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0장. 화마(火魔). -02 >
“아직 불도 안 피웠다, 이 녀석들아. 도망칠 궁리는 작업을 다 끝난 다음에나 해라!”
“옙!”
“다들 위치는 숙지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혹한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추위를 가르며 산을 오르던 산적들이 이내 목표했던 위치에 도착했다.
풍향까지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최적의 위치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발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불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망 확실하게 봐!”
“예!”
오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었지만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다들 곤륜파로 인해 산채가 박살났기에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였다.
“1조 이상 무!”
“여기도 이상 무!”
각 조마다 한 명씩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
나무를 망루처럼 이용해 내려다보이는 곤륜파의 동태를 살폈던 것이다.
“계집들이 좀 있네.”
“얼마 전에 속가제자들 뽑았잖아. 제법 많이 뽑은 걸로 아는데.”
“불쌍하네. 입문하자마자 죽게 되었으니.”
“다 제 복이지. 오늘 뒤질 운수인 거고.”
눈이 좋은 이들로 고르고 골라서 뽑았기에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대다수가 곤륜파 경내를 돌아다니는 이들을 확인했다.
얼굴까지는 못 보더라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구별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선은 여인들에게 향해 있었다.
“저 것들 따 먹는 게 진짜 제대로 된 복수일 텐데.”
“아서라. 흔적 남기면 좆 되는 거 잊었어? 우리는 불이 확실하게 붙은 것만 확인하면 바로 도주해야 해. 혹시 모를 흔적들도 싹 다 지우면서.”
“도중에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데. 저기를 싸그리 다 불태워야 하는데 말이지.”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니까 금방 도달할 거다.”
“곤륜파 놈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걸 보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겠지?”
작달막한 키의 중년인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가 있던 산채가 박살났던 것처럼 곤륜파 역시 아작 나는 꼴을 보고 싶어서였다.
아니, 비명만 들어도 더없이 즐거울 것 같았다.
“나도 같은 심정이기는 한데, 알잖아.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작게 하는 걸. 패선 만큼은 아니지만 호법들은 그 괴물 같다던 십존들도 맞상대했던 고수들이야. 믿기 힘들지만 구파일방의 수장이나 장로급 고수들이라고. 괜히 구경했다가 붙잡힐 수 있어. 너도 복수 중에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이걸로 만족하자고. 하루만 지나도 소식은 들을 수 있으니까. 이동하는 중에 몰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통쾌하겠어?”
“크흐흐흐!”
모조리 다 불타서 재만 남은 곤륜파를 떠올리며 중년인이 음충맞게 웃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머지않아 벌어질 일이기도 하고.
슥!
그때 산적 하나가 붉은 깃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소리를 지르면 혹시라도 곤륜파의 도사들이 들을 가능성도 있기에 이렇게 따로 신호를 정한 것이었다.
화르르륵!
이윽고 곳곳에서 횃불에 불을 붙였다.
지게에 싣고 왔던 기름을 죄다 뿌리고 드디어 불을 붙일 준비를 했던 것이다.
동시에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 산적들에게서 무거운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복수의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였다.
“우리도 내려가자. 기름 때문에 순식간에 불이 붙을 거야. 재수 없이 불길에 휩싸이면 바로 뒤지는 거 알지?”
“당연하지. 근데 아직도 아쉽네. 곤륜파의 마지막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게.”
“나도 그래. 하지만 이쯤에서 만족하자고. 대신 패선이 길길이 날뛰는 걸 전해들을 수 있잖아?”
“그것도 정말 보고 싶군.”
망을 봤던 인원들이 올라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깃발을 들고 있던 거한이 좌우로 거칠게 깃발을 휘저었다.
솨아아아!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것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다.
기름이 뿌려져 있던 땅 위로 불꽃이 무섭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파바바밧!
그와 동시에 횃불을 들고 있던 산적들이 일제히 곤륜파가 있는 방향으로 횃불을 던지며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까지 곤륜파가 불타기를 기원하면서 횃불을 던졌던 것이다.
“네놈도 소중한 것을 잃어봐야지. 늘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쓰나. 큭큭.”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강퍅한 인상의 우두머리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린 후 몸을 돌렸다.
이제는 퇴각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산하는 산적들의 방향은 각기 달랐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추격에 대비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던 것이다.
후우우웅!
산적들이 떠난 자리에 거대한 불꽃이 치솟았다.
바람에 힘입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화마(火魔)로 돌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화마는 산적들이 원하던 대로 정확히 곤륜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설백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생을 통들어 지금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어서였다.
“응?”
열심히 노력하는 제자를 지켜보던 설백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의 예민한 기감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사부님?”
갑자기 달라진 설백의 기도에 연무장에서 기본기를 수련하던 남아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설백은 제자의 부름에도 몸을 돌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곤륜파를 덮쳐오는 거대한 연기에 온 시선을 빼앗겼던 것이다.
“산불?”
하늘을 가득 채우겠다는 듯이 새카만 연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그 연기를 보는 설백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눈에 저 불길이 곤륜파로 향해 오고 있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뎅뎅뎅뎅!
