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65화 (165/325)

<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3 >

“결국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이지. 같은 목적이 있어서 모였다고 하나, 끝내 중요한 것은 자기 목숨이니까.”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짓을 저지르고도 살려준다는 말이 나오나?”

장한은 고개도 들지 않고서 머리부터 조아렸다.

차마 두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변명을 하려면 말이 되게 해야지. 다른 놈이 시켜서 왔다고? 그냥 산에 불지른 것도 아니고 정확히 본 파를 노리고서?”

“저, 정말입니다! 저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단에 불과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건 네놈 역시 동범이라는 것이지.”

툭.

끓어오르는 살기를 겨우겨우 억누르면서 청민이 마혈을 짚었다.

친히 자신의 공력을 이용해 곤륜파의 사람이 아니면 절대 풀지 못하게 점혈했던 것이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머리통을 터트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분노는 싹 다 붙잡은 다음에, 심문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분노에 몸을 맡길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냉정해야 했다.

분노에 몸을 맡긴다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혹시 모를 배후를 놓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민은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땅을 박찼다.

“히에엑!”

동료를 제물로 바친 후 죽기 살기로 도주하던 거한이 등골에서 갑자기 소름이 돋자 뒤를 힐끔거리고는 기겁했다.

청민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오는 걸 볼 수 있어서였다.

‘제, 젠장!’

사실 그는 이미 한계까지 몸을 굴린 상태였다.

공력은 진즉에 바닥났고 두 다리 역시 당장이라도 멈춰달라는 듯이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미친 듯이 뛰었다.

붙잡히는 순간 죽게 될 것이 분명해서였다.

‘왜! 어째서! 아니, 왜 하필 이쪽으로 온 거야!’

이번 작전에 동원된 인원만 500명이 훌쩍 넘었다.

그 말인 즉 뿔뿔이 흩어진 인원이 500명이나 된다는 이야기였다.

반면에 곤륜파의 인원은 아무리 많아 봐야 스무 명 남짓이었고.

그런데 하필이면 자신 쪽으로 온 게 거한은 너무나 억울했다.

‘다른 곳으로 가도 되잖아!’

확률적으로 재수 없게 걸렸다는 생각이 들자 거한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두려움이 짙게 서려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복수다운 복수를 하고 세외에서 하던 일을 하며 호의호식하면서 사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동료를 배신하면서까지 도망쳤는데, 얼마 못 왔네?”

“히익!”

“애초에 내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젠장!”

순식간에 추월해서 앞을 막은 청민의 모습에 거한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막탄을 터트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민은 당황하지 않았다.

스르르륵.

대신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연막탄이 시각과 후각을 차단할 수는 있어도 청각은 막지 못했다.

더구나 거한은 뚱뚱한 체격이었기에 더더욱 기척을 죽이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살수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덥석!

“사, 살려주십시오! 다, 다시는···!”

이윽고 청민의 손이 거한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런데 하는 말이 하나같이 똑같았다.

다들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두꺼운 낯짝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화공으로 곤륜파의 사람들을 모조리 태워 죽이려고 했던 놈들이 말이다.

“아직은 안 죽여. 네놈들한테 물어볼 것들이 많으니까.”

“그게···. 컥!”

순식간에 마혈을 점혈한 청민이 그대로 거한을 던져버렸다.

어떻게 떨어지든 신경도 쓰지 않고 냅다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산적들을 찾아 몸을 날렸다.

“크아악!”

“사, 살려···!”

살기등등한 얼굴로 서진후가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의 검격에서 태청검법 특유의 창대하고 웅혼한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지독한 살기만이 담겨 있었다.

“죽어라.”

평소의 부드러운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스산한 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서진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산적들이 보이는 족족 목을 베었던 것이다.

“제기랄!”

“흩어져!”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듯이 서진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무시무시한 살광을 내뿜으며 산적들을 도륙하기만 했다.

청민과 달리 그는 오직 살검만을 뿌렸던 것이다.

그 살벌한 모습에 산적들은 해쓱해진 얼굴로 뿔뿔이 흩어졌다.

“흥.”

혼자뿐인 서진후이기에 흩어지면 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에 서진후는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한들 조금 더 목숨을 연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파아아앗!

오늘 그는 그 누구도 살려 보낼 마음이 없었다.

감히 곤륜파를 향해 이를 드러낸 승냥이들을 그는 오늘 모조리 도륙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이딴 짓을 저지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말이다.

“끄륵!”

“주, 죽어서 네놈을 반드시···!”

서진후는 한 명 한 명 모두 다 쫓아가서 죽였다.

온갖 저주들과 욕설이 난무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런 저주들 따위를 무서워했다면 애초에 살인을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흔적이 선명해지는군.”

살귀처럼 도망치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한 서진후가 눈을 빛냈다.

이동할수록 산적들이 남긴 흔적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어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인원도 제법 되었다.

많아야 다섯 명 정도였던 산적 놈들이 이번에는 스무 명 정도였던 것이다.

“절대 도망칠 수 없다.”

