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패선-163화 (163/325)

<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1 >

심대혜의 말에 양일우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반응은 다른 아이들에게 번지듯이 퍼져 나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나?”

심대현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지금 사부님께 들은 거야.”

“다들 준비해. 설명은 이동하면서 해줄 테니. 저녁은 육포로 대신할 거야. 달리면서 먹는다.”

“예!”

벽우진의 말에 제자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서둘러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소식은 없소이까?”

“현재로서는 이게 전부입니다. 읽어 보시죠.”

“으음!”

유일하게 자리에 남아 있던 진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오문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었다.

그러나 딱히 다른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얼마나 긴박했는지 불이 났다는 소식이 전부였던 것이다.

“일단은 최대한 서두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먼저 가겠소.”

“혼자 가서 될 문제였으면 제가 먼저 출발했을 겁니다. 다른 공격도 아니고 화공입니다. 진 호법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

진구가 입술을 깨물었다.

매몰찰 정도로 냉정한 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곤륜파를 집어 삼킬 정도로 거대한 화마는 그 자체로 재앙이었다.

그런 재앙은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답이 없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였으니까.

‘장문인마저도 불가능하단 말인가.’

진구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천하의 패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하자 얼마나 큰 위기인지 실감이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형님들과 청민, 서진후가 걱정되었다.

형님들은 모르겠지만 청민과 서진후는 곤륜파의 터를 지킨다고 기를 쓰고 뛰어다닐 게 자명해서였다.

“이미 시간이 제법 흐르기도 했고요. 아무리 저나 진 호법님이 빨라도 당장 곤륜산에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소이다. 나도 준비하겠소.”

“모두 모이면 바로 출발할 겁니다.”

진구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며 벽우진이 두 눈을 감았다.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벽우진은 과연 누가 불을 지른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명확하게 어떤 놈이라도 단정 짓기가 힘들었다.

‘이렇게나 적이 많았던가.’

유명해진 만큼 적이 많아진 사실에 벽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원한이 상당히 쌓였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량을 베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원래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갚는 게 강호의 철칙이지 않던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주마. 그리고 끝까지 추격해주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말이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나 곤륜파와 원한관계가 있는 자, 혹은 자들이 불을 질렀을 확률이 컸다.

때문에 벽우진은 정말 순수하게 살의를 일으켰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찾아내주마.”

적어도 벽우진은 지금껏 정의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재물에 욕심을 부린 적은 많아도 말이다.

그런 만큼 벽우진은 확신했다.

곤륜산에 불을 지른 이들이 절대 선인(善人)은 아닐 것이라고.

다다다닷!

“준비 다했습니다, 사부님!”

“전원 집합했습니다!”

“호법님도 내려오셨습니다!”

벽우진이 서늘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을 때 그의 앞으로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진구 역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도착했다.

“가자.”

“예!”

다른 곳도 아니고 집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에 아이들의 두 눈에는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어서 빨리 곤륜산에 도착해서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심소혜의 표정이 가장 심각했다.

곤륜산이 불타고 있다는 말에 키우는 가축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딸랑.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기에 벽우진은 탁자 위로 은자를 던졌다.

점소이가 보이지 않기에 미리 계산을 한 것이었다.

뒤늦게 나가는 벽우진을 일행을 보고서 달려온 점소이는 탁자 위에 있는 은자를 확인하는 함박미소를 지었다.

스스슥!

점소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벽우진은 아이들을 이끌고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곤륜산까지의 최단거리로 질주를 시작했던 것이다.

‘미련하게 고집 부리지 마라, 청민아.’

어둠 속을 질주하며 벽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청민이 미련한 선택을 했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호법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의외로 넓은 동혈 안의 모습에 속가제자들이 두리번거렸다.

곤륜산에 머문 지 꽤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다들 극도로 지친 상태이기에 움직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심각한 이들은 없어. 대부분이 탈진이야.”

“정말 다행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의식불명인 애들이 많았을 거야. 정말 한 끝 차이였어.”

“후우!”

비현의 말에 배율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속가제자들을 살뜰히 챙기는 손자에게로 향했다.

나이는 어려도 유일한 진산제자였기에 힘들어도 그 기색을 숨기고 속가제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손자를 참 잘 키웠어. 아주 대견해.”

“허허허. 제가 한 건 없습니다. 알아서 잘 큰 녀석이라서요.”

“할아버지 보고 큰 게지. 부모랑. 원래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면서 크는 거야. 괜히 부모가 자식의 동경(銅鏡:거울)이라고 하는 게 아니지.”

뿌듯하게 웃는 배율석의 모습에 비현 역시 옅게 웃었다.

하지만 동굴 밖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불길은 막아낸 것 같지만 열기와 연기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 갔기 때문이다.