다른 이도 연기를 본 것인지 경내에 종이 거칠게 울려 퍼졌다.
비상사태임을 종을 쳐서 모두에게 알렸던 것이다.
“저건 결코 자연적인 불이 아냐. 산불이 잦아지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방향이 너무 절묘해.”
“부, 불이 난 건가요?”
“아무래도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것 같구나. 일단 가자.”
“예, 예!”
어느새 하늘을 반쯤 가려버린 까만 연기에 제자가 얼굴 가득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연기만 봐도 산불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였다.
특히 방향을 잃은 듯이 하늘을 이리저리 가로 지르는 새들로 인해 제자는 더욱더 두려움에 휩싸였다.
‘분명 사람의 짓이다.’
겁에 질린 제자를 이끌고서 설백이 황급히 개인 연무장을 나섰다.
일단은 모두 모여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대호법님!”
“시간이 없다. 불부터 꺼야 해.”
“저희를 노린 방화입니다. 사방에서 산불이 조여 오고 있습니다.”
대연무장에 도착하자 다른 호법들은 물론이고 청민과 서진후가 속가제자들을 데리고서 모여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속가제자들의 동요가 생각보다 더 컸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 대가 다들 어리다보니 더 그런 듯싶었다.
“내가 보기에도 인위적인 산불이야. 정확히 본 파를 노린.”
“서둘러 결정해야 합니다.”
“결정해야 한다고?”
“예. 불길이 가장 약한 곳을 노리고 돌파하던지, 아니면 불을 끄던지.”
설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연히 불을 끄자고 말할 줄 알아서였다.
한데 청민은 가장 먼저 대피를 말하고 있었다.
“대피를 하자고? 이곳을 버리고?”
“예. 건물은 다시 지으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닙니다. 죽으면 다시 되살릴 수 없습니다.”
청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설백이 더 놀란 건 빠른 결단이었다.
청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곤륜파의 터를 버리자고 말했다.
그게 설백은 너무나 놀라웠다.
“정말로?”
“예. 이미 한 번 해봤는데 두 번이라고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대피를 한다면 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불을 지른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산불로 인해 흔적이 전부 다 사라지기 전에요.”
“으음!”
설백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속가제자들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지금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지금껏 살아오면 이렇게 거대한 산불은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민은 너무나 놀랍게도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그 이후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대호법님.”
“장문인이 부재 시에는 자네가 대표이지 않나. 자네가 선택하는 게 맞아.”
“······.”
청민의 동공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새삼 장문인 대리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져서였다.
그라고 건물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지은 전각들이던가.
하지만 냉정하게 경중을 따졌을 때 사람이 먼저였다.
“다만 부언을 하자면 나는 굳이 양자택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 말씀은?”
“불을 끄고 불을 지른 놈들을 잡아도 될 것 같거든.”
“그게 가능할까요?”
청민이 흔들리는 표정을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어서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될 수도 있었다.
“진구가 없지만 우리 아홉 명이 전부 다 남아 있지 않나. 속가제자들도 있고. 인원이 적긴 하지만 그렇다고 역량이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미 정이 들었는지 저도 포기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약초밭까지 지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건물은 지켜낼 수 있을 듯싶습니다.”
허륭에 이어 파풍과 비현이 거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서 화마는 덩치를 키워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었다.
“계곡물로 가능할까요?”
“물은 불을 끄는 용도가 아니라 불이 붙지 않은 용도로 사용해야 하네. 그리고 그 역할은 아이들이 해줘야 하고. 대신 우리는 불길을 저지하겠네.”
“저도 돕겠습니다.”
“당연히 도와야지.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할 때네.”
“예.”
청민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산불을 지른 이들을 어떻게든 잡아내서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서두르지.”
결정이 내렸으니 이제는 부지런히 움직일 때였다.
서둘러 움직여야 불 지른 놈들의 흔적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에 설백은 검을 뽑아 들고서 불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바바밧!
설백을 위시로 비현을 제외한 호법들 전부가 좌우로 갈라섰다.
거대한 화마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던 것이다.
후우웅!
가까이 다가갈수록 살갗이 익을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덮쳐왔지만 누구 하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벌겋게 익어감에도 화마를 향해 다가갔다.
“일단 불길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들게!”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곳곳에서 강기들이 솟구쳤다.
땅거죽을 뒤집어 불길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다.
“얼른 움직여!”
“쉬지 말고 물을 날라! 불이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막아야 해!”
호법들이 쉬지 않고 강기를 뿌릴 때 속가제자들도 정신없이 움직였다.
각자가 나무통을 들고서 계곡이나 우물에서 물을 퍼서 뒤집어진 땅을 향해 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휘는 비현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가만 두지 않겠다!”
“으아아아!”
한편 청민과 서진후는 말 그대로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극도로 흥분한 것과 달리 두 사람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호법들을 보조하며 빠르게 불길을 막아냈던 것이다.
‘반드시 잡아낸다! 어떻게 해서든!’
< 제 50장. 화마(火魔). -02 > 끝
ⓒ 윤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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