르더라고요.”
“가보자. 곤륜산에 불 지른 놈들 얼굴 좀 보자.”
“예.”
벽우진이 싸늘한 얼굴로 뒷짐을 지었다.
그 모습에 청민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곤륜파에는 감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기에 현재 사용하지 않는 동굴에 죄다 하옥시킨 상태였다.
청민은 그리로 벽우진을 이끌었다.
< 제 52장.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01 > 끝
ⓒ 윤신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