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2 >
“크크큭! 크하하하! 잘 탄다!”
초열지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불타오르는 곤륜산을 올려다보며 작달막한 체구의 중년인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불이 제대로 붙은 즉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곤륜파의 고수들이 산불을 뚫고 내려와 한 명이라도 붙잡힌다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였다.
그런데 중년인은 열심히 달리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거리가 멀지만 곤륜파가 활활 불타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고.
“아쉽군. 그 재수 없는 고루거각들이 모조리 불타서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었는데. 더불어 개새끼의 절망하는 표정도.”
두 번이나 불타버린 곤륜파의 터를 보며 무너져 내릴 벽우진의 표정이 그는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상상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육안으로는 가까스로 보이는 거리가 벽우진에게는 지근거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래도 만족스럽군. 아주 제대로 불타고 있으니.”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 기세로 미친 듯이 솟구치는 시커먼 연기를 올려다보며 중년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활활 불타는 곤륜산을 보니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서였다.
“지금쯤 고통에 신음하며 익어가고 있겠지? 큭큭!”
고수들인 호법들이야 제 한 몸 건사하겠지만 이제 막 입문한 속가제자들은 달랐다.
아니, 어쩌면 어린 속가제자들을 구한다고 호법들 역시 불구덩이 속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옥불이 자신들의 몸을 야금야금 불태우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그 놈의 제자들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단 둘 뿐인 사제가 남아 있으니.”
벽우진의 직계제자들이 없는 게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제 두 명이 전부 곤륜산에 있었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놓쳤지만 다음번에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앞으로도 계속,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끝까지 물어뜯어 줄 테니까.”
“뭘 물어뜯겠다는 거지?”
“히익!”
느닷없이 들려오는 스산한 음성에 중년인이 퍼뜩 놀랐다.
낯선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살기에 중년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수하다 못해 정제된 살의가 낮게 깔린 목소리에 너무나 진득하게 맺혀 있어서였다.
드드드득.
그래서 중년인은 마치 목각인형처럼 어색하게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해봐. 이왕이면 내 면전에 대고.”
“으으으!”
겨우겨우 몸을 돌린 중년인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살기충천한 상태의 도사 열 명이 서 있어서였다.
그 중 한 명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아니, 잊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산적 놈들의 소행이냐? 아니. 녹림십팔채가 나선 건가?”
꿀꺽!
서슬 퍼런 설백의 눈빛에 중년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본능적으로 바짝 얼었던 것이다.
“그건 차차 심문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다른 놈들입니다.”
“함께 온 놈들은 어디 있지?”
“그, 그게···.”
평소와 달리 잔뜩 굳은 얼굴로 허륭이 말했다.
그러자 설백이 무시무시한 안광을 뿌리며 중년인에게 질문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사지를 절단내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준 모양이야.”
“끄아아악!”
중년인이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따끔하더니 팔이 뚝 떨어지자 비명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어깻죽지부터 팔이 잘렸는데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시 묻겠다. 다른 놈들은?”
“으, 으어어···.”
“고통을 잊는 데는 고통만한 게 없지.”
툭.
이통치통(以痛治痛)이라는 듯이 설백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쪽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으윽!”
순식간에 양팔이 잘린 중년인이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땅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양팔을 보자 순간적으로 극도의 충격을 받아 정신 줄을 놓은 것이었다.
퍽!
하지만 설백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검면으로 중년인의 얼굴 옆면을 후려쳤던 것이다.
“크헉!”
동시에 그 충격으로 너무나 깔끔하게 절단되어 피가 흐르지 않았던 상처 부위에서 피가 솟구쳤다.
“말해라.”
“으으으···.”
“지금 말하면 고통 없이 보내주마. 내 약속하지.”
“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 모두 다요.”
고통과 공포에 결국 중년인이 무너졌다.
아까 전의 그 앙천광소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중년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로?”
“사, 사방으로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다 세외 쪽으로 나간다는 것밖에는!”
“아무래도 여기에서 흩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중년인의 다급한 대답에 청민이 입을 열었다.
독촉해 봤자 더 이상 쓸모 있는 정보는 나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이미 시간이 상당히 흘렀기에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해지기 전 이곳에서 보지.”
“예.”
“물론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야겠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설백이 왼손으로 중년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아, 안 되에-!”
순식간에 던져진 중년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의미 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두 팔이 잘리고 붙잡힌 순간 전신혈맥이 모조리 뒤틀렸기에 불 속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전무했다.
“죗값은 받아야지.”
“개새끼들-! 약속을···! 끄아아악!”
멀리서 중년인의 쌍욕과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설백은 물론이고 누구도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이 정도는 복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가세.”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비명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서 설백이 몸을 날렸다.