환기를 위해 동굴 천장에 구멍을 뚫어 놓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버티는 것이었지 호흡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괜찮으신 거겠죠? 아까 전에 무리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일단은 지켜봐야지. 요상약을 드리기도 했고.”

“근데 어디일까요? 이딴 짓을 저지를 놈들이.”

배율석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물었다.

대관절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는 정말 궁금했다.

그리고 꼭 면상을 보고 싶었다.

“한두 명이 아닌 건 분명해. 그리고 계획적으로 준비한 것도 확실하고. 즉흥적이었다면 이렇게 확실하게 몰아붙일 수가 없어. 방향까지 계산하고서 불을 지른 거야.”

“아직 근처에 남아 있겠죠? 우리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할 테니.”

“모르지. 도망쳤을 수도 있고. 우리 소식이 전해지면 장문인께서 곧바로 달려오실 테니.”

“하지만 성도에서 출발하신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배율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아무리 벽우진이라도 축지법을 쓰지 않는 한 당장 이곳에 오는 건 힘들었다.

아니, 축지법을 쓴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바로 달려오실 게야.”

“당연히 그러시겠죠. 다만, 아직은 전달이 되지 않았을까요. 하오문이 늘 본 파를 예의주시 한다고는 하지만···.”

“이만한 불이 났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 물론 사태파악은 해도 이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고수라도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는 건 매한가지니까.”

“그렇죠. 무인이라고 해서 질식사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번쩍!

그때 가부좌를 틀고 있던 설백이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운기요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 뒤로 호법들이 차례대로 눈을 떴다.

“아이들은 어때?”

“크게 위험한 아이들은 없습니다. 다들 탈진한 정도입니다.”

“화상을 입은 아이들은?”

“없습니다.”

설백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큰 피해는 면한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속가제자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제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대호법님은 괜찮으십니까? 옷이···.”

“살짝 그을린 것뿐이네. 내상 역시 공력을 과도하게 운용해서 그런 거고.”

“허면 좀 더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면이 좀 있는 비현과는 달리 설백과는 그동안 접점이 별로 없었기에 배율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상약을 먹었기에 어느 정도 회복이 되기는 했을 테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닐 게 분명해서였다.

“시간이 없네.”

“예?”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찾아야 해.”

배율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더없이 진지한 설백의 표정이 지금 진담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려줘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기색은 다른 호법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분노를 억누른 표정으로 형형한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화마가 아직도 사납습니다.”

“막는 건 힘들지만, 가로지르는 것은 괜찮네.”

“뚫고 지나가는 건 가능해. 모두가 함께 한다면.”

“형님!”

운기요상을 끝낸 청민마저도 설백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말하자 배율석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들이라고 하나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불구덩이에 들어가면 타서 죽는 건 그나 호법들이나 똑같았다.

하지만 청민이나 설백은 단호했다.

“죽지 않아.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거든.”

“사형 말이 맞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화병으로 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진후 역시 운기요상을 끝마치고서 다가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노기가 짙게 서려 있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것도 이제 막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말이다.

“우리 둘만으로는 버겁겠지만···.”

“우리들과 함께라면 뚫고 지나갈 수 있네.”

청민과 설백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둘이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장로님들과 호법님들마저 위험해지면···.”

배율석이 불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비전투인력이라 할 수 있는 비현은 남아 있겠지만 그래도 무게감에서 설백이나 청민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괜히 장문인 대리, 대호법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만약 열 명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벽우진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절대 안 죽을 테니까.”

“할 만 하니까 하겠다고 하는 거야. 오히려 놓치면 치욕스러워서 죽게 될 거다.”

“가세.”

설백이 재촉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상태였기에 서두르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청민과 서진후는 배율석과 비현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동굴의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쿠그긍.

통째 돌로 이루어진 석문이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동시에 후끈한 열기가 열 명의 얼굴을 덮쳤다.

분명히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열기만큼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느낌이었다.

“찜통이 따로 없군.”

“불도 불이지만 열기와 호흡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야말로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듯한 무시무시한 열기에 호법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요상약을 먹기는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급한 불을 끈 정도였다.

다시 한 번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한다면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반년 정도를 요양해야 할 터였다.

“이걸 쓰십시오.”

“응?”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점점 더 농밀해지는 열기에 설백마저도 잠시 멈칫거릴 때 등 뒤에서 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천들을 가져왔던 것이다.

“고맙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걱정 마라.”

긴 천으로 입과 코를 복면처럼 가리며 설백이 눈을 빛냈다.

이윽고 설백을 위시로 아홉 명은 지옥의 초열지옥을 방불케 하는 불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쑤아아앙!

물론 단순무식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선두의 설백이 검강으로 불꽃을 가르면 허륭이 앞으로 치고 달리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차륜전처럼 번갈아가며 길을 열었던 것이다.

< 제 51장. 곤륜의 또 다른 검들. -01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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