서진후는 오늘 하루만큼은 살귀가 될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그가 느낀 분노는 컸다.

자칫 잘못했으면 또 다시 사문이 불탈 뻔했기에 그는 단 한 명도 살려둘 마음이 없었다.

불 타 버린 사문을 보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본 파를 노린 죄, 모조리 받아낼 것이다.”

수십 명을 죽였음에도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살광을 번뜩이며 서진후가 땅을 박찼다.

다시 추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왔군.”

“음?”

일 각 여 정도를 달리던 서진후가 얼굴 가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도망치기만 했던 산적들이 산중턱의 공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그것도 두려운 기색 하나 없는 얼굴로 말이다.

“놀란 모양이야? 우리가 기다리고 있어서?”

“맞아.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놈들이 갑자기 이러고 있으니까.”

“마냥 도망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그것도 패선도 아닌 일개 장로한테.”

“나 정도는 할 만하다고 여긴 건가?”

“맞아.”

이번 작전의 총수를 맡은 남자가 씨익 웃었다.

호법들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겠지만 다행히 그를 쫓아온 이는 서진후였다.

단 둘뿐인 장로 중에서도 무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진.

그렇기에 남자는 도망치는 대신 싸우는 걸 선택했다.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부하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 하다고 여긴 것이다.

스스슥.

그리고 인원은 스물한 명이 다가 아니었다.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터가 일순 가득 찼다.

게다가 단순히 인원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꾸우욱!

넓게 포진한 산적들의 손에는 화살이 메겨진 활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서진후를 겨냥한 상태로 말이다.

“확실히 준비는 많이 했군.”

“이 정도면 곤륜파 장로 하나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럼 해 봐. 입만 열지 말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쪽은 네놈들인데.”

“쏘기 전에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순순히 붙잡힌다면 죽이진 않으마.”

남자가 팔짱을 끼고서 짐짓 여유로운 척을 하며 말했다.

마치 서진후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남자가 바라는 착각에 불과했다.

“날 담보로 사용하고 싶은 모양이로군.”

“당신만한 인질이 어디 있겠어? 단 둘 뿐인 패선이 사제이자 곤륜파의 장로인데. 더욱이 호법들과 장로들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을 텐데 패선이 얼마나 날뛰겠어?”

“알면서도 이 짓을 잘도 저질렀군.”

“우리만 당할 수는 없잖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걸 패선도 알아야지. 남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자기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는 것도 깨달을 겸.”

“바람이 참으로 거창하군.”

서진후가 남자를 보며 비웃었다.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지껄여서였다.

하지만 그런 서진후의 언행에도 남자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당장 죽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래도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해야 하지 않겠어?”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한다. 네놈들 따위가 아니라.”

“쏴!”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서진후가 움직이자 그 즉시 발사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쌔애애액!

이윽고 화살 수십 개가 허공을 꿰뚫었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직사로 서진후에게 화살을 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발사된 화살들은 주로 팔이나 다리 쪽을 향해 날아갔다.

인질로 잡겠다는 의지를 아직 버리지 않은 것이었다.

“흥!”

그 적나라한 의도에 서진후가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만약 그를 고수라고 생각했다면 이 따위 공격을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우우우웅!

쏜살같이 쇄도하는 수십 발의 화살을 주시하며 서진후가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옅은 푸른빛이 떠올랐다.

바로 호신강기가 펼쳐진 것이다.

터터터텅!

이윽고 수십 개의 화살이 호신강기를 두드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 하나의 화살도 서진후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아, 아니!”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며!”

“일류 정도라고 하지 않았어?!”

호신강기로 너무나 쉽게 화살 세례를 막아내는 서진후의 모습에 산적들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대벽검도 아닌 서진후가 이 정도 실력자일 줄은 꿈에도 몰라서였다.

“고맙다. 이렇게 모여 있어줘서.”

“끄아아악!”

산적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서진후는 검을 휘둘렀다.

애초의 계획대로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이다.

조금의 인정도 담겨 있지 않은 지독한 살검에 곳곳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주, 죽여!”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한 명뿐이야! 칼에 찔리면 뒈지는 건 똑같은 인간이라고!”

“으아아악!”

짙은 살기를 뿌리며 검을 휘두르는 서진후를 향해 산적들이 달려들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에 목숨을 걸었다.

혹시라도 서진후에게 칼침을 넣을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콰아아앙!

그런데 그때 그들의 실낱같은 희망을 산산이 박살내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공터의 우측에서 무지막지한 검강이 솟구치며 산전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던 것이다.

“살기 좀 죽여라. 다 죽이면 안 돼.”

“청민 사형.”

“배후가 있을 수 있어. 화가 나는 건 이해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아···.”

살기로 가득했던 서진후의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너무 흥분한 탓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이런 니미럴!”

“일단 저 놈부터.”

대벽검이라 불리는 청민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두머리격인 남자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부하들이 죽거나 말거나 자신의 몸부터 내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모여 있던 산적들이 각자 제 살 길을 찾아 사방팔방으로 도주했다.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서진후가 두 눈을 빛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신형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3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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