이윽고 열 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헉헉헉!”
비쩍 마른 장한이 전력으로 비탈길을 달렸다.
내리막길이기에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크게 다칠 수 있었지만 장한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산을 내려가는 일에만 집중했다.
“같이 가자!”
“서둘러!”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천천히 가자. 지금쯤 정신없이 불 끄고 있을 텐데.”
죽기 살기로 전력질주 하는 장한과 달리 뒤따라오던 거한은 히죽 웃으며 설렁설렁 뛰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보폭도 차이가 났고, 경신술은 장한보다 그가 좀 더 나았기에 느긋하게 뛰어도 충분히 비슷하게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장담해? 막말로 진화를 포기하고 빠져나왔으면?”
“추격할 정신이 있을까?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는데? 그리고 호법들이나 장로들은 몰라도 애송이들이 저 화마 속에서 멀쩡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은데.”
“자네가 너무 비관적인 거야.”
거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쪽에서 악마의 혓바닥처럼 일렁이는 불길을 쳐다봤다.
웬만한 고수라도 저만한 산불을 뚫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짐들을 덕지덕지 붙이고서는 더더욱.
“대막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심하면 안 돼.”
“이 정도 왔으면 괜찮다니까. 패선이라면 모를까 호법들로는 힘들어. 장로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 장로지 사실 패선의 그늘에서 덕을 보고 있는 늙은이들이잖아. 장로도 급이 있지.”
“일단 최대한 멀어진 다음에 여유를 부리자고. 감이 좋지 않아.”
“그 놈의 감 타령은. 가는 길에 감이나 구했으면 좋겠네. 아주 잘 익어서 달달한 놈으로.”
끝까지 신소리를 하는 거한의 모습에 장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이 맞아 함께 이동하기로 했지만 이런 모습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여유를 부리는 건 좋지만 이왕이면 상황을 보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잡히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지? 절대 좋게 죽지는 못할 거야. 놈들 두 눈이 분노로 벌게져 있을 거라고.”
“걱정도 사서하고 있네. 그럴 일 절대 없다니까. 저만한 산불이면 소림무제나 무당권제도 별 수 없을 걸. 솔직한 마음으로는 패선이 있을 때 불을 질렀어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막말로 저걸 인간이 어떻게 뚫어? 가로지르다가 통구이가 되겠다.”
“제발 여유는 감숙성을 관통한 다음에 부리자, 제발!”
“이제는 천천히 가도 된다니···.”
다시 한 번 산불을 돌아보던 거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멀리서 까만 점이 빠르게 커지기 시작하는 게 보여서였다.
“왜 그래?”
“튀, 튀어!”
거리가 상당하지만 거한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금 누군가가 정확히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달려오는 이는 곤륜파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갑자기 왜 그래?”
“튀라고! 살려면 죽어라 뛰어야 해!”
“무슨···!”
갑자기 다급해진 거한의 표정과 말투에 비쩍 마른 장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는 하나의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미친놈처럼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서 달려오는 노인을 말이다.
“으아아아!”
“내가 뭐라고 했어, 새끼야!”
그것을 확인한 장한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게도 안 좋은 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동시에 나란히 달리는 거한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진즉에 전력으로 도망쳤으면···!”
“미안하다! 근데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냐!”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둘은 오로지 정면만 바라보고 죽어라 뛰었다.
쥐똥만한 공력은 물론이고 젖 먹던 힘까지 모조리 긁어모아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헉헉헉!”
입에서 단내가 나고 전신이 후들거렸지만 둘 다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사신의 검이 자신들의 목에 닿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흐, 흩어지자!”
“뭐라고?”
“이대로 가면 둘 다 잡혀! 한 명만 쫓아오니까 여기서 흩어지자!”
“확률은 반반인가.”
장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같이 도망치면 같이 죽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갈라지면 둘 중 하나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반대로 한 명은 죽음이 확실시 되고.
“에잇!”
그때 거한이 갑자기 그를 밀었다.
장한이 고민하는 사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앞세워 힘으로 장한을 밀어버렸던 것이다.
“켁!”
애초에 체격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비쩍 마른 장한은 무기력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사이 거한이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쏜살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장한을 제물로 삼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저, 저 개새끼가!”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에 장한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소리치는 게 전부였다.
그의 경신술로는 거한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싸우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우선이었다.
어쩌면 거한을 잡으러 갈 수도 있으니까.
‘이, 일단은···!’
거기까지 생각한 장한이 방향을 크게 비틀었다.
배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복수보다도 생존이 먼저였다.
툭.
“어?”
그런데 그때 불에 탄 흔적과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죽신이 두 눈에 들어왔다.
막 일어서려는 찰나에 한 쌍의 가죽신이 보였던 것이다.
<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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